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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31 - 예수는 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었나

성경을 읽다 보면 막다른 골목을 만난다. 주위를 둘러봐도 우회로가 없다. 그래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다. 성경책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뜻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저런 책에서 성경을 해석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람이 나름의 뜻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런데 “아하!”하는 탄성이 내 안에서 터지질 않는다. 그저 “대충 그런 뜻이겠지”하고 어물쩍 뭉개고 넘어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우연찮게 그 구절과 다시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럼 어김없이 막다른 골목이 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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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의 수태고지 교회. 인간의 육신을 갖고 태어난 예수는 나사렛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 자랐다. 수태고지 교회에서 예수의 유년기에 대한 조각과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마태복음에도 그런 ‘막다른 골목’이 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마태복음 10장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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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 교회 안에 있는 조각상. 요셉이 어린 예수의 목을 끌어안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뒤에서 마리아가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예수의 메시지가 상식에 반(反)하기 때문이다. “부모를 존경하고, 형제와 우애를 나누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 그건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인류의 상식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히려 ‘아들이 아버지와 원수가 된다’고 했다. 그걸 위해 이 땅에 왔다고 했다. 부자지간을, 모녀지간을 그렇게 갈라서게 만들려고 왔단다. 그 말대로라면 예수는 ‘싸움의 화신’이나 ‘전쟁의 화신’쯤 되어야 한다. 그래야 앞뒤가 맞지 않나.” 이런 의문이 끝도 없이 올라온다.

그래서 묻는다.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다니는 성당에 가서 누군가를 잡고 묻는다. “이게 왜 이렇죠? 무슨 뜻이죠? 제게 이해가 가게끔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주세요.” 종종 이런 답이 돌아온다. “그냥 믿어야 돼. 예수님 말씀은 그냥 믿는 거야. 거기에 의문을 던지고, 자꾸만 물음표를 달지마. 그건 네 믿음이 약해서 그런 거야. 인간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물음을 초월해 계신 분이 예수님이야. 그러니 인간의 눈으로 자꾸만 그분을 해석하려고 하지 마. 어차피 우리는 그분을 풀 수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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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트 반 혼토르스트(1592~1656) 작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 밤에 목수일을 하는 요셉을 위해 예수가 촛불을 들고 있다.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은 위축된다. “종교는 논리가 아니다” “종교는 과학이 아니다”라는 말 앞에 쪼그라들고 만다. 내 안에서 올라온 물음의 싹은 고개를 숙인 채 다시 땅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뿐만 아니다. 그렇게 물어봤던 자신에 대해 묘한 ‘죄의식’마저 든다. 그래서 다시는 묻지 않는다. 어차피 똑같은 답이 돌아올 테니까. 결국 우리의 종교는 ‘묻지마, 종교’가 되고 만다.

가령 말로만 듣던 ‘인절미’란 떡이 있다고 하자. 내 안에서 “인절미는 맛있을까?”라는 물음이 올라온다. 그럼 이 물음은 언제 풀릴까? ‘인절미는 맛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통해서 풀릴까. 아니다. 내가 직접 인절미를 먹어 봐야 한다. 그래서 “인절미가 정말 쫀득하고 맛있구나!”하고 온몸으로 알아야 한다. 그럴 때 물음이 풀린다. 물음이 풀리면 믿음이 생긴다. 그게 깊은 믿음이다. 그런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내가 보고, 내가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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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스페인 바로크 회화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1655년 작 ‘강아지와 함께 있는 성가족’.

예수의 메시지도 그렇다. 물음이 풀려야 한다. 그래야 메시지도 풀린다. 그럴 때 성경은 길이 된다. 예수를 만나는 통로가 된다. 그러니 물음을 멈추어선 안 된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물음을 끝없이 좇아야 한다. 그래야만 예수의 메시지를 뚫을 수 있다. 성경 속 예수의 메시지가 뚫릴 때 나 자신도 뚫린다. 그렇게 ‘나’를 뚫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만난다.

문제와 답은 둘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를 외면하면 어떻게 될까. 그건 자동차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데, 경부고속도로를 외면한 채 가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물음은 일종의 고속도로다. 정확하고 빠른 길이다. 그 길을 궁리하며 따라가야 한다. 그래야 부산에 닿게 된다. 답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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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 교회에 있는 조각상. 아기 예수가 마리아의 품에서 나와 요셉을 향해 걷고 있다.

난수표처럼 생긴 마태복음의 이 구절도 마찬가지다. 풀려면 물음을 던져야 한다. “예수는 분명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했다. 그런데 왜 마태복음 10장34절에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했을까. 예수가 말한 평화는 무엇이고, 예수가 말한 칼은 대체 뭘까.” 이렇게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이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일이 뭘까.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물음을 파고드는 일이다. 우리는 그걸 수도(修道)라고 부른다. 이런 일은 수도원 수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길이다.

예수는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복음 10장34절) 첫 구절부터 당혹스럽다. ‘예수=평화’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예수 자신은 ‘예수≠평화’라고 말한다. 오히려 ‘예수=칼’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첫물음이 올라온다. ‘예수가 말한 평화란 대체 뭘까? 그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화와 다르다. ’나의 눈‘에는 지켜야 할 평화로 보이지만, ’예수의 눈‘에는 부수어야 할 평화로 보이는 것. 그게 대체 뭘까.’ 이런 물음을 따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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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작 ‘나사렛 집에 있는 성 모자’. 수르바란 작품은 강한 명암의 대비가 특색이다.

그런데 물음만 따라간다고 바로 답이 나오진 않는다. 내 안으로 던진 물음을 ‘궁리(窮理)’해야 한다. 닭이 알을 품듯이 말이다. “이게 도대체 뭘까?”하고 곰~곰~이 사유해야 한다. 그런 사유를 통해 물음의 두레박은 더 깊이 내려간다. 예수는 이어서 말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마태복음 10장35절)

이제 좀 더 명확해진다. 예수가 칼을 내려치는 곳은 나와 아버지 사이다. 딸과 어머니 사이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다. 그 사이로 예수는 칼을 내려친다. 왜 그럴까. ‘예수의 눈’에는 둘이 따로따로 떨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 물음이 좀 더 깊어진다. “나와 아버지 사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아버지는 ‘나의 뿌리’니까.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왔고, 아버지로 인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니까. 딸과 어머니 사이도 마찬가지다. 이미 가족이 된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도 그렇다. 부모는 내가 태어난 고향이자 근원이다. 그게 우리의 상식이다. 예수는 그런 상식을 향해 칼을 내려쳤다. 왜 그랬을까. 예수는 왜 둘이 떨어져야 한다고 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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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 교회의 바깥 회랑에 걸려 있는 성모자 그림. 스페인에서 보낸 작품이라 스페인풍이 녹아 있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칼’은 ‘마카이라(machaira)’이다. ‘칼(sword)’ 혹은 ‘싸움(fight)’을 뜻한다. 예수는 그걸 주려고 했다. 그게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라고 했다. 나의 눈과 예수의 눈. 둘이 보는 세상은 다르다. 우리에게 부모는 나의 근원이다. 부모로 인해 내가 태어났다. 내게 육신을 주고, 생명을 주었다. 그래서 부자지간(父子之間)은 끈적하다. 모녀지간(母女之間)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를 칼로 자를 수가 없다. 그런 ‘불가침의 영역’을 향해 예수는 칼을 내려쳤다. 왜 그랬을까.

우리의 평화가 ‘진짜 평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뿌리가 ‘진짜 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 나무에는 잎새가 달려 있다. 그 잎새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우리는 답한다. ”나뭇가지에서 왔다.“ 그래서 잎새의 아버지는 나뭇가지다. 가지가 없으면 잎새가 나올 수 없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본다. 그게 우리의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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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작 ‘천사가 있는 성가족’. 요셉이 목공일을 하고 있고, 마리아는 요람에서 잠을 자는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천사들이 이들을 지키고 있다.

예수의 눈은 다르다. 잎새의 근원은 나뭇가지가 아니다. 더 깊은 바닥이 있다. 그래서 예수는 칼을 내려친다. ‘잎새의 착각’을 향해 칼을 내려친다. 그걸 위해 서로가 싸우게 한다. 왜 그럴까. 자신의 ‘진짜 근원’을 찾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딸이 어머니와/며느리가 시어머니와/갈라서게 하려고 왔다/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복음 10장35~36절)

잎새가 나뭇가지만 알면 시야가 막힌다. 나뭇가지도 마찬가지다. 잎새만 알면 눈이 좁아진다. 결국 둘은 뿌리를 보지 못한다. 자신의 진짜 근원을 모른다. 그게 잎새의 평화, 가지의 평화다. 예수의 눈으로 보면 ‘가짜 평화’다. 그건 착각의 눈으로 바라본 ‘착각의 평화’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순간의 평화’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그렇게 예수는 가짜 평화를 부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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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 교회에 걸려 있는 성모자상. 한국에서 보낸 그림이라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한복을 입고 있다.

당나라 때 임제(臨濟, ?~867)라는 선사가 있었다. ‘임제의 할(喝)’로 유명한 그는 선(禪)불교 임제종의 시조다. 그의 가르침을 담은 『임제록(臨濟錄)』에는 그 유명한 ‘殺佛殺祖(살불살조)’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수행자들이여! 법의 이치를 얻고자 한다면 사람에게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안을 향하든, 밖을 향하든 만나는 대로 바로 죽여라. 부처(佛)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羅漢)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권속을 만나면 친척권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물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될 것이다.“

불경스럽기 짝이 없다. 그리스도교식으로 풀면 ”사도를 만나면 사도를 죽이고,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하느님을 만나면 하느님을 죽여라“는 뜻이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선사가 어떻게 이런 ‘막가파’식 발언을 했을까.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逢佛殺佛),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逢祖殺祖)’는 메시지를 깨달음의 문을 여는 열쇠로 본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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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 바깥에서 들어온 빛이 바닥에 깔리는 광경이 무척 아름답다.

임제 선사는 진짜 부처를 죽이고, 진짜 조사를 죽이고, 진짜 부모를 죽이라고 한 게 아니다. 내 마음이 틀어쥐고 있는 ‘집착’을 죽이라고 했다. 그 집착이 만들어낸 관념의 상(相)을 죽이라고 했다. 부처에 대한 집착, 조사에 대한 집착, 부모에 대한 집착을 죽이라고 했다. 왜일까. 집착으로 인해 진짜 부처, 진짜 조사, 진짜 부모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임제 선사는 모조리 죽이라고 했다. 나의 안에 있는 집착이든, 나의 밖에 있는 집착이든 말이다. 대상을 가리지 말고 모두 죽이라고 했다. 예수도 그랬다. 칼을 내려치라고 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갈라서라고 했다. 원수가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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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성 요셉 교회의 제단 위에 걸린 십자가와 성 가족 그림.

마태복음에서 곧장 이어지는 문장은 ‘칼의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수는 말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복음 10장37절)

왜 합당하지 않을까. 우리가 진리보다 무언가를 더 사랑할 때, 거기에는 어김없이 집착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사이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에는 사랑만 있는 게 아니다. 뒷면에는 어김없이 집착의 접착제가 끈끈하게 묻어 있다. 그래서 예수는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 왜 그럴까. 예수의 속성에는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떼어내야 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할 때도, 아들이나 딸을 사랑할 때도 집착을 떼어내야 한다.

사람들은 반박한다. 어떻게 집착 없이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큰 사랑에는 집착이 없다. 작은 사랑에는 집착이 있다. 예수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게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라고 했다. 그래서 칼을 내려치라고 했다. 집착하는 사랑은 작은 사랑이다. 집착하는 평화는 작은 평화다. 결국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합당할 수가 없다. 예수의 평화는 큰 평화, 영원한 평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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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 교회의 내부.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았다는 장소 앞에서 순례객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예수의 평화는 어디에서 나올까. 신의 속성에서 나온다. 그러니 우리가 신의 속성으로 녹아들 때 예수와 맞아 떨어진다. 그게 ‘합당(合當)’이다. 그리스어 성경에는 ‘악시오스(axios)’로 표현돼 있다. ‘만나다(meet)’는 뜻이다. 무엇과 무엇이 만나는 걸까. 나의 속성과 신의 속성이 만나는 거다. 그걸 위해 예수는 칼을 내려치라고 했다. ‘내 안의 집착’을 떼라고 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묻어있는 가장 끈적끈적한 접착제를 자르라고 했다. 예수의 속성, 신의 속성에는 집착이 없으니까. 그래야 둘이 만난다. 그게 ‘합당(合當)’이다.

노자의 『도덕경』도 이에 대해 말한다. 집착을 내려친 뒤에 생겨나는 ‘더 큰 평화’를 노자는 빈 공간에 비유했다.

‘서른 개의 수레바퀴살이/하나의 바퀴통에 모인다/바퀴통이 비어 있기에/수레로 쓰인다
진흙을 빚어 그릇을 굽는다/그릇이 비어 있기에/그릇으로 쓸 수 있다
문과 창을 만들어 방을 들인다/방이 비어 있기에/방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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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쑤성에 있는 노자 동상.

그래서 노자는 비어 있기에 더 크다고 말한다. 예수의 평화도 마찬가지다.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사이의 집착을 끓을 때 ‘더 큰 평화’가 드러난다. 그래서 예수는 칼을 건넸다. 그건 싸움을 위한 칼이 아니라 ‘더 큰 평화’를 위한 칼이다. ‘더 큰 사랑’을 위한 칼이다. 우주를 다 채우는 무한한 사랑. 거기로 녹아드는 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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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우리에게 칼을 건넨다. 집착의 사랑을 끊고 우주적 사랑으로 녹아들라고 말이다.

<32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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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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