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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에서 오늘을 읽다] 플라자합의 31년…풀리지 않는 엔고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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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플라자합의를 마치고 카메라 앞에 선 G5 재무장관들. 왼쪽부터 서독의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프랑스의 피에르 베레고부아,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자크 드 라로지에르 IMF 총재, 영국의 나이절 로슨, 일본의 다케시타 노보루. [중앙포토]
 

미국의 중심인 뉴욕 맨해튼. 그 중에서도 최고 요지로 꼽히는 센트럴파크 남단 5번가에는 1907년 지어진 플라자 호텔이 있다. 축구장만한 면적(6070m²)에 센트럴파크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은 뉴욕을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다. 69년 뉴욕시로부터 랜드마크 지위를 받았고, 국립역사 건축물로도 지정됐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나 홀로 집에 2’, ‘화니걸’의 촬영장소로도 유명하다. ‘나 홀로 집에 2’에선 당시 호텔의 주인이던 도널드 트럼프가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88년 플라자호텔을 매입하며 “빌딩이 아니라 모나리자와 같은 걸작을 매입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은 비록 인도의 사하라그룹에 팔렸지만, 한때 미국을 상징하는 건축물의 대명사였다.



1985년 9월 22일 미국·영국·프랑스·서독·일본 등 G5 재무장관들이 이곳에 모였다. 엔·마르크화의 가치를 올려 미국의 무역적자를 해소하자는 취지에서다. 일본과 독일은 반대했지만 미국의 입장은 강경했다. 보복관세가 있을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달러화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만큼 상황이 급했다. 냉전 체제 이후 20여 년간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은 1983년에 채무국 신세로 전락했다. 인플레이션과 경기 둔화가 함께 오는 스태그플레이션 징후도 나타났다. 특히 1336억 달러(1985년 기준)에 달하는 무역수지 적자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미국은 497억 달러(37.2%)의 무역적자를 일으키는 일본을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했다. 엔화 절상이 시급했다.

일본은 미국의 강요와 설득을 받아들였다. 자위대 활용 문제와 과도한 무역 흑자로 미국과 관계가 서먹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관계 악화는 피하고 싶었다. 회담 직후 240엔이던 엔·달러 환율은 9월 말 218엔으로 20엔 이상 절상다. 1년 뒤인 86년 9월에는 153엔으로 치솟았다. 시장의 누적 수요까지 겹쳐 엔화 가치는 1년 만에 36%나 상승했다. 87년 말엔 120엔 대까지 올랐다. 애초 엔화 절상 폭이 15~25%에 그칠 것이라던 전문가들의 관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엔고는 처음엔 일본의 구매력을 배가시키는 마법을 발휘했다. 과거에는 100엔으로 40센트짜리 콜라를 사먹었지만, 엔화 가치가 오르자 80센트짜리 오렌지주스를 살 수 있게 됐다. 일본은 미국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89년 미쓰비시는 미국의 록펠러 센터를 인수했고, 87년 야스다화재해상보험은 3990만 달러에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사들였다. 일본인들은 세계 각지로 여행을 떠났다. 일본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다. 여기에 일본중앙은행(BOJ)이 엔고에 따른 경기둔화를 우려해 정책금리를 2.5%로 내리자 부동산과 증시가 폭등했다. 니케이는 3년 동안 3배, 부동산은 한해 70%씩 뛰었다. 재태크(財 tech)란 말도 이때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엔고의 축복은 짧았다. 부동산 버블을 우려한 일본 정부가 대출총량규제를 실시하고, 일본중앙은행은 정책금리를 1989~90년에 걸쳐 3.5%포인트나 올렸다. 부동산값은 폭락했고, 금융시장은 얼어붙었다. 부동산의 담보가치는 사라지며 은행 대출은 부실채권이 돼 돌아왔다. 금융 회사는 연쇄 도산했고, 자금난에 허덕이던 굴지의 대기업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실직자도 증가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이렇게 시작했다. 무역역조를 막으려던 미국의 플라자합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일본경제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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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자호텔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나홀로 집에2’에 카메오로 등장한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 공화당 대선 후보. 트럼프는 당시 플라자 호텔의 실소유자였다.
 

#하루 이자만 4억 달러, 벼랑 끝 몰린 미국
미국이 플라자합의로 발걸음을 디딘 원인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긴급 성명을 통해 ‘금 태환’ 정책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제 아무리 많은 달러를 가져와도 금으로 바꿔주지 않는단 얘기였다. 27년간 이어온 브레튼우즈 체제를 깨겠단 뜻이기도 했다. 이른바 ‘닉슨 쇼크’로 세계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달러 국제화 등으로 돈을 쓸 곳이 너무 많았다. 돈을 마구 찍으면서 달러는 흔해졌고 35달러를 더 이상 금 1온스로 바꿔줄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당당했다. 당시 존 코낼리 미 재무부 장관은 “그것은 우리의 통화지만, 너의 문제다”라는 악명높은 말을 남긴다. 그러면서 73년 브레튼우즈 체제 포기를 선언하고 변동환율제로의 체제 변환에 국제사회가 동참할 것을 강요했다.
또한 미국은 1·2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변동환율제 실시 이후 과도하게 풀린 달러를 조일 필요도 있었다. 79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으로 선출된 폴 볼커는 이런 문제를 한번에 해결하기 위해 과격한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81년 6%이던 연방기준금리를 단숨에 19%까지 올렸다. 글로벌 시장에 풀린 달러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며 국제 원자재 가격이 내리고 물가가 잡혔다. 문제는 도가 지나쳤다는 점이다. 연준의 예상보다 달러가 과도하게 유입되면서 미 국채 가격이 급락했다. 막대한 재정수지 적자도 발생했다. 이런 와중에 81년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은 물가 상승에 따른 세율 인하 조정 등 대폭적인 감세와 경기 활성화를 위한 공급 정책을 펼쳤다. 통화당국은 냉각기를, 행정부는 온풍기를 튼 셈이었다. 정부와 통화당국의 엇박자로 스텝이 꼬였다. 쌍둥이 적자는 심해지고 경기는 둔화됐다. 금리도 많이 올라 미국이 부담해야 할 이자는 하루에 4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은 이런 상황을 단번에 반전시킬 카드가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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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개입 돈 잘 버는 일본 ‘표적’
일본은 미국의 강력한 우방이었지만, 70년대 중반부터 외교·안보 분야에서 마찰음을 내기 시작했다. 81년 들어선 레이건 행정부는 ‘강한 미국’을 내세우며 직전 지미 카터 행정부와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 국방비 확대와 동맹국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일본은 소극적이었다. 80년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총리에 취임한 사회당 출신인 자민당 소속 스즈키 젠코는 자주·평화 노선을 주장했다. 방위비를 늘리고, 소련의 원자력 잠수함 정찰에 일본 자위대가 나서라는 미국의 요구를 번번이 거절했다. 그는 미·일 동맹에 관련해 “군사적인 의미가 없다”고 발언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의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일본 정부의 노골적인 환율 개입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수출 증가에 힘입어 매년 10%대 고도성장을 했다.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는 환율의 평가절상으로 이어지는데 일본은 시장 개입을 통해 하락 압력을 견뎌왔다.

배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 교수는 “일본은 46년 설정된 달러당 360엔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했다”며 “세계에서 일본만큼 외환시장 개입에 적극적인 나라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낮은 엔화 가치에 힘입어 미국 등 전세계를 상대로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보고 있었다. 전자·중화학·소재·기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을 압도했다. 87년 시가총액 기준 세계 최대 회사는 일본의 통신사 NTT(2768억 달러)였다. 2위 IBM(760억 달러)보다 3.6배나 많았다. 세계 50대 기업 중 미국 기업이 14개에 불과했던 데 비해 일본 기업은 33개나 됐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외환시장 개입을 눈감아 줄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때마침 한국 등 일부 아시아 국가가 엔화를 국제결제 통화로 사용하기 시작한 점도 미국을 자극했다. ‘강한 달러’를 지향하는 레이건 행정부로서는 달러의 가치 훼손을 더 이상 용납하기 어려웠다. 충돌 직전의 외교 관계와 일본의 환율 개입, 막대한 대일 무역적자. 플라자합의는 미국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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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9월 28일자 중앙일보 2면. 한 면을 플라자합의 관련 소식으로 채웠다. 당시 일본은 전략적으로 플라자합의를 받아들였으며, 210엔이 목표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중앙포토]

# “감내할 수 있을 것” 안일한 판단
미국과 미묘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던 일본으로서도 더 이상 미국과의 외교관계 악화를 바라지 않았다. 특히 미 의회가 관세 정책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엔화 절상 카드를 받지 않으면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였어야 할 판이었다. 결국 일본은 백기를 들었다. 그러나 속내는 달랐다. 당시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엔화 절상 폭이 기껏해야 10~20%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후술한다. 그 정도 엔고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것으로도 판단했다.

G5 회담을 주도했던 제임스 베이커 미 재무부 장관도 일본 측 대표인 다케시타 노보루 대장성 장관을 끊임없이 압박하고 회유했다. 베이커 장관은 일본이 엔화 절상 카드를 받으면 미 의회가 제출한 관세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베이커 장관은 미국 정가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인물. 그는 레이건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재무장관을 역임했고,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도 국무장관·대통령 수석보좌관으로 활약했다. 마침 미 상원에 공화당 의석수가 많아 일본도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만했다.

총리를 노리고 있던 다케시타 장관도 미국에 협조적이었다. 당시 회담 통역관이던 곤도 다케히코 대장성 사무관은 “엔저로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다케시타의 말을 이대로는 총리가 될 수 없다고 의역하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 다케시타 장관은 실제 자유민주당 최대 계파인 게이세이카이를 이끌며 87년 총리에 취임했다.

# 6주간 180억 달러 풀어…금리 공조도
85년 9월 22일 체결된 플라자합의의 합의문에는 어떤 이행 사항도 적혀있지 않았다. ‘미 달러화 가치를 내릴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고 대외 불균형 축소를 위해 재정·통화정책을 공조한다’는 두 줄의 성명이 전부였다. 사실 20여 분 남짓했던 이날 회담은 형식적으로 진행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1주일 전 열린 런던회담에서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회의 내용과 문서는 비공개. 3쪽짜리 비공식 보고서가 전부다.

보고서에 따르면 G5는 목표 환율의 범위와 개입 전략, 개입 규모 등을 사전에 정해뒀다. 단기간에 달러화 가치를 10~12% 내리고 이를 위해 6주간 180억 달러의 협조 개입을 실시하기로 했다. 개입 재원은 미국과 일본이 각각 30%, 독일이 25%, 프랑스가 10%, 영국이 5%를 분담하는 것으로 돼 있다. 또 미국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해소되면 국제공조 차원에서 G5가 인플레이션율을 낮추기로 합의했다. 실제 86년 3월 G5는 정책금리를 함께 0.25~0.5%포인트 인하했다(요이초 후나바시 『달러의 관리: 플라자부터 루브르까지』). 거시경제 정책적으로는 미국·프랑스·영국이 재정적자 축소 및 물가안정을, 일본·독일은 내수확대를 최우선 목표로 추진키로 했다. 실제 나카소네 총리는 ‘국제 협조를 위한 경제구조조정연구회’란 자문기구를 만들어 내수주도형 경제성장과 수출입 산업구조의 전환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현재 경제체제가 내수 중심인 것도 이 연구회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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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는 엔고 봉인
플라자합의는 일본에 버블 경제와 잃어버린 20년을 안겼다. 엔고로 많은 기업이 이탈하며 산업공동화가 발생한 것도 플라자합의 탓이다. 플라자합의는 힘에 의한 인위적 환율 조정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은 버블이 꺼진 이후 26년째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다시 엔화를 평가 절하하기 위해 채권과 상장지수펀드(ETF)를 매입하는 비전통적 양적완화 정책과 마이너스 금리까지 시행하고 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2013~2015년 엔화가 일부 절하되기도 했지만 글로벌 금융시장이 출렁일 때마다 엔화에 투자가 몰려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엔화는 다시 오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8개월 뒤 일본은행이 사들일 국채가 바닥날 것”이란 관측을 내놓는 등 앞으로 일본이 쓸 정책카드가 마땅하지 않다는 암울한 전망도 내놓는다. 일본은 20~21일 열린 금융정책 결정회의에서 장기금리를 0% 정도로 유지해 장단기 채권 금리차를 벌리겠다는 대응책을 세웠다. 현재 마이너스인 장기채 금리를 끌어올리면 경기 회복의 기대심리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양적·질적 완화와 마이너스 금리, 여기에 금리조작 카드까지 동원한 셈이다.

일본 역대 총리 중 가장 경제에 밝다는 미야자와 기이치는 “일본의 채무 등 모든 경제 문제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플라자 합의가 있다”고 말한다. 31년 전 힘의 논리로 작동한 미국의 외환정책이 일본을 여전히 고통에 옥죄고 있는 셈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일본 경제의 체질 개선과 엔고 극복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의 임기는 2018년 9월까지다. 그러나 단지 돈을 푸는 것만으로 플라자합의의 저주를 떨쳐낼지 미지수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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