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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바람결에 흩날리고 강을 따라 떠도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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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느냐?”
 
노인이 물었다.
 
“그, 그간, 가, 감사…….”
 
“양젖은 언제 짜 오려 그리 서 있느냐? 아침 안 먹을 게냐?”
 
나는 허둥지둥 양 우리로 갔다. 노인은 늘 그러듯 말없이 밥을 먹었다. 나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며 숟가락만 놀렸다. 배고파 보이면 제값 못 받을까 밥이라도 먹여 두려는 걸까. 그냥 쫓아내는 게 아니라 어디 노비로라도 팔려나…….
 
“네 여행기를 다시 읽었다.”
 
그릇을 비운 노인이 말했다. 무릎이 덜덜 떨리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노비로 팔려가 땅에 매여 살긴 싫었다. 차라리 나가라고 해 주면 좋겠는데… 나간들 어찌하나… 이무가 준 돈으로 뭘 사서 어딜 가서 팔아야 하나, 장사엔 아무 재주가 없는데...
 
“자질이 있더구나. 기억력도 좋고, 표현력도 남달라. 내가 그 시장 바닥에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일찍 내게 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자가 네게 들인 물을 뺄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그래서 보통 어린아이를 받는단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 사내는 날 팔기 전이면 좋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다만 말이 지나치게 적나라하고, 관심사가 너무…… 좁더구나. 한 장소에 있더라도 많은 걸 볼 줄 알아야 해.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좋은 여행가가 될 게다.”
 
노인이 두루마리를 건넸다.
 
“영주들이 금방 버리는 이야기란다.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기록한 게지. 이 이야기가 가치 없다 말하진 않겠다. 다만 우리 여행가는 영주를 위해 여행기를 쓰는 자들이야. 그렇다고 갑자기 너에게 영주의 입맛에 맞는 여행기를 쓰라 하진 않겠다. 거짓은 어떤 이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는 법이니까.”
 
노인은 두루마리를 하나 더 내밀었다.
 
“이 여행기는 오래도록 영주들의 사랑을 받은 이야기다. 앞에 여행기를 읽을 때는 네가 소소한 이야기를 쓸 때라도 써선 안 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뒤에 걸 읽을 때는 네가 써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생각하려무나. 이 여행기들을 읽고, 다시 한 번 써 보렴. 정사 이야기만 빼더라도 훨씬 나아질 게다.”
 
나는 종이를 받고 머뭇거렸다.
 
“묻고 싶은 말이 있느냐?”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노인은 차분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화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노인이 허튼소리를 하는 걸 들은 적 없었다. 이 노인은 사내와 다른 사람이었다.
 
“정사가 뭐죠?”
 
내가 물었다. 노인은 잠시 말을 골랐다.
 
“정을 통하는 이야기 말이다.”
 
“네.”

 
그런 말이 있는 줄 몰랐다. 정사라니. 내가 아는 그 일과 너무 동떨어진 말로 들렸다.
 
나는 두 손으로 종이를 받아 방으로 돌아왔다. 몇 줄 읽지도 않아 졸음이 쏟아졌다. 장사치들이 물건을 흥정하는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고, 가판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 다 생김새부터 어디서 왔고,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 설명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여행기를 펼쳤다. 마찬가지로 늘 보는 풍경에 대한 이야기였다. 강물이 흐르고,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지치지도 않고 적어 내려갔다. 졸다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여행기를 읽었다. 어떻게든 노인이 말하는 여행기를 써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영영 서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더 서가에 머무를 면목이 없었다. 불을 지피던 노인의 눈은 충혈되었고, 뺨은 푹 꺼져 있었다.
 
나는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 노인은 한숨도 이루지 못하고, 내 여행기를 다시 읽고 내게 도움이 될 여행기를 찾았다. 노인은 내게 이렇게 잘해 줄 이유가 없었다.

서가에서 떠나기 위해, 노인에게 보답하고자 나는 그간 본 곳을 되짚으며 안간힘을 다해 커다란 성벽과 사내를 따라 들어가 본 영주의 저택을 적었다. 우리가 영주 저택에서 가본 곳은 뒤뜰 정도였지만 말이다.
 
얼마 후 새 여행기를 내밀었다. 노인이 다 읽더니 날 불렀다. 나는 살그머니 눈만 들었다. 노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절망에 빠졌다. 영원히 이 서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 번도 날 때리지 않은 사람을 실망시켰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두 가지 기준으로 아이들을 받는다. 하나는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천성을 타고난 아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정직이란다. 그간 한 번도 네게 손 댄 바 없거늘, 넌 작은 실수에도 매를 맞을까 몸을 움츠렸어. 그 사내가 널 어떻게 대했는지 쉬이 알 수 있었지.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만……. 그런데도 넌 한 번도 거짓으로 둘러댄 적이 없어. 너처럼 정직한 이는 본 바 없다.”
 
나는 고개를 들고 맞지도 않은 뺨을 습관처럼 어루만졌다.
 
“어렵구나……. 이 여행기는 네 첫 번째 여행기만 한 생동감이 없어. 같은 자리에 있어도 무엇을 보느냐가 그 사람을 말한다. 네 본질이 바뀔 수 있을지, 과연 널 여행가로 받아들일 영주가 있을지……. 허나, 난 기준을 충족한 아이들에겐 늘 기회를 줘 왔다. 허니 너도 기회를 받을 자격이 있다.”
 
노인은 내게 두루마리를 건넸다.
 
“읽을 자격 없는 이에겐 함부로 내주지 않는 귀한 여행기니라. 네 글씨로는 정식으로 필사할 여행기가 아니니 날짜와 이름은 적지 마라. 이 여행기를 다 필사하는 날이 네가 떠나는 날이다. 네게 좋은 영향을 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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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기를 받아 방으로 왔다.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기회를 준다고? 떠날 날이라고? 나도 여행가로 첫 여행을 떠나는 것인가?

떨리는 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치고 깜짝 놀랐다. 급히 마지막 장으로 가 이 여행기를 필사한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토록 고운 글씨는 본 적이 없었다. 한 획, 한 획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글씨였다. 비로소 노인이 처음 몇 년간 종이를 내주지 않은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종이에 글을 쓸 자격이 없었다.
 
서가에는 좋은 양초와 종이가 가득했다. 그날 새벽까지 촛불에 의지해 여행기를 따라 썼다.
동녘이 밝아오도록 필사를 멈추지 못한 건 다 베껴야만 여행을 떠날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내를 따라 나선 게 일곱 살 때였다. 그 후 10년간 수많은 강을 건너고, 산을 넘었다. 앙상한 가지에 눈이 쌓인 모습도, 단풍으로 붉게 물든 산도, 비에 불은 강이 사납게 날뛰는 광경도 보았다. 하지만 내가 본 어떤 풍경도 이 여행가가 본 모습에는 견줄 수 없었다.
 
여행가는 이제껏 어떤 여행가도 가본 적 없는 검은 사막을 찾아 떠났다. 사막 초입에 있는 마을에서, 사막 어느 즈음에 있는 도시로 간다는 장사치들에게 일행으로 넣어 달라 청했다. 장사꾼들은 흔쾌히 수락하며 낙타를 타 보았는지 물었다.
 
여행가는 이 도시에 와 처음으로 낙타라는 짐승을 보았다. 낙타는 말보다 다리가 길고, 거친 털은 모래색이었다. 눈은 크고 속눈썹이 짙고 길어 모래바람에서 눈을 보호했다. 무엇보다 여행가를 놀라게 한 건 턱 높이까지 봉긋 솟은 등이었다. 저 등에 어떻게 올라타야 할지 몰라 주저하는 여행가에게 장사치 우두머리가 낙타 한 마리를 데리고 와 이름은 아마이고, 늙어 순하니 타기 어렵지 않으리라 했다. 일행에 넣어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인데 부러 순한 낙타를 골라 주었다. 여행가는 감사히 받아들이겠노라 말하고 다음 날 만날 약속을 잡아 여관으로 돌아왔다.
 
첫닭이 울었다. 여행가는 잠에서 깨 미리 싸 둔 짐을 챙겨 나왔다. 성미 급한 닭들이 그만 일어나라 목청을 높여도 도시는 일어날 때 되면 일어나겠노라 적막으로 답했다. 새벽 어스름이 깔린 골목을 따라 달려온 매운바람이 사막을 우습게 보지 말라 경고하듯 앞섶을 파고들었다. 여행가는 옷자락을 여미며 약속대로 장사치들이 머무는 여관 앞으로 갔다. 장사치들은 벌써 나와 낙타 등에 짐을 싣고 있었다. 짐을 일부 싣고 사람을 태우는 낙타가 30마리, 짐만 싣는 낙타가 50마리인 대부대였다.
 
우두머리가 여행가 앞으로 어제 본 낙타, 아마를 데려왔다. 여행가가 낙타에 타지 못하고 쩔쩔매자, 우두머리가 낙타 무릎을 꿇려 등에 겹겹이 깔은 양탄자 위로 오르도록 도와주었다. 그새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자기 낙타를 탄 장사치들이 그들을 지켜보았다. 여행가가 가까스로 올라 우두머리가 고삐에서 손을 떼기 무섭게 아마가 몸부림쳤다. 여행가는 떨어질까 겁에 질려 낙타 목을 끌어안았다. 낙타는 목을 흔들었다. 여행가는 결국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장사치들이 기다렸다는 듯 박장대소했다.

여행가는 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엉덩이를 털고 우두머리의 도움을 받아 다시 낙타에 올랐다. 낙타는 발을 땅에 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두머리가 낙타를 다루는 법과 앞으로 가자는 신호인 혀 차는 법을 알려 주었다.
 
장사치들은 여행가가 어설프게 혀를 차고, 낙타를 다루지 못해 쩔쩔매는 꼬락서니에 재밌어 낄낄거렸다. 아마는 닭들이 연이어 울고, 아낙들이 깨어 물을 길으러 나올 무렵에야 첫발을 떼어 주었다.

여행가는 처음엔 자기가 서툴러 낙타가 말을 듣지 않는 줄 알았다. 도시를 벗어날 무렵에야 아마는 본디 고집에 세 낯선 이의 말을 듣지 않으며, 짓궂은 장사치들이 그를 놀리려 일부러 아마를 건넸음을 알았다. 여행 내내 짜고 괴롭히려 들까 두려워졌다.
 
성문을 벗어나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돌로 된 거리를 거니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하나둘 사라졌다. 간간이 자라던 키 작은 나무들도 줄어들더니,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길도 없는 너른 땅에 자갈과 앙상한 관목들만이 자리했다.

이따금 장사치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외에는 사방이 고요해 바람 부는 소리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해가 솟자 위아래에서 견디기 힘든 열기가 몰아닥쳤다. 여행가는 장사치들처럼 얼굴을 가리고 소매를 내렸다.

장사치들은 낙타 위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여행가는 떨어지지 않는 것만도 힘겨운 지라 포기했다.
 
땅에 드리운 그림자가 길어지고 지옥 같던 열기가 사그라질 무렵 장사치들이 오늘은 이만 쉰다고 말했다. 여행가는 녹초가 되어 떨어지듯 낙타에서 내렸다.

장사치들이 능숙하게 기둥을 세우자, 몸집이 작은 이가 기둥을 타고 올라가 아래에서 던지는 양탄자를 받아 천장 삼아 덮었다. 장사치들은 천장이 완성되자 벽을 따라 겹겹이 양탄자를 둘렀다. 여행가도 사막의 추위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으나 한낮의 땡볕을 생각할 때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의아했다.
 
모두 자기 일을 하는데 능숙했다. 여행가는 서툰 손길을 내밀어 봐야 방해만 될 듯해 자기 낙타를 살폈다. 타고 온 자기도 이렇게 힘든데, 양탄자에, 짐에 자기까지 메고 온 낙타는 얼마나 힘들랴 싶어 짐도 내리고, 몸에 주렁주렁 달린 장식들도 떼 주려 했다. 낙타가 발길질을 하며 콧바람을 내뿜었다.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을 치다 또 보기 흉하게 주저앉았다. 장사치들이 박수를 치며 웃어댔다.

비로소 여행가는 낙타도 사람처럼 각기 성격이 있고, 아마는 허영심이 많아 장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내심 미리 알려 주지 않은 장사치들을 원망했다.

안 그래도 성미가 까다로워 사귀기 쉽지 않은 낙타였는데, 이 일로 그에게 완전히 돌아섰다. 심지어 그가 볼일을 보는데 따라와 놀라게 해, 바지춤도 제대로 추리지 못한 채 마른 덤불에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장사꾼들은 재미있어 어쩔 줄을 몰랐고, 아마는 놀라 말도 못하는 그에게 사람처럼 콧방귀를 뀌더니 도도하게 돌아섰다.
 
아침마다 아마 등에 오르는 게 전쟁이나 다를 바 없었다. 우두머리도 첫날 이후 도와주지 않았고, 다른 장사치들도 구경만 했다. 덕분에 출발 시간이 자꾸 늦어졌다.

여행가는 야영할 때 낙타 등에서 짐을 내리는 건 아예 포기했고, 아침이면 다른 이들이 막사를 정리할 때부터 아마와 씨름을 했다. 그렇게 해도 다른 장사치들이 짐을 다 꾸려 올라탄 후에도 한참이 더 지나서야 낙타 등에 오를 수 있었다. 몸도 지치고, 면목도 없어 마음이 편치 않아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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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장편 [지우전 : 모두 나를 칼이라 했다], [부엉이 소녀 욜란드],
작품집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 [각인]을 출간하고 다수의 공동 작품집에 단편을 수록한 이 인간의 작업 책상에는 컴퓨터, 프린터/스캐너 복합기, 지난 밤 마신 맥주 캔, 고양이가 있다. 네 발 달린 아해가 책상을 오르내리며 키보드를 밟아도 오타는 모두 작가의 책임이라는 게 냉엄한 현실.

오늘도 글을 쓰며 고양이와 키배, 아니 키보드 쟁탈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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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