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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19. 내가 몰랐던 것

“김보좌관님 다른 약속 있으신 거 아니죠?”
 
희정이 웃으며 김천수를 향해 마주 걸어왔다.
 
“어이쿠. 어쩝니까? 저는 뒤에 계신 멋진 여신님과 이미 점심약속이 돼 있습니다.”
 
내 앞을 걸어가던 김천수가 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섰다. 김천수의 뒷모습에 가려져 있던 자그만 희정의 모습이 내 앞에 드러났다. 희정은 기다란 베이지 자켓에 블랙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희정은 우뚝 걸음을 멈추곤 얼어붙은 듯 아무 말을 못하고 서 있었다. 여전히 짧은 커트머리를 한 갸름한 야윈 얼굴이었다.
 
“저는 이만.... 한 시간 후에 뵙겠습니다.”
 
김천수는 내게 인사를 꾸벅하고는 박장희 의원실로 들어 가버렸다.
붙박인 듯 서 있던 희정은 억지웃음을 웃으며 종종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입술만 양 옆으로 늘려놓은 채 여전히 표정은 굳어 있었다.
 
“언니. 내가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결국 거짓말이 돼 버렸어요. 언니 어쩌지?”
 
나는 아무 말 없이 희정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계속 거짓말을 해대던 희정을 솔직하도록 만드는 방법은 내 말을 아끼는 방법 밖에 없었다. 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 애쓰다 스스로 먼저 자신을 무너뜨릴 것이었다.
 
“언니. 지금...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요. 오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내가 설명할게요. 언니. 일단 조금만... 잠시만 기다려줘요. 금방 다시 나올게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던 희정은 더 이상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얼렁뚱땅 그 자리를 피해보겠다는 듯 나를 두고 의원실로 몸을 돌렸다.
 
“희정씨.”
 
나는 희정의 팔을 잡았다.
 
“그 거짓말.. 누가 시킨 건지만 말해요.”
 
“.....”
 
희정은 내게 팔이 잡힌 채 우는 지 웃는 지 알 수 없는 이상한 표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희정씨가 개인적인 이유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정직한 사람인 것도 알아.”
 
희정이 정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스스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덧붙인 말이었다.
 
“죄송해요...”
 
“알아. 희정씨 입장이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해. 희정씨 거짓말 배후에 누가 있는지 그것만 말해 줘.”
 
희정은 계속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좀 전과는 달리 조금 진정된 눈빛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복도를 오가는 시선을 의식한 듯 희정은 이리저리 사람들을 살피며 내 눈을 피했다.
 
“잠시 휴게실로 가.”
 
나는 희정의 팔을 놓고 어깨를 감쌌다. 희정이 나를 뿌리치고 당장 다른 곳으로 달아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승강기 우측에 흡연실이 있었다. 흡연하는 사람들에겐 흡연의 공간이었지만 가끔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려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본 기억이 났다. 나는 그곳으로 희정을 데리고 들어갔다. 마침 아무도 없었다.
 
“이제 말 해줘.”
 
희정은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자신이 그걸 밝히는 게 자신에게 득인지 아닌지를 계산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게 거짓말을 한 것 일 텐데 그렇다면 골똘히 생각하지 않아도 나와의 우정을 지키기보단 거부할 수 없는 힘을 따르는 걸 선택할게 뻔 한 일이었다.
 
“바로 경찰서로 가려다가 희정씨 말 들어보려고 먼저 이쪽으로 온 거야.”
 
경찰이라는 말에 희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실이 그랬다. 이제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이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게 뭔가 이상하게 엇갈리고 있었다.
 
보석목걸이 문제도 그렇고, 누군가에게 노출하기 위해 마련 한 듯한 여자의 사진들도 그렇고, 몰래카메라도, 폴더폰도 그랬다. 더구나 오비서관이 에프의 캐리어를 가지고 나와 비밀스럽게 한연수에게 넘긴 것도 뭔가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거기에 희정의 거짓말까지...
 
처음엔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다고 해도 내가 가진 의문이 다 풀리지 않으리란 건 얼마 전 김진수 계장을 만나고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경찰도 모르는 어떤 일이 더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에 오비서관과 희정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 그걸 풀 수 있는 열쇠는 경찰이 아니라 희정이나 희정의 배후가 가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희정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희정씨가 아무 말 하지 않으면 내가 경찰에 가서 많은 말을 해야 해. 희정씨하고 통화한 내용이나 문자 내용, 그리고 김천수 보좌관 편으로 보낸 쪽지...”
 
“언니!”
 
희정이 말을 끊으며 내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경찰에는 제발 언니... 제 입장 생각해서라도...”
 
뭔가를 털어놓을 듯 강하게 언니, 라고 외쳤지만 정작 희정의 목소리에선 이미 힘이 다 빠져 있었다.
 
“그럼 다시 물을 게.”
 
희정은 무슨 말이냐는 듯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짐작하는 사람이 있어.”
 
희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분이 맞니?”
 
희정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아니라고 이야기 해줘.”
 
“ .... ”
 
희정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짐작했던 대로였다. 한연수였다. 한연수 일거란 느낌이 든 후부터 정말 알고 싶었던 건 그녀가 왜?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희정의 태도는 내 의문에 답을 해줄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어쩌면 자신도 명확하게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여기들 계시면 어쩝니까. 의원회관 다 뒤질 뻔 했습니다?”
 
김천수가 구부정하게 키를 낮추곤 휴게실 문을 열었다. 잠시 그러고 서 있는 사이 희정이 얼른 밖으로 뛰어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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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 식당은 처음이시죠?”
 
김천수는 의원회관을 벗어나 국회의사당 건물로 안내했다. 사람들이 붐비는 의원회관에 비해 의사당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의사당 메인 출입구 계단과 복도는 TV에서 자주 봤던 풍경으로 빨강색 양탄자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보통 저희는 여기서 점심을 먹지는 않습니다. 의사당에는 국회의장실 부의장실이 있어서 그 관계자들만 이용하거든요. 외부 손님도 많이 오시기 때문에 저희는 주로 의원회관 식당을 이용해요.”
 
에프 일을 돕는다고 국회를 들락거리긴 했지만 국회의사당 식당은 처음이었다.
의사당 건물 3층 계단에 오르자 바로 식당이 나왔다.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제법 고급스럽게 인테리어가 되어있었고 북쪽으로 난 창문엔 멀리 한강이 내려다 보였다.
 
에프도 가끔은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을까, 저 운동장 너머로 보이는 강물을 내다보았을까...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자신의 삶이 오래 남지 않았다는 걸 조금이라도 느낄 수는 있었을까.
 
지금 자신의 아내가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우리는 내일 내 삶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다만 오늘 뿐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산다는 게 정말 무엇인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메뉴는 전주비빔밥이랑 안심스테이크 중에 고르는 거라 반미주씨 스타일에 맞게 안심스테이크 시켰습니다. 사실 여의도에서 제일 멋진 곳으로 모시고 싶었는데 국감문제도 있고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요. 다음엔 꼭 여의도에서 제일 좋은 곳을 안내하겠습니다.”
 
강에 눈이 팔려있는 동안 김천수는 음식을 주문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는 대단한 일이라도 해 낸 것처럼 호기롭게 껄껄 웃었다.
 
“장현수 의원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김천수와 점심을 먹을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한연수를 만나기 전에 객관적으로 한연수에 대해 알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제 대학 선배님이십니다. 장현수 의원님과 제가 만난 역사는 아주 길죠.”
 
처음 만났을 때 왠지 건들거려 보이던 불량함이 갑자기 내게 정겹게 느껴졌다. 에프의 대학후배라니... 제대로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원님 처음 총선 준비하실 때 제가 다른 의원실 있으면서 좀 많이 도왔었지요. 그리고 지난 대선 때 국민통합위원회 일 하실 때도 제가 뒤에서 도왔구요. 사실 재선 당선되시고 제가 그 방의 보좌관이 될 뻔 했는데... 그런데 그게 참... 의원님 마음대로 안돼서..... 하이고 제가 별별 이야기를 다 합니다.”
 
의원님 마음대로 안돼서... 라는 말의 뉘앙스는 누군가 보좌관 임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내가 그런 걸 묻는 게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그 사이 스테이크가 테이블로 서빙되었다. 메뉴가 비빔밥과 스테이크여서 그리 기대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요리는 훨씬 고급이었다.
 
미디엄 레어로 익힌 분홍색 고기 덩이 위에 얇게 썰어 구운 파인애플과 아스파라거스, 붉은 파프리카가 토핑 돼있어 먹기에 아까울 정도로 색감이 예뻤다.
 
“혹시... 김천수...?”
 
식사를 거의 마쳐가는 중에 누군가 우리 테이블 옆을 지나다 걸음을 멈추었다.
훤칠한 키에 반듯한 수트를 차려입은 호남형의 남자였다.
 
“네? 누구시죠?”
 
포크를 놓고 김천수가 한참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누군지 알아맞혀 보라는 듯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뽀얗고 고운 얼굴이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썬 때문이었다. 썬은 운동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여리게 보이는 외모를 극복하기 위해서 라고 했다. 자신 같은 남자들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근육을 키우거나 체력단련을 통해 남성스러운 몸을 만드느라 피땀을 흘린다고 했다.
 
“아! 너... 아트.. 아트 맞지?”
 
김천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남자는 아트라는 말에 씨익 웃으며 김천수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미주씨. 여긴 제 대학동창 아트라는 친굽니다. 근데.. 별명만 생각나고 이름이 기억이 안나네요. 그리고 여기... 이 미모의 여인은 반미주씨. 오늘 두 번째 뵙는 분인데 점심 같이 먹는데 성공해서 이 자리가 성공의 자리야.”
 
김천수의 소개로 아트라는 남자와 악수를 했다. 여태껏 악수를 나누며 단 한 번도 그 손의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아트라는 남자의 손은 달랐다. 손가락이 가늘고 길구나.. 보기보다 뼈대가 얇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 손을 통해 전해왔다. 정말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반갑습니다. 제가 합석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마주 앉은 그의 맑고 서글서글한 눈빛이 다시 인사를 건넸다.
 
“이 친구 우리 대학에서 4년 내내 탑 자리를 안내놓던 지독한 놈입니다. 펑펑 놀면서도 성적이 좋아서 다들 천재라고 불렀죠. 아주 나쁜 놈입니다.”
 
김천수는 오랜만의 그가 반가웠는지 그를 보며 화들짝 웃음을 물었다.
 
“야, 그런데 너 몇 년 전부터 친구들이 연락 끊겼다고 궁금해 하던데 어디서 귀신같이 나타난 거야? ”
 
그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말갛게 웃었다. 큰 키와 옆으로 벌어진 반듯한 어깨가 아니라면 마치 열 살 쯤 되는 소년의 모습 같았다.
 
“요즘 국회의장실에 있어. 잠깐 일 도우려고 온 거야.”
 
“국회의장실? 역시 잘난 분은 다르시군.”
 
직원이 차를 가져다 놓았다. 그가 찻잔을 들며 말했다.
 
“내가 방해한 건 아닌가요? 아까 뭔가 열심히 이야기 하시던 것 같은데...”
 
그가 내 쪽을 보며 또 다시 말갛게 웃었다. 그 말간 웃음이 내 가슴 어디를 툭툭 건드리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장현수 의원.. 참, 너도 알지? 맞다. 아는 정도가 아니지. 현수형이랑 넌 동아리도 같이 했고 한 때 현수형 집에 같이 지냈었잖아.”
 
“내가 현수 형 신세 많이 지고 살았지.”
 
“형... 그렇게 된 거 알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김천수가 아트와 나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사실... 그날 아침.... 형을 만났었어.”
 
찻잔을 들어 올리던 내 손에서 스륵 힘이 풀렸다.
 
▶ 제8요일의 남자 더 보기
#1. 화요일의 남자, 튜즈
#2. 7분의 1을 넘나드는 남자, 에프

#3. ‘당신의 어둠 속에 나도’
#4. “그날,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것”
#5. 엠, 월요일을 싫어하는 남자
#6. 어떤 고백
#7. 한 잎의 여자
#8. 당신은 어디 있나요?
#9. 그 여자 미주 -내 이름은 튜즈
#10. 이미 시작된 일
#11. 말할 수 없는 비밀
#12. 점점 깊은 곳으로
#13. 기억의 영속
#14. 카메라오브스쿠라
#15. 왜 하필 장현수야?
#16. JEAN이라는 남자.
#17. 미로 속 그물
#18. 이별은 언제나 아프다.

<목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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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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