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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16. JEAN이라는 남자.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는 에프의 폴더폰엔 눈에 익은 프랑스번호가 불을 반짝이고 있었다.
 
“여보세요?”
 
프랑스에서 걸려온 전화라 현지인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말이 건너가자 유창한 한국말이 바로 날아들었다.
 
“장현수씨 핸드폰 맞나요?”
 
한국어 발음이 또렷한 여자목소리였다.
 
“맞습니다. 그런데 장현수씨는 지금...”
 
“알고 있습니다. 실례지만 지금 전화 받으시는 분은 누구신가요? 성함을 알고 싶어요.”
 
30대 중후 반 쯤의 단정하면서도 사무적인 목소리의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내 이름을 물었다.
 
“반미주.. 입니다만...”
 
“...반미주씨요? 잠깐만요... ”
 
여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
 
메뉴판을 들고 통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튜즈가 그걸 살짝 내 앞에 펼쳐 놓았다. 자기와 같은 걸 주문하겠다고 했더니 가볍게 등을 톡톡 쳐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반미주씨. 죄송하지만 생년월일, 그리고 2012년 다녔던 회사이름 알려주시겠어요?”
 
몇 분 후 다시 건너 온 여자의 말은 생뚱맞았다.

“왜 그런 걸 물으시죠...?”
 
“반미주씨 본인이 맞는지 저희가 확인해야 해서요.”
 
마치 내가 이 전화를 받을 줄 알았다는 듯한 어조였다.
 
“어떻게... 확인한다는 거죠?”
 
전화 건너편의 여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장현수 의원님이 남겨놓은 반미주씨 신상 정보를 우리가 가지고 있어요. 생년월일, 회사이름...”
 
갑자기 둔탁한 무언가에 머리가 가격당하는 느낌이었다.
 
“의원님이 제 정보를 언제, 왜 거기에 남겨두셨나요?”
 
“먼저 본인 확인이 되면 말씀드리죠.”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 신상을 말해야 하는 일이 달갑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하는 수 없었다. 나는 여자가 원하는 대로 생년월일을 알려주었다.
 
“주민등록상 생일 말고 실제 생일을 말씀해 주세요.”
 
“8월 8일입니다.”
 
그 다음은 2012년에 다닌 회사 이름이었는데... 그곳은 에프와 내가 처음 만났던 바로 그 회사였다. 회사 이름까지 말하고 나자 여자가 말했다.
 
“저희가 아는 정보와 일치합니다. 며칠 내로 저희 관장님이 다시 전화를 드릴 겁니다.”
 
제법 또렷하게 한국어를 잘 하는 듯 보이더니 긴 문장에선 책 읽는 듯한 어투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신원을 확인하는 이유가 뭐죠?”
 
여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의원님이 맡겨 놓으신 게 있어요.... 그걸 저희가 반미주씨에게 드려야 하니까요. 그 외는 관장님과 통화 하시면 알게 되실 거예요.”
 
음식이 날라져 왔지만 나는 통화를 끝낼 수 없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튜즈는 예의 그 투박하고 큰 손으로 패브릭 냅킨을 조심스레 펼쳐 내 무릎에 놓아주었다.
 
“이제 이 번호로는 제가 받을 수 없어요. 다음부터 제 개인 핸드폰으로 해주시겠어요?”
 
여자는 내가 불러주는 번호를 받아 적었다.
 
“그런데... 제가 이 전화를 받을 걸 어떻게 아시고 제 신상을 남겨 놓으셨을까요?”
 
“다시 말씀 해 주시겠어요?”
 
대체로 통화는 깨끗한 편이었지만 한 번씩 소리가 울려 여자도 나도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해야만 했다.
 
“반미주씨 외에 또 한 분 더 메모해두셨는데... 반미주씨와 연락됐으니 이제 상관없습니다.”
 
“....혹시... 한연수씨 인가요?”
 
답이 왔지만 이번엔 전화기가 지직거리며 삼켜버렸다. 다시 한 번 더 말해달라고 하자 단호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 그 분은 아닙니다...”
 
“그럼... 장은영씨 인가요?”
 
다시 여자는 말을 멈추었다.
 
“... 더 말씀 드릴 순 없고... 관장님과 통화 하시면서 더 이야기 하시죠.”
 
통화를 마무리하려는 것 같았다.
 
“잠깐만요. 관장님은 누구며 지금 거기는 어딘지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 여기는 파리에 있는 살바도르 달리미술관입니다. 관장님은 이곳 관장님을 말하는 거예요.”
 
에프가 달리의 조각품을 촬영해 온 곳이 파리의 달리미술관이었다.
 
‘어때 멋지지 않아? 이번에는 진짜 작품하나 만들어 볼 생각으로 심혈을 기울여 찍은 사진이야. 시간의 영속이라는 달리의 작품 속에 있는 시계야. 나는 정말 이 작품이 마음에 들어.’
 
지난 5월 프랑스에서 돌아온 에프는 카메라 속의 그것을 보여주면서 말했었다.
 
“그리고... ”
 
단정하고 사무적인 어투라 딱딱한 느낌마저 들게 했던 여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리가 건너왔다.
 
“의원님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아무 답도 할 수 없었다. 여자에 끌려 함께 웅덩이에 빠져든 느낌이었다. 어떤 말이든 꺼내려 하면 목소리에서 먼저 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통화가 끝났음에도 나는 한참 여자의 목소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튜즈는 우두커니 앉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김진수 계장을 만나면서부터 통화까지 옆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그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스프를 다시 데워 달랬더니 따듯한 걸로 바꿔 준다네. 어, 저기 오네.”
 
튜즈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듯 그것을 받아 내 앞에 놓아 주고는 스푼을 쥐어 주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튜즈가 씽긋 웃어주었다.
 
“내가 만든 구두 마음에 안 들었어?”
 
아침에 엄마 집에 들렀다 나오며 옷에 맞추느라 아무 생각 없이 예전 구두를 신었는데 튜즈는 서운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미주가 신고 싶은 거 신어. 지금 신은 플랫폼도 예뻐. 펌퍼스보다 발도 편하고...”
 
튜즈는 전과 달리 식사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나 역시 프랑스에서 온 전화 때문에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오가느라 식사에만 열중했다.
 
“미주야. 내가 요즘 다시 알게 된 게 있어.”
 
차를 마시다 튜즈가 내 눈을 건너다보았다. 내가 그게 뭔지 묻기도 전에 튜즈가 다시 말했다.
 
“난 네가 참 좋거든. 다시 만나게 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냥 네가 좋아. 너는 볼록하고 하얀 이마도 예쁘고 커다란 눈도, 반듯한 코도 다 예뻐. 우리 회사 모델을 해줬으면 싶을 정도로 늘씬한 몸과 멋진 다리를 가졌지.”
 
튜즈는 마치 사랑고백이라고 하는 것처럼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시선은 아래로 떨궈놓은 채 독백하는 배우처럼 천천히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어디에 서 있어도 환한 빛이 나는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맞춰주고 그냥 네 옆에 있는 걸로도 나는 최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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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즈가 저렇게 어렵게 하고자 하는 말이 뭘까... 나는 가만히 튜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 꼬마 때 우리엄마 장례식장에 왔던 기억나니? 민석이 손잡고 왔었잖아. 열 살 쯤이었던 거 같은데...”
 
어렴풋 기억이 날 것도 같기도 했지만 선명한 건 아니었다.
 
“네가 그때 미니마우스가 그려진 손수건으로 내 눈물 닦아줬다? 기다란 속눈썹에 덮인 커다란 까만 눈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갑자기 튜즈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미니마우스가 그려진 손수건은 기억이 나지만 내가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준 기억은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알았어. 내가 왜 그렇게 너를 좋아하는지... 내가 만든 구두를 네게 신기고 싶은 지 이제 알게 됐어.”
 
물기어린 눈을 애써 피하지 않고 튜즈가 고갤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엄마를 잃은 날 네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던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너한테서 떨어져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아.”
 
“떨어져 나가다니... 무슨 말이야?”
 
“오늘은 저녁만 먹고 헤어지는 걸로 약속했으니까... 이제 나가자. 집까지 내가 바래줄게.”
 
튜즈는 말하면서도 아직 마음이 덜 추슬러졌는지 그대로 앉아있었다. 내가 먼저 일어섰다.
 
“네 친구 만났었어. 화가인 친구... 한남동 살고 있는...”
 
달리는 차에서 튜즈가 말했다. 튜즈가 아니라 내가 운전 중이었다면 분명 급브레이크를 밟고 급정거를 했을 말이었다.
 
“어떻게.... 두 사람이...”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 나보고 꺼지라고. 내가 너를 만나는 건 더러운 욕망이라고. 그래서 나도 곰곰이 생각해봤었어. 내가 정말 더러운 욕망으로 미주는 만나는 건지......”
 
그러고 집으로 닿을 동안 튜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해서 튜즈가 말했다.
 
“내가 엄마한테 못 했던 걸 네게 해주고 싶었나 봐. 네가 그날 내게 손수건으로 눈물 닦아주던 날부터 너는 내게 엄마처럼 포근하고 따듯한 사람으로 남게 된 것 같아. ”
 
레스토랑이 아니라 차에서 그 이야기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튜즈는 내내 앞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시켜 놓고는 절대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기억을 못해서 어쩌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아.. ”
 
튜즈가 말없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여전히 시선을 앞을 향하고 있었다.
 
“괜찮아. 너는 기억 안 해도 돼....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고마워하고 있으니까... 너는 그냥 내가 네 옆에 있게만 해주면 돼...”
 
튜즈는 차 문을 열어주면서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튜즈의 차가 떠나고 놀이터 벤치를 찾아 앉았다. 튜즈와 더블이 어떻게 만났는지 모르지만 더블은 지난 번 만났을 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생각해보니 그날 더블이 그런 이야기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그렇다고 더러운 욕망이라니... 자신이 가진 건 깨끗한 욕망이라는 뜻인가...

더블에게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을 꺼내는 데 우연하게도 더블의 핸드폰 번호가 뜨면서 벨이 울렸다.
 
“미주야. 통화 할 수 있니?”
 
“말.. 해.”
 
“몰래카메라 말이야... 저 번에 그거...”
 
더블은 누가 옆에 듣기라도 하는 듯 전에 없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직수입이 아니라 어떤 수입자가 딱 다섯 개 수입해 와서 판매한 거야. 그것도 인터넷 카페를 통해서...”
 
“어떻게 알아냈어?”
 
“야.. 내가 누구니?”
 
“깨끗한 욕망을 가진 사람?”
 
“무슨 소리야?”
 
“하려던 말이나 해.”
 
“직접 만나서 거래했다는 데 그걸 구입한 사람 카페 닉네임과 서명이 일치해.”
 
“누군데....”
 
“쟝... 알파벳 J.E.A.N... 닉네임도 그렇게 쓰고 있었고 카드 서명란에 싸인도 그렇게 했다네. 혹시... 누군지 아니?”
 
쟝... 이라면... 서명을 JEAN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에프...
 
“글쎄....”
 
“잘 생각해봐. 쟝이라는 작자가 거기다 장착한 거 같아.”
 
“....”
 
“듣고 있냐?”
 
“그런데... 뭐하나 물어 볼게 있어”
 
“말 해.”
 
“나 한테... 말 안한 거 있지...?”
 
“응? 뭐...”
 
“..... ”
 
“야... 그 자식, 남자도 아니구만. 그새 그걸 고해바치던?”
 
“어떻게 만난 거야?”
 
“나는 노코멘트. 됐어. 그 얘긴 여기까지.”
 
“....”
 
“너도 뭐 만만치 않잖아. 아는 거 같구만.. 쟝...”
 
“... 그래... 아는 분 맞아....”
 
“흠 그렇군...”
 
“....”
 
“묻지 마...?”
 
“묻지 마.”
 
내 침묵이 길어지자 더블의 침묵도 함께 길어지고 있었다.
 
▶ 제8요일의 남자 더 보기
#1. 화요일의 남자, 튜즈
#2. 7분의 1을 넘나드는 남자, 에프

#3. ‘당신의 어둠 속에 나도’
#4. “그날,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것”
#5. 엠, 월요일을 싫어하는 남자
#6. 어떤 고백
#7. 한 잎의 여자
#8. 당신은 어디 있나요?
#9. 그 여자 미주 -내 이름은 튜즈
#10. 이미 시작된 일
#11. 말할 수 없는 비밀
#12. 점점 깊은 곳으로
#13. 기억의 영속
#14. 카메라오브스쿠라
#15. 왜 하필 장현수야?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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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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