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7인의 작가전] 알 수도 있는 사람 #10. 음험한 달 (2)

기사 이미지
용주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자의 눈물은 많은 사건들을 생성하고 분해하고 해체한다고 믿었다. 여자의 눈물은 삶의 궤도를 수정시키고 왜곡시켜 결국 처음의 의지를 잃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죄송해요. 제가 주책을 떨었네요.”
 
그녀가 견디기 힘든 침묵을 깨고 눈물을 훔쳤다. 용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취재가 모두 끝났으니 당장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피로와 술에 점령당한 몸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꿈처럼 방안을 가득 채운 색깔들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어쩌면 창문을 넘어오는 검은 바다의 습기가 자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이를 묘사한 폴 자클레의 색감이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무화시켜버릴 건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마냥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힘들었다. 용주는 깨끗하게 비워진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난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차를 몰고 달려요.”
 

용주는 잔을 단숨에 비운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만과 만용이 몸에 가득 차 출렁거렸다. 몸이 휘청거렸다. 그 바람에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연처럼 혹은 런던 극장 앞에서 무모한 신사를 만난 꽃 파는 소녀의 운명처럼 서로의 손이 닿았다. 용주는 침묵을 밀어내기 위해 그녀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복잡한 관계로 얽히지 않는다면 그쯤은 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다음이 문제였다. 하지만 길은 정해져있었다. 술기운과 꽃밭처럼 펼쳐져 있는 색의 잔치가 벌어져있는 상, 그리고 낯선 여자는 용주의 몸에 찬 만용을 더욱 끓어오르게 부채질했다. 용주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여자는 반항하지 않았다. 방을 나온 용주는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을 나섰다. 주방 쪽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행보에 관심을 보이는 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문밖 마당은 달빛에 젖어 축축했다. 두 사람이 스쿠프로 다가갈 때 자갈 밟히는 소리가 났다. 장독대에 잠들어있던 수백 개의 장독들이 깨어나 달빛에 반짝거렸다. 밤공기는 적당히 차가웠다. 어디선가 여자들이 한꺼번에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몽월당 뒤란을 덮은 가죽나무의 검은 그늘이 흔들렸다. 용주는 그녀를 스쿠프 조수석에 밀어 넣은 후 잽싸게 운전석에 올라탔다.
 
“술을 많이 드셨는데···.”
 
“이놈의 똥차를 모는 데에는 지장 없습니다. 내키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내리세요.”
 

용주는 시동을 건 후 거칠게 기어를 넣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만지작거렸다. 용주도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꽃밭 같은 상 앞에서 여자가 눈물을 흘릴 것이라는 사실과 용주가 여자의 손을 잡고 휘청거리며 차로 달려가게 될 것이라고는 신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운명, 우연을 빼면 설명할 길이 없었다.
 
용주는 스쿠프의 헤드라이트를 켜 적막한 밤을 뚫었다. 강인하고도 싸늘한 어둠이 드러났다. 스쿠프의 엔진 소리가 밤의 침묵을 몰아냈다. 깊이 잠들어 있던 길가 언덕길의 민들레가 노랗게 피어났다. 바다 쪽으로 내려가며 휘어진 길은 어둠 뒤로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용주의 스쿠프가 출발했다. 용주는 상향등을 켰다. 내리막길을 평지처럼 달려 내려가 국도에 도착했다. 도로에는 가로등도 없고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밤과 길과 스쿠프만 존재했다. 용주는 달렸다. 창문을 열었다. 차갑고 축축한 바닷바람이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바람에는 바다의 비린내가 묻어 있었다. 까맣게 윤이 나는 바다가 굽이진 도로를 돌 때마다 나타났고 바다 한가운데에 달이 떠서 용주의 차와 레이싱을 펼쳤다. 밤에 의지한 길가 소나무들도 따라 달리며 길을 가르쳐주었다.
 
스쿠프는 비명을 지르며 밤을 달렸다. 신선하고 차가운 바람이 폐로 스며들어와 무모한 만용과 술기운을 몰아냈다. 하지만 용주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곁에 여자가 없었어도 기분 좋게 달리고 싶은 밤이었기 때문이었다. 속도계는 150km에서 춤을 추었다. 차는 춤추는 길을 따라 달렸다. 도로는 부드럽고 안락했다. 속도는 빨랐지만 닻을 내리지 못한 배가 부드러운 물결에 밀려 해안가에 닿듯 차는 그렇게 부드럽게 달렸다.
 
처음 긴장해 의자 뒤에 몸을 바짝 붙였던 그녀가 몸을 자유롭게 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복과 버선과 고풍과 도덕으로 포장되어 있던 막을 뚫고 나와 팔을 뻗었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더니 급기야 고개를 내민 후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녀의 환호성에 검은 산들이 놀라고 잔잔하게 출렁거리며 검게 반짝이던 물결도 놀라 출렁거렸다. 용주의 차가 지나간 자리에 여운처럼 차폭등이 남아 있다가 이내 밤으로 채워졌다. 굽이진 도로를 돌 때마다 차가 휘청거렸다. 그때마다 그녀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낮게 흘러나왔다가 이내 환호로 바뀌었다. 차는 상향등이 밝힌 길을 따라 달렸다. 멀리 불빛이 보였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차였다. 용주는 바다 쪽으로 돌출되어 나간 벌판 위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도로에서 5m쯤 벗어난 정류장 같은 곳이었다. 헤드라이트와 상향등을 끄고 시동도 껐다. 까만 밤과 달빛에 젖은 바다와 비린내를 먹은 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들었다. 용주는 그 태초의 것들을 빨아들였다. 여자 역시 가늘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던 술기운이 다시 밀물처럼 밀려왔다.
기사 이미지
“···저는 그래요. 사는 거 복잡하지만 어딘가에 풀어낼 실마리가 있을 거라 믿어요. 사실 나도 못 찾고 있지만.”
 
용주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그녀는 달빛에 젖은 용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던 차가 상향등을 끈 후 지나갔다. 그게 신호였다는 듯 그녀의 손이 용주의 뺨에 가 닿았다. 용주는 까만 수평선에 두었던 눈길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의 눈은 밤에 보아도 축축했다. 그래서 더욱 빛났다. 용주는 자신의 뺨에 머문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용기를 내서 그녀의 손바닥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손바닥에선 처음 느꼈을 때처럼 진한 풀냄새가 났다. 낫이 금방 지나간 자리에서 풍기는 풀냄새처럼. 용주는 그 냄새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킁킁거렸다. 순간 여자의 다른 한 손이 용주의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따뜻한 손이었다. 몇 시간 만에 자신의 모든 걸 얘기해버리고 허탈한 심정에 빠진 여자는 용주에게 어떤 위로를 받고 싶어 했다. 적어도 용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수없이 보아온 풍경들의 패러디일 수도 있겠지만 용주는 운명쯤으로 믿기로 했다.
 
길고 긴 정적이 흘렀다. 여자가 용주의 손을 잡았다. 뜨거웠다. 그녀는 용주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푸른 가슴이 달빛 아래 창백하게 드러났다. 검푸른 포도 알이 용주의 손에 잡혔다. 적당히 크고 손안에 쏙 들어오는 따스함이 용주의 손에 넘쳤다. 그녀의 몸도 풀냄새를 풍겼다. 목이 갈라지는 듯한 갈증이 용주의 목을 태웠다. 용주가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묻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머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욕망과 절제 사이를 빠르게 오가며 펄떡대는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가 진저리 치듯 숨을 내쉬는 바람에 가슴이 크게 올라갔다가 꺼졌다. 용주는 그 가슴속에서 꿈, 안타까움, 후회, 절망 같은 소리를 들었다. 복잡한 감정들을 몰아내기 위해 용주는 여자에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어떤 커다란 희망이나 절망마저도 삼켜주는 속도에 몰입하듯. 거친 숨소리가 차 창 밖으로 흘러나가자 달도 구름 뒤로 숨고 바람도 다른 길로 돌아갔다. 더 이상 물 비린내는 나지 않았고 차 안엔 풀냄새만 가득했다.
 
“···언젠가 전 여기를 떠날 거예요.”
 
문득 용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용미는 사라진 게 아니라 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사막으로 말이다. 괴성을 지르며 사막 위를 달리는 여자, 그 뒤를 먼지 날리며 쫓는 스쿠프. 그런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가도 가도 모래뿐인 사막 위를. 문득, 스쿠프를 몰고 사막 위를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간절했다. 용주는 여자의 품에서 피식 웃었다.
 
“제가 여길 못 떠날 거라고 생각해요?”
 
여자가 용주를 밀어냈다.
 
“댁 때문에 웃은 게 아니라 저 때문에 웃은 겁니다.”
 
여자는 가슴을 여미고 까만 밤에게 눈길을 주었다.
 
“사막에서 랠리를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입에 담아 보는 것도 처음이네요.”
 

용주는 시동을 걸고 천천히 기어를 넣었다. 여자의 눈길이 용주에게로 건너왔다.
 
“당신이 사막에 가고 싶어 하지만 갈 수 없는 것처럼 나도 이 곳을 벗어나 도시로 갈 수 없을까요?”
 
용주는 생각했다. 결국 마지막 선을 넘지 못한 것처럼 여잔 자신의 욕망보다 자신을 키워온 세월과 역사에 더 충실하리라 짐작했다.
 
“어떤 계기가 필요하겠죠.”
 
“오늘처럼 당신을 만나는 일과도 같은 일?”

 
용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계기가 될 수 없어요. 미안하지만 오늘 당신은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감상에 젖었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다른 게 필요하죠. 당신 어머니나 할머니들조차도 떠나지 못한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만들어줄 아주 강력한 뭔가가 필요할 거예요.”
 

용주는 차를 어두운 도로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헤드라이트를 켜자 스쿠프를 덮고 있던 어둠이 놀라 달아났다.
 
“미안해요. 난 그저 취재만 온 건데……. 나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감상에 젖어 나도 모르게 너무 멀리 나간 거 같아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당신 앞에서 울 생각도 없었고 만지고 싶다는 생각도 전혀 없었는데. 그만 나도 모르게. 엄마 장례를 치를 때에도 눈물 흘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정말 무서운 년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여길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부모님을 엄청나게 증오하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오늘 알았어요. 실은 너무 슬퍼서 울지 못했다는 걸.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울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전 사실 댁이 고마웠어요. 내일 일찍 전 절에 가야해요. 아침에 못 뵙더라도 잘 올라가세요. 기사도 잘 써주시고요.”
 

용주는 어둠 속에서 잠깐 빛을 발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는 결국 이 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슬픔이 컸던 만큼 증오도 컸고 그것들만큼 사랑 또한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용주는 꾸불꾸불한 어둠 속으로 스쿠프를 밀어 넣었다.
기사 이미지

작가 소개
· 추계예술대학교 문예 창작학과 졸업
· 상명대 대학원 소설 창작학과 재학 중
· 2012년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제8회 세계문학상 수상

그 외의 작품
·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 ‘불의 기억’
· ‘13월’
· ‘9일의 묘’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