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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김매자 “춤은 아름다움 아닌 삶 보여줘야”

현존하는 민간무용단중 최고(最古) 역사의 창무회가 올해 40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한 ‘창무 큰춤판’(10월4일∼12월28일)이 홍익대 부근 포스트극장에서 진행되고 있다. 창무회 출신 19인 안무가의 릴레이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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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간 진행될 ‘창무 큰춤판’엔 임학선·한명옥·김선미 등 창무회 출신 중견 무용가 19인의 공연이 이어진다. 김매자씨는 “창작춤의 뿌리와 저변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창무회 40년엔 춤꾼 김매자(73)의 삶이 그대로 투영됐다. 그는 1976년 4명의 후배·제자와 의기투합해 창무회를 창립하며 기존 전통춤·신무용과는 결이 다른 ‘창작춤’ 영역을 개척했다. ‘창작춤의 대모’란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쪽진 머리, 단아한 옷고름, 비단옷감과 버선 등이 한국무용으로 인식돼던 1970년대, 맨발에 저고리를 벗어던진 자유분방한 춤사위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지랄춤’이라 불리기도 했다.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박제화된 전통춤이 김매자의 등장과 함께 인간적 향취를 갖춘, 동시대성을 획득하게 됐다”고 평했다.
 
왜 창무회를 만들었나.
“이화여대 무용과 3학년때로 기억한다. 서울시민회관에서 미국 흑인 무용수 엘빈 에일리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보면서 눈물이 났다. 자기를 드러내며 꿈틀거리는 몸짓이 내가 추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때까지 난 예쁘게만 췄다. 아니 그렇게 배웠다. 따로 단체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무당과 굿 등 무속, 불교제례 등을 하나씩 익혀갔다. 그저 아름다운 게 아닌, 우리네 삶을 표현하고자 했다.”
맨발로 춤을 춘 이유는.
“70년대까지 한국춤이라면 의례 한복 입고 버선 신고 추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버선을 신을 수 있는 이들이 과연 몇 명이었을까. 귀족만을 위해 복무하는 게 예술은 아니다. 많은 이들의 일상을 담아내는, 생활에서 기반한 몸짓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우리 민족에게 땅이란 어머니처럼 푸근한 존재 아닌가. 땅과 밀착하기 위해서, 온전히 한 몸이 되기 위해서도 맨발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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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창무회 400회 공연기념 ‘춤본’ 무대에 출연한 김씨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 등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1991년, 이대 입시부정 사건에 연루돼 학교를 떠나며 춤인생에 오점을 남긴다. 김씨는 “억울하지만 변명하고 싶지 않다. 그것 역시 내가 짊어져야 할 업보”라고 말했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통예술원)는 “개인적으론 불행이지만, 91년 이후 김매자의 춤은 달라졌고 훨씬 깊어졌다”고 말한다. “학교라는 온실을 벗어나면서 ‘생존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춤에 묻어나는 듯 보였다. 아픔이 춤꾼 김매자의 예술혼을 부활시켰다”고 평가했다.
 
무용전문지 ‘몸’도 발행하고 있는데.
“이론적 토대가 없으면 춤도 없다는 철학이다. 이른바 ‘춤의 지성화’다. 창무회가 출범할 때만 해도 왜 이렇게 춰야 하는지, 어떤 동작을 하는 게 맞는지 등 모든 분야에 기본이 없었다. 그래서 춤 동작을 연습하는 것만큼 그 뿌리는 어디서 비롯됐는지도 열심히 파고들었다. 그 일환으로 무용전문지 ‘몸’을 매달 발간하고 있다. 22년 됐다. 나올 때마다 수백만원씩 적자다. 다들 그만두라는데, 도저히 포기 못하겠더라. 팔자려니 생각한다. 11월부터 웹진으로 운영한다.”
춤의 세계화에도 앞장 섰다.
“84년 미국 최고 권위의 『댄스매거진』 표지 모델을 했다. 아시아인 최초다. 2006년엔 프랑스 리옹 ‘메종 드 라 당스’에 한국인 최초로 섰다. 지금껏 해외 100여개 도시에서 400여회 공연했다. 난 개런티 받고 외국 나갔다. 그들이 왜 나를 부르겠나. 내 것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혀 꿀리지 않았다.” (2011년 일본 교토조형예술대학에선 김매자 춤을 집중 연구하는 심포지엄도 열렸다.)

그에게 두 딸이 있다. 그 중 작은 딸이 지난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딸은 자폐증이 있었다. “임신했을 때도 복대 꽉 차고 연습했어. 그래서 아이가 그런 게 아니었을까 평생 죄스럽더라고.” 장애가 있는 딸을 어머니는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공연장에서 모녀가 있는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 “성인이 되고 나이가 들수록 증세가 심해졌어. 대소변을 못 보고, 거칠어지고…. 40여년 고생만 했는데, 좋은 데 갔을 거야.” 그는 딸을 잃고도 6일 뒤 무대에 올라야 했다.
 
이번에도 공연을 하는지.
“물론이다. 12월27일 ‘춤본-하늘·땅·인간’이란 작품을 선보인다. 지금도 스트레칭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춤은 속일 수 없다.”

글=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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