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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을 적신 책 한 권] 완벽한 영어 소설로 성공한 작가…낯선 이탈리아어로 ‘망명’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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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마음산책
168쪽, 1만2000원

한때 열심히 외국어를 배운 적이 있다. 왜 하필 그 언어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나에게 간절했던 것은 새로운 언어였다. 내가 쓰는 모국어가 여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검은 글자들로 빽빽한 낡은 수첩 속의 그것 같다고 느껴질 때였다. 감사합니다, 맛있습니다. 그 기본적인 말들을 이국의 언어로 더듬더듬 외우고 적으면서 나는 어디로 도망치고 싶었던가.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줌파 라히리의 첫 에세이집이다. 줌파 라히리가 런던의 인도 이민자 출신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축복 받은 집』 『그저 좋은 사람』 등 좋은 작품을 여럿 써와 전 세계를 비롯해 우리나라에도 충실한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영어권에서 태어나 자라 교육받은 그는 당연히 완벽한 영어로 소설을 쓴다. 그런데 이 산문집은 이탈리아어로 쓰였다(심지어 이탈리아어로 쓴 짧은 소설까지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탈리아어를 더 잘(!) 배우기 위해 가족과 함께 로마로 이주해 살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대체 이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모국어가 부모의 언어라는 의미라면 작가의 모국어는 벵골어이지만, 그는 벵골어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또한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언어인 영어는 그에게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다. 작가는 늘 미묘하게 언어에서 추방되거나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음을 털어놓는다. 그런 그에게 제3의 언어인 이탈리아어가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다.

어떤 실용적 이유도 없지만 작가는 무모하고 용감하게 자발적인 추방, 자발적인 망명을 감행했다. 이 책의 제목인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의 ‘작은 책’은 이탈리아어 사전을 뜻한다. 줌파 라히리는 1994년 처음 피렌체에 가면서 손바닥보다 작은 포켓형 사전을 하나 샀다. 그리고 모자를 잃어버렸을 때, 그 사전을 펼치고 단어를 찾은 끝에 모자를 되찾았던 일화에 대해 말한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다는 경험이 그를 그곳에 되돌아가게 했던 건지도 모른다.

영어로 쓴 소설로 큰 찬사와 명예를 얻은 작가에게 그 언어를 포기한다는 것은 평범한 의미가 아니다. 작가는 ‘내가 믿는 권위를 포기한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는 구속받고 제한받는데도 왜 더 자유롭다고 느끼는 걸까? 아마 이탈리아어에서는 불완전할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리라.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 나는 하늘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면서 그는 ‘더 강력한 고독, 다른 차원의 고독’과 맞대결하고 있다. 나는 그의 신작을 기다리는 독자로서, 그가 다시 영어로 돌아가 멋진 소설을 써주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이탈리아어로도 어서 ‘원하는 그 세계’에 가 닿기를 소망한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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