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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성공학이라는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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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석
문학평론가

출세만 성공이라면 인간 대부분 실패가 예정된 운명
다중은 패배자가 아니라 다양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

단국대 교수·영문학

언제부터인가 ‘성공’이라는 가치가 우리 사회를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이 성공에 더 매달리는 현상은 성공이 점점 더 ‘희박한’ 가치가 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성공이 가장 어려워진 시대에 성공할 확률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성공의 성취에 올인하고 있는 모습은 그 대열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도 불행한 그림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할 때까지 오로지 상위 1%에 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이 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들의 머릿속에 꽉 차 있다. 서울시내 모 명문(?) 초등학교의 교가에 들어 있는 “공부 잘해 성적도 제일 높이 올리리라”라는 가사는 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들의 소망을 그대로 요약한다.

그러나 만일 성공이라는 게 상위 1~5% 안에 드는 것을 가리킨다면 이들 중 95~99%는 불행하게도 실패가 운명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추락의 숙명을 알면서도 계속 앞으로만 나가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조직의 쓴맛’을 다 본 후에야 성공의 미망에서 벗어난다. 사실은 벗어나는 게 아니라 포기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겪는 이 ‘패배의 서사(敍事)’는 고통·열등감·자책과 자기 비하로 내면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학’이란 제목의 강연과 강의들이 심지어 대학에서조차 호황을 이루는 것은 우리 사회가 나쁜 의미의 ‘성공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다는 증거다. 문제는 ‘성공학’이란 정체불명의 담론이 말하는 ‘성공’이 넓은 의미의 ‘훌륭한 삶’이 아니라 대부분 ‘출세’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다수의 사람이 출세하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출세하는 사람은 항상 소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학 담론이 수많은 대중을 ‘성공’의 이름으로 유혹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속임수(!)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종교단체에서도 청소년들에게 성공(?)해 사회적 ‘리더’가 될 것을 부추긴다. 그러나 맙소사, 리더는 항상 극소수다. 성공의 미망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이 (확률적인 의미에서) 출세하지 못한다.

성공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출세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출세만을 유일하고도 훌륭한 가치로 치부한다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인생은 무의미하다. 이 말은 성공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의 압도적 다수의 삶을 암암리에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성공 이데올로기는 ‘훌륭한 삶’의 척도를 출세로 제한함으로써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삶의 다양한 가치를 배제한다. 이 배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의 포괄성을 묵살함으로써 ‘사회적’ 헌신·환대·사랑보다 경쟁에서의 ‘사적인’ 승리를 훨씬 더 숭고한 가치로 몰고 간다. 이것은 공공의 문제를 파편화하고 개별화한다.

이리하여 또 다른 문제가 생산되는데, 그것은 바로 성공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치한다는 것이다. 만일 다중(多衆)의 삶이 불행하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그러나 성공 이데올로기는 사회 혹은 공공 단위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한다. 그것은 자신의 경전(經典)인 성공학 교재들과 자기계발서를 들이밀며 (한마디로 말해) ‘당신’의 불행은 당신의 게으름 때문이고, 당신이 남보다 더 열심히 살지 않아서라고 말할 것이다. 성공 이데올로기는 이렇듯 교묘하게 시스템의 문제를 감춘다.

성공학이라는 괴물은 경쟁을 최우선의 가치로 간주하는 전지구적 신자유주의의 적자(嫡子)이면서 다중에 대한 사회적 안전장치가 희박한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다. 간단히 말해 패배자는 입 다물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중은 패배자가 아니며 더욱이 소수의 출세자들을 위한 존재가 아니다. 다중은 무수하게 다양한 훌륭한 가치들의 담지자들이다.

이 소중한 다수에게 성공학이라는 괴물이 입을 벌리고 있다. 그 심연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이 괴물을 닮아간다.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소중한 가치들을 망각하고 괴물 앞에서 열등감과 자괴감에 시달린다. 누가 이들을 구할 것인가.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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