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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전 DJ 만나 입당한 그날 당 대표 된 ‘대구 세탁소집 딸’

더민주 추미애 신임 당 대표가 27일 당선 직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축하를 받고 있다. 추 대표가 자신의 꽃다발을 김 대표에게 건네주고 있다. 김 대표는 이날 대표직을 내려놨다. 오상민 기자

200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을 예방한 당시 추미애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사진 위). 2004년 당시 당 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는 추미애 민주당 상임중앙위원. [중앙포토]



“오늘, 참 운명 같은 날입니다. 21년 전, 1995년 8월 27일 광주에서 판사를 하다 김대중(DJ) 대통령을 만나 입당원서 쓴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신임 당 대표는 27일 전당대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구 세탁소집 둘째 딸’이 입당 21년 만에 제1야당의 대표가 됐다.



지난 19일 강원지역 합동연설회장 입구에는 한 중년 남성이 추 대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87년 춘천지법 판사이던 추 대표가 시위 주도 혐의로 신청된 구속영장을 기각했는데, 당시 대상이었던 강원대생이었다. 그 남성이 연설회장을 찾아 추 대표를 응원했다. 86년 대학생 1500여 명이 참가한 건국대 점거 농성 사건 이후 정부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소지한 학생들에 대해 대대적인 단속을 벌일 때도 당시 추 판사는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했다. 전국에서 영장이 기각된 곳은 강원도 춘천이 유일했다. 그런 그를 영국에서 귀국해 마지막 대선 도전에 나선 DJ가 영입했다. 95년 8월 15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발기인대회에서 추 대표는 허인회 당무위원과 함께 선서를 했다.



추 대표는 스스로 ‘흙수저’라고 말한다.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부모 곁을 떠나 외가에서 자랐다. 추 대표는 “어머니는 실직한 아버지를 대신해 손마디가 굽어지도록 땅콩을 까고 삯바느질을 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우리 가족을 묶는 꿈이었고 부모님께 자식은 짐이 아니라 희망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대 대구 연설회장에서 추 대표는 “대구의 세탁소집 둘째 딸 추미애, 친정에 오니 자랑스럽고 든든하다. 우리 당이 낳은 대구 출신 첫 당 대표가 돼 박근혜 대통령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로 절망을 안겨준 대구·경북에 희망을 만들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권에 들어온 추 대표는 주요 정당의 여성 최초 부대변인이 됐다. 그는 최초의 현직 판사 출신 야당 정치인이기도 했다. 15대 총선에서 광진을에 당선되면서 서울 지역구 최초 여성 의원이란 타이틀을 추가했다. 지난 4·13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최초의 지역구 5선 여성 의원도 됐다.



정치인 추미애가 전국적인 인지도를 쌓은 계기는 97년 대선이었다. 추 대표는 김대중 캠프의 선거유세단장을 맡았다. 대선을 20여 일 앞두고 대구에서 유세가 있었다. 당시 대구에서 유세단을 만들려고 하자 과거 DJ의 외곽 그룹인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 대구 지역 인사가 “큰일 납니더. 우리 당 간판 들고 유세하고 돌아댕기다가 돌 맞아 죽십니더!”라며 난색을 표했다. 추 대표는 그러나 남편이 만들어줬다는 ‘잔다르크 유세단’이란 이름을 내세워 고향인 대구에 뛰어들었다. 그곳에서 표심을 DJ 쪽으로 돌려놓진 못했지만 ‘추다르크’라는 평생의 별명을 얻었다.



2002년 대선에서 ‘돼지엄마’라는 또 다른 별칭을 얻는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 후보를 선출했지만 지지율이 하락하자 당 일부 인사들이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를 만들어 당시 노 후보를 흔들었다. 후단협은 2002년 월드컵을 거치며 주가가 상승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요구했다. 노 후보는 당시 최고위원이던 추 대표의 의원회관 방에 불쑥 찾아와 “추 최고, 나 좀 도와주소”라고 했다. 추 대표는 “민주당 당원인 이상 우리 당 후보를 도울 겁니다. 노무현이라서가 아니라 민주당 후보이기 때문입니다”고 답했다. 추 대표는 정동영 현 국민의당 의원과 함께 노무현 캠프의 국민참여운동본부장을 맡았다. 중앙당이 급기야 선거자금도 주지 않는 상황이 되자 노 후보는 돼지저금통을 들고 국민모금에 나서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추 대표는 거기서 ‘돼지엄마’로 불리며 현장에서 모금을 주도했다. 돼지엄마가 모금한 57억원은 노 후보 당선의 기반이 됐다.



추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당내 ‘신주류’가 됐다. 하지만 2003년 노 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면서 신주류의 길을 포기했다. 열린우리당 창당에 반대해 새천년민주당에 잔류한 추 대표는 2004년 스스로 “내 정치인생에 있어서의 가장 큰 실수”라고 후회하는 대통령 탄핵에 참여했다. 전당대회 과정에서 추 대표는 상대 후보들로부터 “노 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했다”고 공격받았다. 추 대표는 이날 전당대회 연설에서 울먹이며 “노무현 대통령에게 진 마음의 빚, 당 대표가 돼 대선 승리로 갚겠다”고 했다.



탄핵이 부결된 2004년 추 대표는 17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의 선거를 떠맡았지만 참패했다. 사죄의 의미로 광주광역시 금남로에서 5·18 망월동 묘역까지 15㎞에 달하는 삼보일배를 했다. 추 대표는 당시 무릎이 상해 지금까지 높은 구두를 신지 못한다. 17대 총선에서 패한 추 대표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 있을 때 노 전 대통령은 추 대표에게 세 차례나 장관직을 제안했다고 한다. 추 대표는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여전히 반목하는 상황에서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일로 대통령과의 화해가 이뤄진 셈”이라고 말했다.



추 대표는 2008년 야권 통합 후 출마한 18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됐다. 그러나 2009년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시절 한나라당 의원들과 단독으로 ‘노동조합 및 노조관계 조정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번 경선에서도 이종걸 후보는 “추 후보가 당론을 거스르고 한나라당과 날치기로 처리하면서 당원자격정지 처분을 받아 대표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추 대표는 “비정규직 2년 근무자를 무기계약직(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비정규직법을 통과시키기 위한 소신이었다”고 해명했다.



추 대표는 95년 입당원서를 쓴 뒤 한 번도 탈당을 하거나 당적을 바꾼 적이 없다. 문재인 전 대표가 당선됐던 지난해 2·8 전대에서 그는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되며 ‘친문’ 주류가 됐다. 비주류 측이 문 전 대표와 갈등을 빚을 때 지도부 내에서 문 전 대표를 지지했다. 그의 당선에는 주류 진영의 지지가 바탕이 됐다.



 



추미애 ▶1958년 대구 출생 ▶한양대 법학과 학사 ▶24회 사법시험 합격 ▶춘천지법, 인천지법, 전주지법, 광주고법 판사 ▶제15~16대, 18~20대 국회의원 ▶2002년 새천년민주당, 2012년 민주통합당,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18대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소녀상의눈물 운동본부, 경제정의노동민주화특별위원회 위원장



 



 



강태화·유성운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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