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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혁명가로 들어서며 장제스와 손 잡은 천커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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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쟁 승리 후 천커푸(둘째 줄 앉아있는 사람 오른쪽에서 여섯째)의 방문을 환영하는 중앙정치학교 회원들. 1946년 6월 8일 상하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설립자 헨리 루스(Henry Robinson Luce)는 천커푸(陳果夫·진과부)와 천리푸(陳立夫·진립부) 형제에게 관심이 많았다. 천리푸의 학식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중국 사정에 정통했던 루스의 견해는 달랐다. 천커푸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나는 국민당과 특무기관을 장악했던 형제의 정당활동이나 정치적 업적에는 흥미가 없다. 형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가난한 권력자였다. 인품이나 생활 습관이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천커푸는 무슨 일이건 능수능란하고 청렴했다. 겸손하고 접근하기도 쉬웠다. 동료나 아래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장제스(蔣介石·장개석)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아는 것도 많았다. 안 읽은 책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92-


천리푸도 형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커푸는 삼촌 천치메이(陳其美·진기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단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존경받을만한 특징이 있었다. 책 사는 것 외에는 특별한 취미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돈 몇 푼만 있으면 책방으로 달려갔다. 이른 아침 유서 깊은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이나 중화서국(中華書局)에 가면 하늘이 붉게 변해도 나올 생각을 안 했다. 기호(嗜好)도 전혀 없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고 담배도 피울 줄 몰랐다. 평생 백화점 가서 어슬렁거린 거린 적이 없고, 극장도 가는 법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회고도 별 차이가 없다.

천커푸는 수양이 잘된 사람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과격했지만, 일 앞에선 침착하고 상대가 누구건 정중했다. 격무로 건강이 엉망이다 보니 의학, 특히 전통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50여만 자에 달하는 의학 관련 저서를 직접 집필하고 노래 가사도 많이 창작했다. 고서화 감상도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책 몇 줄 읽거나 말 몇 마디 주워 듣고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경멸했지만, 내색은 안 하는 교양인이기도 했다. 단, 공산당원과 국민당 좌파만은 예외였다. 국물도 없었다.

후스(胡適·호적)는 인물 평가에 인색했다. 최고 통치자 장제스를 면전에 대놓고 비판해 사람들 간 떨어지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후스조차도 천커푸만은 높이 평가했다. 베이징 대학 총장시절 술자리에서 천커푸를 거론한 기록이 남아있다. “학자들의 사람이나 일에 대한 평가를 보면 불공평한 점이 많다. 천커푸 선생의 전집을 읽거나 직접 접해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 문턱에도 못 가본 사람의 다방면에 걸친 학식과 경륜, 수준과 공력에 입이 벌어질 지경이다. 베이징 대학에도 천커푸 만한 연구 성과를 남긴 교수들이 몇 안 된다. 천치메이 선생은 훌륭한 조카를 뒀다. 저팔계 백 명이 손오공 하나만 못하다는 옛말이 맞다.” 내친김에 정치권 눈치나 보는 교수들에게도 일침을 가했다. “국민당의 몽둥이만도 못한 학자들이 우리 대학에 수두룩하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불평도 많고, 바라는 것도 많고, 사람 귀한 줄도 모른다. 수명만 길다.”

천커푸는 천씨 집안의 장손이었다. 열네 살 때 셋째 삼촌 천치차이(陳其采·진기채) 덕에 후난(湖南)의 명문 중학에 입학했다. 워낙 좋은 학교라 기초를 단단히 쌓을 수 있었다. 삼촌이 난징(南京)으로 전근 가는 바람에 전학한 학교는 수준 이하였다. 후난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천커푸는 항상 1등만 했다.

새로 옮긴 학교의 교장과 교사들은 학생들 급식비까지 손대는 엉터리들이었다. 참다 못한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자며 소요를 일으켰다. 천커푸는 소요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훗날 틈만 나면 당시를 회고했다. “한 달간 학교가 어수선했다. 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매일 텅 빈 교실에서 책보며 졸업시험 준비에 열중했다. 학생들은 결국 실패했다.” 수업 거부에 종지부를 찍은 학생들은 천커푸를 배신자라며 손가락질 해댔다.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난징을 떠난 천커푸는 항저우(杭州)에 있는 육군소학(陸軍小學)에 합격했다.

육군소학 도서관은 잡지가 많기로 유명했다. 천커푸는 졸업하는 날까지 온갖 잡지와 씨름했다. 시야가 넓어지자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친구들에게 “소박때기 할망구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신해혁명 발발 6개월 전인 1911년 4월, 육군소학을 졸업한 천커푸는 동맹회(同盟會)에 가입했다. 만 20세, 많지 않은 나이였다. 삼촌을 따라가 쑨원(孫文·손문)을 만났다. 어찌나 감격했던지, 몇 날 몇 일 밤잠을 설쳐도 피곤하지 않았다. 건강이 눈에 띌 정도로 악화됐다. 천치메이가 일본행을 권했다. “혁명은 산사람이 할 일이다. 병 치료하며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 갈 준비 해라.”

천커푸의 일본 생활은 짧았다. 국민당 총리후보 쑹자오런(宋敎人·송교인)이 암살 당하자 중국으로 돌아왔다. 반(反)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 투쟁에 가담해 직업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1916년 천치메이가 죽자 장제스와 손을 잡았다. 끈질긴 인연이 시작됐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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