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주 스님은 “수행을 하면서 자비를 베풀고, 자비행을 하면서 또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회고록 『토끼뿔 거북털』 낸 월주스님
세간을 떠난 깨달음은 없어
공동체 이뤄 아픔·즐거움 함께해야
나는 부족하지만 보람 느껴 행복
월주 스님은 미국으로 3년간 ‘유배’ 생활을 떠났다. 94년 12월, 꼬박 14년 만에 월주 스님은 다시 총무원장에 복귀했다. 종단의 개혁세력이 스님을 지지했다. 월주 스님은 ‘불교 자주화’ ‘종단 운영 민주화’ 등을 통해 ‘깨사(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전개했다. 종단에서는 당시 체제를 ‘개혁 종단’이라 부른다. 그 중심에 월주 스님이 있었다. “조계종단사는 송월주 스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시 월주 스님은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와 함께 ‘종교 지도자 삼총사’로 불리었다. 20년 가까이 친분을 나누며 사회와 국가의 문제를 논의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그랬고, 강원용 목사께서도 그랬다.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를 폄하하지도 않았다. 단지 종교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했다. 그렇지 못할 때 종교는 국민과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게 되니까.”
금산사 미륵전 뒤의 월주 스님 거처 만월당에는 ‘심귀일원 요익중생(心歸一源 饒益衆生)’이란 글귀가 액자에 걸려있었다. ‘마음의 바탕으로 돌아가 중생을 풍요롭고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한참 쳐다보고 있는데 월주 스님은 “수행과 자비는 둘이 아니다”라고 한 마디 툭 던졌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불교는 수행에만 지나치게 치우친 측면이 있었다. 나는 이러한 한국불교의 풍토를 반성했다. 누군가 앞장서야 한다면 내가 하자는 생각이었다.”
98년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깨사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경실련과 불교인권위원회 등의 공동대표를 맡으며 시민운동에 뛰어들었고, 지금도 지구촌공생회와 함께일하는재단, 나눔의집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캄보디아를 비롯한 빈곤 국가 5개국에 2300개가 넘는 우물을 팠고, 네팔과 라오스 등 8개국에 58개의 학교를 준공했다.
마지막으로 월주 스님에게 ‘행복한 사람’을 물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해도 만족하지 않으면 불행하다. 나는 부족하다. 더 노력해야 한다. 그래도 행복하다.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월주 스님은 회고록과 함께 법문집·사진집도 출간했다.
김제=글·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