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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서울대 배우' 말고 뚝심 있는 배우, 영화 '범죄의 여왕'& 드라마 'W' 허정도

허정도(38)는 준비된 배우였다. TV 드라마 ‘W’(방영 중, MBC)에서 오연주(한효주)를 ‘차지게’ 혼내던 흉부외과 교수 박민수로 등장하기 전에도, ‘범죄의 여왕’(8월 25일 개봉, 이요섭 감독)의 섬뜩한 살인범 하준 역을 맡기 전부터 그랬다. 그는 ‘암살’(2015, 최동훈 감독) 등 8편의 장편영화와 50편이 넘는 단편영화에서, 배역이 크든 작든 깨알 같은 디테일을 한껏 살린 연기력을 선보였다. 그를 볼 때마다 사실적 연기에 탄복해 ‘누구더라’ 하다가 ‘아, 그 배우였구나’ 하는 생각을 몇 차례 반복했다. “배역에 가려 나를 못 알아봤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가장 기쁘다”는 그는 화면에서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예의 점잖고 다부진 말투로 연기와 삶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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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도/사진=라희찬(STUDIO 706)

-‘W’가 화제를 모으고 있으며, ‘범죄의 여왕’도 상영 중이다. 예전보다 높아진 인기를 실감하나.
“전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녀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화면에서의 모습과 실물이 ‘꽤 다르다’고 하더라. ‘W’의 박 교수를 비롯해 TV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2015, SBS, 이하 ‘풍문’)의 사법고시 과외 교사 경태 등 나보다 나이 든 역할을 주로 맡았다. ‘W’ 촬영 전 첫 미팅 때 정대윤 감독님이 ‘아이쿠, 이렇게 젊어 보이면 안 되는데’ 하시더라(웃음).”

-몇몇 네티즌은 결혼 여부를 궁금해 하더라. 연관 검색어가 ‘허정도 서울대’와 ‘허정도 결혼’이던데.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것은 맞고, 결혼은 안 했다(웃음). ‘밀회’(2014, JTBC)에서 호흡을 맞춘 후 친하게 지내는 (박)혁권 형도 나처럼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더라. 매번 ‘(결혼) 한 번도 안 했습니다’라고 대답하던데, 나도 마찬가지다.”

-‘범죄의 여왕’에서 악역 하준을 연기하며 보여 준 서늘한 얼굴이 신선했다.
“연극에서는 성폭행범이나 살인범 등 범죄자 역할을 자주 맡았다. 연출가들은 내가 전형적 악인처럼 생기지 않아 더욱 악역으로 쓰고 싶다더라. 하준은 사이코패스 같은 타고난 악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명문대’를 나왔지만 낙방을 거듭하고 벼랑 끝에 몰렸다. 나와 지인들을 비춰 보면, 사람은 가장 약할 때 내면의 폭력성이 비어져 나온다. 하준은 자격지심과 자기 환멸이 한계점까지 차올라 날이 서 있는 인물이다.”

-실제 사법고시를 오랫동안 준비한 이들을 만나 봤다고.
“철학과를 졸업했는데, 우리 과의 경우 정해진 진로가 없는 편이라 많이들 고시 준비를 한다. 알음알음 알게 된 ‘장수생’ 형에게 어떤 마음인지 물어봤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것이 아쉬워서, 지금까지 투자한 돈과 시간이 아까워서, 공부 말고 한 게 없어서 포기하지 못한다’ 하더라. 그렇게 하준의 절박한 상황을 익혀 나갔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배역을 위해 취재하는 것은 배우라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의사(W)·검사(TV 드라마 ‘기억’)·사법고시 과외 교사(풍문) 등 온갖 인맥을 총동원해 관련 인물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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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W' [사진 MBC 화면 캡쳐]

-‘W’의 박 교수도 흥미롭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의사면서 소년처럼 만화 『W』를 좋아한다. 두 모습의 간극을 잘 표현했는데.
“누구나 그런 면이 있으니까. 지금은 내가 교양 있게(웃음) 인터뷰하고 있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욕이나 농담도 하는 것처럼. 일할 때와 취미 생활할 때 또 다르다. 종종 배우들도 ‘내가 연기하는 인물은 죽 이럴 거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캐릭터를 변주할 수 있는 폭도 좁아지고 재미도 없다.”

-사실적인 연기 디테일도 취재에서 나오나.
“그런 것 같다. ‘W’를 찍을 땐, 경희대학교 흉부외과 조상호 교수님의 도움을 받았다. 응급실에 오성무(김의성)가 실려 오는 순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등을 물어봤다. 사실을 포착하는 건 연기의 기본이다. 그것이 완성된 다음 극 중 인물의 매력을 끌어내야 더 좋은 연기가 나온다. 이러한 노력을 알아주는 연출가를 만나면 정말 기쁘기도 하고.”

-안판석 감독과의 인연으로, 본격적으로 TV 드라마에 발을 내디뎠는데.
“‘세계의 끝’(2013, JTBC)을 시작으로 ‘밀회’ ‘풍문’까지 함께했다. 동료의 소개로 ‘세계의 끝’에서 단역을 맡았는데, 안 감독님이 내 연기를 보자마자 ‘어디 갔다 이제 왔어’라 하셨다. 그 감동은 이루 말하지 못하겠더라. 안 감독님은 내가 만난 연출자 중 가장 칭찬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조금만 잘해도 ‘이야, 할리우드 가자!’ 하신다. 반면 부족하다 느끼면 ‘그 연기로는 네 인물의 매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대학 졸업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 전문사(대학원) 과정에 입학했다. 연기를 30대부터 시작한 셈인데.
“대학 졸업을 늦게 했다. 졸업 즈음 군 입대 직전에 교내 연극제에 참가했는데, 그게 내 인생을 바꿔 놨다. 무대에 섰을 때의 희열을 잊지 못하겠더라. 전역 후 많이 고민한 끝에 배우가 되기로 했고, 서른 살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입학했다. 그 후 마음껏 연극에 빠져 지냈다. 다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커서, 동기들과 많이 싸우고 울기도 했다. 내겐 생애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말을 뱉은 시절이었다.”

-생계 유지는 힘들지 않았나.
“말 그대로 ‘빡셌지’.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연기하며 배고픈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논술 과외와 학원 일을 하며 버텼다. 학자금 대출금이 쌓여서, 그때 돈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 경험 덕분에 선생님 연기를 그렇게 잘하나.
“안 그래도 교사 역할이 자꾸 들어온다. 이제 안 하려고(웃음). 사실 대학 시절 꿈이 선생님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거든. 하지만 나에겐 좋은 교사가 갖춰야 할 인내심과 관대함,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 포기했다. 그 대신 요즘엔 후배들의 진로 상담을 도맡고 있다.”

-20대에 연기를 시작하지 않은 게 아쉽지 않나.
“아니. 전략적으로 보면 지금은 20대 배우들이 불리한 것 같다. 20대 남자 배역은 적은데, 연기과 졸업생이 쏟아져 나올 뿐 아니라 전문적으로 트레이닝된 아이돌 배우와도 경쟁해야 한다. 내 사례가 좋은 것 같다. 덜 힘드니까(웃음).”

-연기하기 전엔 어떤 사람이었나.
“질문이 많은 사람. 열여섯 살 때부터 왜 살아야 하는지 몰라 괴로워 소리 내 울기도 했고, 출가를 꿈꾸기도 했다. 대학에 서도 고민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약자들이 곤경에 처하는 구조 등 사회의 어두운 면이 눈에 보였다. 자연스레 공동체와 같은 ‘함께 사는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고, 학생회장도 해 봤다. 연기를 하며 새로운 길이 열렸다. 세상을 향한 고민을 내 방식으로 풀 수 있겠다 생각했다.”

-요즘도 세상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하나.
“시스템에 대해 생각한다. 영화계·연극계·방송계가 좀 더 폭력적이지 않고, 지위가 낮은 사람도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는 방법이 뭘까 생각한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지만, 그런 가치를 우선으로 생각하며 살려 한다. 최근 BH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맺은 결정적 이유는, 직원 복지 등 처우가 좋았기 때문이다. 손석우 대표는 그런 배려를 할 줄 아는 좋은 어른이더라. 나는 촬영 현장에서 감독보다 막내에게 더욱 조심스레 행동하는 편이다. 감독은 내 능력을 평가하는 사람이지만, 막내는 내 인성을 평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힘들게 일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 아프지.”

-배우로서 자신을 다잡는 말이 있나.
“후배들에게 늘 해 주는 말이 있다. ‘캐스팅 안 됐다고 실망하지 말고, 좋은 작품에서 잘됐다고 기대하지 말라’고.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 자리에서 내가 해 오던 연기를 하면 된다고. 흥행과 평단의 평가에 자주 흔들리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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