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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이리 쌓고, 저리 붙이고…한글은 명품 디자인 재료, 우리만 지닌 ‘희토류’죠

우리 속담에 ‘마른땅에 말뚝 박기’가 있다. 말뚝은 젖은 땅에 박아야 쉽게 들어가는 법, 앞뒤를 잘 재지 않고 무턱대고 일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한글 디자이너 이건만(53)씨의 경우가 그렇다. 한글을 패션 아이콘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이른바 한류,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를 뒤흔들기 이전 한글의 상품성에 눈을 떴다. 한글의 자모음을 결합한 다양한 문양(패턴·모노그램)을 고안하고, 이를 넥타이·스카프·가방·지갑·벨트 등에 입힌 패션잡화를 잇따라 내놓았다. “21세기는 디자인의 시대가 될 것이다. 우리 문화의 정수인 한글이 세계에 통할 것”이란 믿음 하나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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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만씨는 청개구리 정신을 내세웠다. 남이 하라는 대로 하면 절대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그의 몸에 회사 포스터 이미지를 겹쳤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제품 브랜드도 ‘이건만’으로 정했다. 자기 이름을 내걸 만큼 파격이었다. “샤넬·구찌 등 세계적 명품도 그렇게 시작했죠.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라고 했다. 자신감 반(半), 무모함 반이다. 그러기를 17년째, 브랜드 ‘이건만’은 문화상품 한글을 알리는 시장의 최전선에 서 있다. 9일 한글날 570주년을 앞두고 서울 방배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마치 탱크 같았다. 민감한 질문에도 거침없이 대답했다.
 
회사 안내책자에 ‘이건만의 디자인은 1443년부터 시작합니다’고 돼 있다. 평소 과장이 좀 심한 편인가.
“1443년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해다. 반포는 3년 뒤에 했다. ‘회사가 얼마나 됐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어중간하게 답변하기가 싫었다. 한글은 그 자체로 디자인적 요소가 강하다. 그 오랜 역사를 보여 주고 싶었다.”
실제론 2000년에 창업했다.
“원래는 아티스트였다. 나무·한지 작업을 많이했다. 홍익대 미대 등에서 가르쳤다. 학생들에게 디자인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강조했는데 이왕이면 내가 해 보자며 제자 둘과 함께 1800만원을 들고 시작했다.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서울 종로구 신교동 우리 집 지하작업실에서 출발했다.”
지난 시간 얼마나 성장했나.
“현재 직원 35명에 연 매출 40억원쯤 된다. 초창기에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아직 많이 크지 못했다. 자본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다. 외부 디자인·브랜드 컨설팅을 해 번 돈을 한글 디자인에 돌리고 있다. 해마나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지금이 1년 전보다 좋으면 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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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형은 그가 고안한 각종 한글 문양.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의 회사는 ‘이건만 AnF(Art and Future)’다. 그가 대표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다. 회사 4층 디자인연구소를 둘러봤다. 젊은 디자이너 8명이 각종 한글 패턴을 놓고 씨름 중이다. 서울대·고려대, 현대건설·경방 등 대학·기업체에서 주문한 넥타이·스카프가 눈에 띈다. 각종 디자인 원안·시제품도 곳곳에 쌓여 있다.

‘한글 패션’ 만든 디자이너 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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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기관 주문이 많나 보다.
“지금까지 대학은 20여 곳, 기업체는 100곳 정도 함께 일했다. 각 기관의 정체성에 맞는 디자인을 해 준다. 대기업에서는 하지 않는 일이다. 의사 결정이 빠른 중소기업이기에 가능하다.”
청와대·국회 의전용품도 납품했다.
“2002년 국립중앙박물관 넥타이가 계기가 됐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삼족오(三足烏)와 전통문양을 모티브로 삼았다. 원래 디자인만 하려 했는데 상품화까지 연결됐다. 전통도 돈이 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이후 한글 모노그램 개발에 적극 나섰다. 2012년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선물도 만들었다.”
주로 공공기관에서 호응이 컸는데.
“꼭 그런 건 아니다. 김치냉장고 외부 디자인, 스마트폰 플립커버 디자인, 서울시 타요버스 한글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한글 디자인의 영역은 넓다. 하기 나름이다. 비행기나 KTX 디자인에도 도전하고 싶다. 한글 무늬가 선명하게 찍힌 비행기가 외국 공항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 국가 홍보 효과가 대단할 것이다. 목표가 커야 행동도 커진다.”
지금까지 몇 종이나 디자인했나.
“얼추 1000종은 될 것 같다. 넥타이가 300여 종으로 가장 많다. 패션은 유행을 타기에 생명이 생각보다 길지 않다. 1000종 가운데 절반이나 살아남았을까. 그래도 매일매일 재미있다. 디자인은 새로움을 빚는 일이다. 완성된 제품엔 쉽게 싫증을 느낀다. 디자이너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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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만씨의 히트상품. 여성용 가방에 전통기와(사진 왼쪽)와 한복 저고리(오른쪽 위)의 곡선을 응용했다. 넥타이에 찍힌 한글 자음과 모음의 결합도 독특하다.

이씨는 디자인을 요리에 빗댔다. “한글은 최고의 요리 재료다. 그 자체로 조형성이 뛰어나다. 한글 액자 등 실패한 작품도 많지만 그건 모두 요리사인 제 잘못 때문이다. 누구를 탓하겠나. 서두르지 않겠다. 논밭을 정성스레 일구는 농부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글을 요리하는 게 쉽진 않겠다.
“한글은 차별성이 분명하다. 이미 완결된 형태로 새것을 만드는 건 머리에 쥐가 나는 일이다. 자칫 군더더기·사족(蛇足)이 될 수 있다. 자음과 모음을 이리 쌓고 저리 붙이며 입체성을 살렸다. 구름·한복·떡살 등 전통요소를 끌어들여 우리만의 색채도 부각했다. 오래 익은 된장으로 맛난 서양 음식을 내놓는 셈이다. 그 때문에 스토리가 중요하다. 한글 디자인은 블록(벽돌)을 쌓거나 건축물을 짓거나 음양의 조화를 맞추는 일이라고 본다. 우리만이 가진 희토류(희귀 광물)다.”
처음부터 자신 있었나.
“지금 돌아보니 무식하니까 용감했다. 넥타이 몇 개를 들고 무작정 백화점을 찾아갔고, 면세점도 두드렸다. 2008년 국내 브랜드로는 처음으로 일본 도쿄 백화점에도 진출했다. 수업료도 상당히 치렀다. 지금은 국내 백화점 12개 매장에서 모두 철수했다. 일본 사업도 정리했다. 현재 신세계·롯데 등 면세점 4곳과 인사동 직영점, 온라인몰에 집중하고 있다.”
무리하게 사업을 벌인 것 아닌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게 사업이다. 마케팅 감각이 부족했다. 수지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원래 공부와 전시에만 신경 쓰고 살지 않았나. 요즘 백화점에선 쌈지·가파치 등 중소기업 브랜드가 거의 다 사라졌다. 대기업 아니면 수입 브랜드만 남아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앙드레 김의 경우에도 그가 타계하면서 브랜드 파워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일본처럼 명품 브랜드 시대를 열어야 하는데 말이다. 정부의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
해외 진출은 포기한 셈인가.
“아니다. 일본은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들어갔다.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개점 당시 재일동포 한 분이 우리 가방과 스카프를 들고 오셔서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구나’라고 확신했다. 중국 진출계획을 세워 놓았다. 세계 주요 도시에 매장을 여는 게 최종 목표다. 시간과의 싸움이다. 일단 손을 담갔으니 끝장을 보겠다.”
민간 문화사절단을 연상시킨다.
“예전에 삼성 부사장 한 분이 찾아온 적이 있다. 유럽 시장을 공략하면서 우리 넥타이를 선물했다고 한다. 한국문화 전반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비즈니스 물꼬를 트게 됐다며 즐거워했다. 한글 전문가는 아니지만 세종대왕께 감사드린다. 백성을 긍휼히 여긴 세종의 애민정신 덕분에 한글 디자인도 탄생할 수 있었다고 본다.”
원래 디자인 지망생이 아니었는데.
“고교 성적이 거의 전교 꼴찌였다. 놀 만큼 놀았다. 고3 막판에 정신을 차리고 공부해 홍익대 섬유미술과에 들어갔다. 미국 디자인 명문 크랜브룩 미술아카데미도 졸업했다. 외국에 나가니 알게 됐다. 한국의 경쟁력은 전통문화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한글은 그 정점이다. 요즘 의상·생활용품 등에 한글 디자인이 유행이다. 일종의 장르가 됐다. 우리를 모방한 ‘카피 상품’도 많지만 개의치 않는다. 서로 경쟁해야 좋은 제품이 나오지 않겠는가. 내가 더 궁리해 더 예쁘고 아름다운 걸 만들면 된다.”
 
[S BOX] 첨성대 닮은 가방이 실패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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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없는 성공은 없다. 누구나 실패를 거울 삼아 새로운 내일을 찾는다. 이건만 대표는 경주 첨성대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리다. 신라의 빼어난 문화를 가방 디자인에 접목하겠다는 야심은 컸지만 결과는 처참하기만 했다. “20개 정도 제작했는데 5개나 팔았을까요.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했죠. 나중엔 선물로 주겠다고까지 했는데 가져가겠다는 사람도 없었어요. 제 인생 최악의 실패작이죠.”

그가 제품 보관소에서 ‘첨성대 가방’을 들고 나왔다. 말 그대로 첨성대를 닮았다. 아래가 불룩하고 중간 부분이 잘록하다. 가방 끝에는 줄 3개를 달아 어깨에 메거나 손으로 들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가방을 들 여심(女心)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군사용 배낭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또 가방 입구가 좁아 이런저런 소품을 넣기에 불편했다.

“2002년께 디자인했을 겁니다. 사업 초창기였죠. 그 직전에 다보탑·석가탑 문양을 넣은 넥타이를 만든 적이 있는데 나름 반응이 괜찮았거든요. 조선시대 이전 우리 문화의 뿌리를 더듬어 보자는 뜻에서 첨성대에 주목했는데 마음만 앞선 모양입니다.”

이 대표는 실패의 원인을 ‘아티스트 마인드’에서 찾았다. 고객의 기호, 물건의 유용성을 세심하게 따지지 않고 오직 예술가의 욕심을 내세운 꼴이 됐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독특한 형태가 되레 부담이 됐다는 설명이다. “직원들이 보기 싫다고 버리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럴 수 있나요. 이것도 자산인데요. 두고두고 참고할 작품으로 남겨 둬야죠.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게 없잖아요.”

글=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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