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7인의 작가전] 포트리스(The Fortress) #10. 규칙 (2)

기사 이미지
원진이 정원으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웃는 것도 아니고 찡그린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보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피부와 얇은 팔다리, 그리고 툭 튀어나온 배. 누가 봐도 운동을 한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했던 운동이 있다면 골프 정도. 하지만 기본적인 체격이나 골격을 보면 방심할 수 있는 사이즈는 아니었다.

원진의 머릿속에 강을 건너는 양과 늑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양 세 마리를 늑대 한 마리와 함께 강을 건너게 하는 것인데, 양이 늑대와 단둘만 있을 땐 늑대가 양을 잡아먹기 때문에, 양을 혼자 두지 않고 늑대와 함께 강을 건너게 하는 이야기다.

원진이 집을 비우면 아내 희경은 보원과 선경 부부와 남게 된다. 머릿수에서 밀리기 때문에 보원 부부가 마음만 먹으면 집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불현 듯 떠오른 불안감에 원진의 표정이 굳었다. 원진은 아무 생각 없이 나오고 있는 보원을 보며 절대로 아내 혼자 집에 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외부에 나갈 땐 보원과 꼭 동행하겠다는 규칙을 또 하나 새웠다.

보원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원진을 향해 의미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진은 그가 다가오자마자 두꺼운 절연 장갑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전기 배선 같은 건 해봤어요?”
 
보원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결재 판이나 들고 다니던 놈이 뭘 알겠어요. 전기 관련해서는 형광등 가는 거 밖에 몰라요.”
 
잠시 생각하던 표정이 되었던 원진은 보원의 손에서 장갑을 도로 가져가며 말했다.
 
“뒤뜰에 가보면 사다리 하나 있을 거예요. 그것 좀 가져다주세요.”
 
“네.”

 
보원이 사다리를 가지러 간 사이 원진은 집 바깥쪽,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열쇠를 꽂았다. 담벼락 위에 둘러진 울타리에 전기를 공급하는 주 전원이었다. 전기를 내리는 것 자체가 불안했지만 보수를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스위치를 내렸지만 겉보기에 전기울타리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침입하려는 놈들도 전기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어디로 가져갈까요?”
 
“저쪽에요. 저기 철조망 늘어진 곳이요.”

 
보원은 원진이 가리킨 곳으로 가 사다리를 벽에 걸쳤다. 원진은 사다리에 올라가 드라이버로 울타리를 살짝 건드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절연 장갑을 끼우고 울타리를 보수하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곳은 제대로 꼬았고 끊어진 곳은 이었다. 늘어진 곳은 드라이버로 감아서 팽팽하게 만들었다.
 
사다리를 잡고 있던 보원이 입을 열었다.
 
“원진 씨, 세상이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원진은 작업을 하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몰랐죠.”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집을 지을 생각을 다 했어요?”
 
“그냥.”

 
보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 여기 집들이 왔을 땐 낭비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과했으니까.”
 
“과한 건 사실이죠.”
 
“전혀요. 세상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될 줄 알았다면 저도 뭔가 했을 겁니다. 이렇게까지는 못하겠지만.”
 

보원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가 섞인 웃음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몇 개월 만에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가 있는 건지…. 아참 회장님은 어떻게 되셨어요?”
 
집들이 때 대기업 회장 운전기사라고 둘러댄 것과 자신의 손에 죽은 사장을 동시에 떠올렸다. 원진이 대답했다.
 
“돌아가셨어요.”
 
“진짜요? 어떻게요?”
 

목이 잘려 죽은 사장을 생각하며 말했다.
 
“부작용자들한테요.”
 
“어이구 저런. 아무리 죽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지만 그건 좀… 원진 씨는 괜찮으세요?”
 
“그 정도는 괜찮은 세상이 됐잖아요.”
 
“그렇죠. 참 험한 세상이죠. 아마 길거리는 엄청 심각하겠죠.”

 
원진은 보원의 말투만으로도 그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잘 알 수 있었다. 원진은 전기울타리를 계속 보수하며 툭 말을 던졌다.
 
“그렇겠죠.”
 
보원은 다른 말을 기대했는지 원진을 바라보며 기다렸지만 원진은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망가졌던 전기울타리가 제 모습을 찾고 나서야 원진의 빠른 손놀림이 멈췄다. 원진이 사다리에서 내려올 때 현관문이 열리며 선경이 나타났다. 언제나 그렇듯 아기를 짐처럼 안고 있었고 화난 얼굴로 보원을 바라보았다.
원진이 그녀를 먼저 봤기에 보원을 향해 턱으로 선경이 있는 곳을 가리켜 주었다. 뒤를 돌아본 보원이 선경에게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선경은 원진을 힐끗 쳐다보고는 보원에게 말했다.
 
“기저귀가 떨어졌어. 물티슈도 없고.”
 
“가방에 없어?”
 
“없어. 다 썼어.”
 
“아, 차에 아마….”
 

선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사 이미지
“다 썼다고!”
 
그녀의 고함소리에 보원은 물론 원진도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선경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 썼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다 썼다고 했잖아, 다 썼다고!”
 
보원은 민망한 듯 원진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다시 선경에게 말했다.
 
“그냥 좋게 얘기하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다 썼다고 말했는데도 오빠가 내 말을 안 믿으니까 그러지!”
 
“알았어, 알았어. 일단 들어가 있어.”
 
원진은 그녀의 짜증스러운 모습을 보며 선경을 죽이게 되면 보원도 죽여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애도 죽여야 하는지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흔들어버렸다.
 
사다리를 챙긴 보원이 머뭇거리다 원진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기저귀를 좀 구해 와야 할 것 같은데요?”
 
“구할 데라도 있어요? 마트에 물건이 있을 리도 없고.”

 
보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기저귀는 넘쳐나요. 부작용자들이 밤새도록 우는 애들이 짜증 나서 전부 집어던져 죽였거든요.”

 
그의 말에 원진은 한동안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보원이 배시시 웃고 나서야 그제야 그가 농담을 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보원이 말했다.
 
“물건이 있어도 계엄군 연줄 있는 사람 아니면 못 사요.”
 
“그럼 어디서 구할 건데요?”

 
보원은 원진에게 몸을 기울이며 대답했다.
 
“암시장이요.”
 
원진은 금시초문이었기에 살짝 놀랐다. 통제받는 경제 구조에서는 당연한 현상이었지만 계엄군 세력이 워낙 막강했기에 암시장은 형성되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암시장이 있어요?”

 
보원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쿠데타 직후에 바로 생겼어요. 암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사재기하느라 경제 붕괴가 앞당겨졌다는 말까지 돌 정도로, 기다렸다는 듯이 생겼어요.”
 
“다른 구에 있으면 못 갈 텐데.”
 
“여기에도 있어요. 각 구마다 하나 이상씩은 있거든요.”
 
“어디 있는지 알아요?”

 
그는 자신의 차로 가더니 서울시 지도를 하나 꺼내와 테라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지도에는 빨간색 점으로 각 구마다 몇 개 씩 표시가 되어 있었다. 보원이 말했다.
 
“은평구에도 세 개 있네요.”
 
원진은 그의 지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런 건 어디서 났어요?”
 
보원은 씩 웃으며 말했다.
 
“공무원들은 지역 정보에 빨라요.”
 
“이 지도가 계엄군 손에 들어가면 줄초상을 치르겠군요.”
 
“그렇지도 않아요. 상시 열리는 것도 아닌 데다….”

 
보원은 지도를 접으며 말을 이었다.
 
“이 지도도 계엄군한테서 산 거니까.”
 
“뭐라고요?”

 
보원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암시장에 풀리는 물건들, 그거 누가 공급할 것 같아요?”
 
원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번 계엄군은 역사상 가장 빨리 타락한 놈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란 듯한 원진의 표정을 보며 보원이 계속 말했다.
 
“평소에는 빼돌리거나 빼앗거나 한 물건들을 장물아비 통해서 유통시켜요. 그러다가 단속 지시라도 내려오면 정보를 흘리죠. 장물아비가 잡히면 자신들도 골치 아파지니까.”
 
“매번 그렇게 돌아가나요?”
 
“계엄군 본부에서 직접 내려오는 경우에 사정이 다르죠. 한 번은 급습을 해서 장물아비를 잡아 거래한 명단을 토해내게 했어요. 군 기강을 잡겠다면 한 스무 명 정도를 총살 시켰어요.”

 
원진은 진심으로 놀랐다. 군인들을 총살시켰다는 것이 전시 상황이라는 것을 체감하게 해주었다. 보원은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
 
“군 기강은 개뿔이나… 유통 재벌들 보호하느라 그러는 거죠. 스폰서니까. 더 큰 도둑놈들이라고나 할까.”
 
잠깐의 대화로 보원과의 어색했던 것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보원도 그렇게 느꼈는지 처음으로 먼저 요청을 했다.
 
“뭐 구매하실 거 없어요? 암시장에 같이 가면 좀 든든할 것 같은데. 거기엔 별의별 놈들이 다 있어서 분위기가 좀 그렇거든요.”
 
집에 여자들만 놔두는 것이 좀 찜찜하긴 했지만 만약 거절하면 다음에 원진이 나갈 때 보원을 끌고 나갈 명분이 없어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구매할 거야 많죠. 늘 부족한데다, 더 부족해졌으니까.”
 
그의 말에 보원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그냥 웃어 보였다. 원진이 말한 뜻을 못 알아들은 것처럼.
기사 이미지

작가 소개
중앙대학교 졸업. IT 회사 입사, 경영기획, 전략기획, 사업제휴 등의 다양한 직무 경험.
1999년 포털사이트에 <왼팔> 연재. 2001년 출간. 이후 소시오패스를 전면에 내세운 액션 스릴러 <Business is business>(2010), <유령 리스트>(2015)로 액션물 출간.
 
2001.08 「왼팔」
2003.03 「왼팔II」
2005.07 「적경」
2008.06 「피해의 방정식」 (한국 스릴러문학단편선)
2010.01 「위험한 오해」 (한국 스릴러문학단편선II)
2010.10 「Business is business」
2013.11 「사이비」 (원작 : 연상호)
2014.03 「조난자들」 (원작 : 노영석)
2015.08 「유령 리스트」
2015.10 「살인의 기원」 2015 부산영화제 북투 필름 피칭작 선정
2016.04 「왼팔 rebuild」
2016.04 「블랙러시안」, 「증오」, 「복수의 미학」 (맨 헌터 태성 시리즈)
2016.05 「십이 죄」
2016.07 「세일즈 플래닛」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