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훈범
논설위원
밥값 3만원 넘느냐 아니냐보다
이너서클 내부거래 막는 게 중요
서민들 등골 휘는 경조사비 줄여
나쁜 관습의 고리 끊으면 어떨까
당시 보수적 분위기 속에서 자주 진보적인 소수 의견을 개진해 ‘위대한 반대 의견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는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전통적 자연법 사상을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거기엔 재미난 일화가 있다. 노예제도를 혐오했던 홈스는 북군 장교로 남북전쟁에 참전해 세 번이나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평생의 교훈을 하나 얻었다. 1850년대엔 북부 사람들에게조차 체제전복적으로 보였던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전쟁이 끝나고 보니 모두 애국자들이 돼 있더란 것이다. 거기서 얻은 결론이 이거였다. “영원히 지켜야 할 유일한 삶의 방식은 없다.”
홈스에게 법이란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 판단 기준이 아니라 시대 요구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그릇되지 않았더라도 법제도가 다수 이익을 외면하고 소수 특권을 옹호하고 있다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헌적 요소가 다분한 ‘김영란법’이지만 홈스는 찬성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도 다른 이유에서가 아닐 터다. 이 사회의 부패가 건전한 시민이 용인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기에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필요하다는 판단 말이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먹는 데 야심도 없고 입맛도 ‘험블’해 3만원 미만의 식사가 문제될 게 없다. 게다가 누가 전세기 태워서 여행 보내줄 만큼 힘 있는 언론인이 아닌지라 전부터 산해진미를 대접받을 기회도 많지 않았으니 김영란법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프랑스와의 인연으로 공연히 입맛을 들인 와인이 좀 그렇긴 한데, 각자 와인을 들고 와 조금씩 맛보는 모임이 몇 개 있는 데다 다행히 요즘 합리적인 가격의 맛있는 와인들이 제법 있어서 크게 부담되지 않는다.
사실 대다수의 법 적용 대상자들이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걱정되는 것은 법이 그런 사람들의 합리적인 관계까지 위축시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저녁 자리에서 반주만 몇 잔 해도 3만원은 훌쩍 넘는 현실이 사람들의 몸을 사리게 만든다면 그런 자리에서도 이뤄질 수 있던 건전하고 합법적인 ‘거래’까지 모두 학연이나 지연을 좇아 그늘로 파고들지 않겠나 싶어 하는 말이다. 특히 시장의 신규 진입자들을 원천 봉쇄해 기득권층만 더욱 공고화하는 역효과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영란법을 반기는 업자들이 축배를 들고 있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들린다.

[일러스트=김회룡]
김영란법의 진짜 아쉬운 점은 따로 있다. 공무원행동강령에도 5만원이던 경조사비 한도액을 10만원으로 올린 것이다. 축의·부의금 같은 경조사비는 농경사회의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본래의 상부상조 정신을 잃은 지 오래다. 그저 ‘뿌린 만큼 거두는 보험’이 됐다. 액수도 매년 올라 서민경제에 ‘등골 브레이커’가 되고 있다. 2000년 월평균 12만원이던 게 지난해 21만원으로 80% 이상 늘었다. 줄일 수 있는 지출항목에서도 후순위(9개 항목 중 7위)로 사실상 고정비용이 된 게 현실이다.
게다가 갑을관계에서는 ‘접대문화’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고위층 경조사에도 부조 수입이 억대를 넘는 일이 예사다. 못 가진 자가 가진 자에게 보태주는 ‘불공평한 보험’인 셈이다. 경조사비 한도는 더욱 줄였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지나친 관습의 고리를 끊어야 했다. 그런데 반대로 경조사비의 하한선을 10만원으로 올려버린 셈이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3·5·10(식사·선물·부조 한도액)을 차라리 10·5·3으로 하는 게 나을 뻔했다. 식사는 경제라도 돌아가게 한다지만 부조는 고스란히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 아니냔 말이다. 그게 무리라면 아예 3·3·3으로 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자. 홈스 판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수 의견으로 낼 게 어떤 것일지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