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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김영란법’ 위에 ‘낙하산 방지법’ 둬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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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철
논설위원

# 함께 저녁을 먹던 지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밖에 나가 통화를 하고 온 얼굴에 웃음꽃이 환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집안 어른이 공공기관 사장에 내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언뜻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그 기관의 사장은 며칠 전 물러났다. 새 사장 공모는 시작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내정이라니. 하지만 한 달쯤 뒤 그 ‘집안 어른’은 실제로 사장이 됐다. 알고 보니 그 어떤 줄보다 세다는 대선캠프 출신이었다.

연고에 바탕을 둔 엘리트 카르텔이 부패의 핵심
그 연결고리 끊으려면 낙하산 반드시 근절해야


# 2년 전 낙하산으로 내려온 공기업 사장님의 별명은 ‘인턴’이다. 신입사원도 신경 쓰지 않을 자잘한 내용을 유별나게 챙겨서다. 보고서 내용보다 오·탈자를 따지고 신문 대금 같은 비품을 낭비한다고 호통을 자주 친다. 정작 회사 일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얼마 전 이 회사 사외이사 두 명이 바뀌었다. 그나마 업무를 아는 관료들 자리를 경력도, 전문성도 없는 ‘정피아’들이 차지했다. 그래도 낙하산 사장은 줄곧 침묵했다. 그가 회사를 위해 새로 찾아낸 먹거리도 거의 없다. “일할 마음이 나겠느냐”고 직원들은 푸념한다.

다시 낙하산 인사 시즌이다. 연봉이 후한 금융권 열네 자리를 포함해 연말까지 70여 개 공공기관 사장 자리가 빈다. 사외이사와 감사를 합치면 수백 명이다. 정권 초 선봉대에 끼지 못했던 후발대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일부는 이미 성공적으로 착지했다.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된 정찬우 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한국증권금융 감사위원이 된 조인근 전 연설기록비서관 등이다. 현기환 전 정무수석이 기업은행장에 내정됐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정치인보다 낙하산을 강하게 비판했던 정치인이다. 대통령이 되면 낙하산을 근절하겠다는 약속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오히려 낙하산의 양은 많아지고 질은 떨어졌다는 비판이 봇물을 이룬다. 순수 민간회사인 KB금융까지 후보지로 거론되는 걸 보면 반박하기 어렵다.

낙하산의 폐해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다. 효율을 떨어뜨리고 국민 혈세를 낭비한다. 공공부문에 대한 국민적 신뢰 하락은 계산할 수 없는 비용이다. 낙하산 사장이 공공성에 관심을 갖긴 쉽지 않다. 임명권자나 후원세력의 평판을 우선시하게 마련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4대 강 사업’이나 ‘해외 자원개발’에 열 올렸던 이명박 정부 때의 공기업들이 이를 방증한다.

무엇보다 시대적 요구와 흐름에 역행한다. 지난달 28일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이 시행됐다. 이 법을 처음 제안한 김영란 전 대법관이 한 강연에서 설명한 취지는 이렇다. 미국 콜게이트대의 정치학자 마이클 존스턴은 부패를 네 가지로 구분했다. 1단계는 ‘독재형 부패’다. 권력을 쥐면 명예와 돈이 절로 따라온다. 중국·인도네시아 등 정치 후진국에서 주로 나타난다. 2단계는 ‘올리가르히(족벌)형 부패’다. 몇몇 가문이 특권과 부패를 대물림한다. 러시아·필리핀이 대표적이다. 4단계인 ‘시장 로비형 부패’는 미국·영국·캐나다·일본 같은 선진국형 부패다. 자신의 권한과 사적 이득을 맞바꾸는 개인 비리다. 한국은 3단계인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 국가로 분류된다. 학연과 지연으로 묶인 엘리트들이 서로 밀고 끌어주며 그들만의 공동이익을 추구한다.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의 중진국형 부패다. 선진국으로 거듭나려면 이런 엘리트 카르텔을 끊어내야 한다는 게 김 전 대법관의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낙하산이야말로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 중 가장 악성이다. 태생부터 밥값이나 선물·경조사비와 비교할 수 없는 대가성을 전제하고 있다. 정치·관료·직능별로 결성된 온갖 ‘마피아’들이 결속하는 핵심 고리이기도 하다. 엘리트 카르텔을 해체하려면 낙하산 근절이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이다.

박 대통령은 김영란법에 대해 “선진국으로 가는 초석”이라고 평했다. 400만 명 이상이 불편을 겪지만 감수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진심으로 동의하지만 한 가지 모범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낙하산 인사를 최소화하고 불량 낙하산을 근절해 달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투명성을 높이자는 김영란법의 취지에 그런 결단이 화룡점정이 될 것이다.

나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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