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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흰색’과 ‘주름’ 살린 역동성 내세워야

평창 겨울올림픽 슬로프와 똑같은 크로스 코스에서 동호인들이 스키를 즐기고 있다. [중앙포토]

평창 겨울올림픽 마스코트 수호랑(왼쪽), 반다비.



리우가 끝났다. 이제는 평창이다. 1년6개월 뒤 열리는 평창 겨울올림픽은 인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 그 누구도 아닌 ‘인류’에게. 이제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저 우리끼리 성공적으로 개최했다고 자족하면 안 된다. 올림픽 시설물을 나중에 재활용하게 됐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한류’로 우리의 역량을 세계만방에 보여줬다고 자랑하는 것에 그쳐서도 안 된다. 출발의 관점부터 달라야 한다.



평창 겨울올림픽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첫인상이라 할 수 있는 색깔을 고민해보자. 리우 올림픽을 지배하는 색은 푸르름이었다. 푸른 물과 녹색의 숲이 붉은색의 불을 대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아마존이 숨을 쉴 때 배출되는 산소의 올림픽이었다. 불을 태우고 남는 일산화탄소의 지양, 그것이 리우가 인류에게 던진 메시지였다.



리우가 녹색이었다면 평창은 단연 ‘흰색’일 것이다. 겨울올림픽은 눈과 얼음의 축제이므로 흰색이 바탕색이다. 게다가 우리는 ‘백의민족’ 아닌가.

2015년 2월 9일 평창 알펜시아 스키점프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 올림픽 성공기원 행사. [중앙포토]



 



강릉 오죽헌은 여성성의 상징적 공간흰색은 사라지는 색깔이다. 북극이나 남극의 위성사진을 보면 흰색이 점점 줄어든다. 온난화는 지구로부터 흰색을 빼앗아 간다. 사라져가는 흰색은 인류에 대한 지구의 경고다. 지속 가능한 미래는 바로 흰색의 복원과 관련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색깔인 흰색의 확장을 통해 인류에게 ‘복원’이라는 의미를 되새기게 해야 한다.



빛의 3원색이라는 적·녹·청을 더하면 흰색이 된다. 흰색의 바탕 아래 모든 색은 춤을 춘다. 어머니의 품 안에서 노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이쯤에서 신사임당이 떠오른다. 강릉의 오죽헌은 우리에게 위대한 모성, 여성성의 상징적 공간으로 기억된다. 흰 바탕 위에 사임당은 꽃과 새, 나비를 그린다. 사임당은 정지되어 있는 풍경을 묘사하기보다는 ‘어울림’을 그렸다. 흰 바탕 위에 화려한 화조도가 수놓아진다면 흰색은 인류의 어울림을 이끄는 모태가 된다. 또한 흰색에는 경계가 없다. 그러나 강원도에는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상처처럼 휴전선이 있다. 이 경계를 지우는 것이 민족의 염원 아니던가. ‘장사의 몸뚱이처럼 한 몸인 한반도’라는 시구(詩句)처럼 흰색은 한 몸이 되게 만드는 색이다.



리우 올림픽에 삼바가 있다면 평창에는 ‘아리랑’이 있다. 현존하는 아리랑 중 가장 오랫동안 보존된 건 ‘정선아리랑’이다. 정선아리랑은 강원도의 정서뿐 아니라 백두대간을 넘어 한반도로 들어온 우리 선조의 문화적 궤적을 집약한다.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 구암자 유점사 법당 뒤에 칠성단∼’ 이렇게 시작하는 정선아리랑은 태백산맥 험산준령 첩첩산중의 산세에 굽이굽이 스며 있는 우리의 얼을 찬찬히 뜯어 살피는 노래다. 그 안에는 백두대간의 골짜기를 넘어 남하한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가 상징적으로 묘사된다. ‘태산준령 험한 고개 칡넝쿨 얼크러진 가시덤불 헤치고 시냇물 굽이치는 골짜기 휘돌아서 불원천리 허덕지덕∼’ 과연 이것이 우리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험한 길을 헤치고 님을 찾아왔건만 님은 ‘본체만체 돈담무심(頓淡無心)’이다. 무심한 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결과 경쟁의 논리로는 서로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 오직 화합하려는 상생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통해서만 정선아리랑은 완성된다. 민족 분단의 아픔을 땅덩어리 자체로 안고 있는 강원도가 이런 관점에서 아리랑을 다시 풀어내면 어떨까.



정선아리랑은 어떤 구조인가. 바로 주름의 구조다. 여름올림픽이 들판의 축제라면 겨울올림픽은 골짜기의 축제다. 여름올림픽에서 선수들은 탁 트인 평원을 마음껏 달린다. 반면 겨울올림픽에서는 계곡을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하강한다. 하강의 황홀함. 스키점프의 짜릿함. 사람의 몸으로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땅의 주름을 타고 하강하는 동안 경험한다. 계곡을 다 내려오면 뭐가 있나. 강이 있고 호수가 있다. 겨울에 그 강과 호수는 단단한 얼음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거기서 스케이트를 탄다. 좁은 오솔길을 노르딕 스키를 타고 건너고 또 건넌다. 배고프니 사냥을 한다. 그래서 겨울올림픽은 여름올림픽보다 훨씬 수렵적이다.

지난 8일 브라질 코파카바나 해변에 마련된 평창 겨울올림픽 부스를 찾은 주민들이 인공눈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리우=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정선아리랑은 주름을 노래 자체로 표현 정선아리랑은 바로 그 ‘주름’을 노래 자체로 표현하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서 한번 보라. 강원도는 주름진 동네다. 혈맥과도 같이 뻗어 있는 주름들이 강원도를 지배한다. 그래서 강원도는 겨울올림픽의 최적지다. 문화적으로도 그 주름을 표현해야 한다. 주름을 수평으로 보면 첩첩산중의 지세가 된다. 외국의 산들은 산 하나가 우뚝 솟아 있거나 거대한 산맥이 병풍처럼 쳐져 있는 것에 그치지만 강원도의 산, 태백의 산들은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 산들의 겹, 산들의 주름을 보여준다. 이러한 산세는 저 남쪽 지리산까지 펼쳐지며 한반도를 주름의 지형으로 만든다.



주름은 좁은 지형 안에 그 몇 배의 넓이를 품고 있는 잠재력이다. 주름은 한 번 지나간 것이 그 다음에 또 나오면서 반복, 확장되는 끊임없는 재생산의 구조다. 정선아리랑에서 시작된 주름이라는 테마가 흰 바탕 위에 끊임없이 용틀임하고 있는 광경의 문화행사를 기대해 보는 건 어떨까.



여기서 철학자 들뢰즈의 ‘주름’ 개념을 되새겨보자. 그에게 주름은 하나의 접선만을 지니고 있는 데카르트적인 곡선이 아니라, 날카로운 각을 둥글게 하는 탄력적인 점이다. 주름의 변곡점은 ‘고유의 특이점’으로서 일정한 질서의 좌표계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주름의 변곡은 높은 곳이나 낮은 곳, 또는 오른쪽 왼쪽을 구별할 수 없다. 또한 내려가는 것도 올라가는 것도, 감소도 증가도 아니다. 이때의 주름은 무한대로 변할 수 있으며 전후좌우를 불문하고 확장된다.



한 발만 더 나아가 강원도 지형의 주름에 화전민 할머니의 주름을 더해 상상해보자. 강원도는 척박한 땅이다. 그 주인은 대관령·한계령·미시령을 넘나들며 땅과 교감했던 화전민이다. 촌로의 주름과 이 백두대간의 주름은 정확하게 겹친다. 주름(강원도) 속에 살며 주름(촌로)의 한을 씻어주는 다양한 주름(역동성)의 창조가 인류애의 발현이 아니고 무엇이랴.



한반도 통일은 전 세계적 치유의 상징마지막으로 주름의 운동성과 구불구불한 흐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태극무늬가 된다. 음양의 조화인 태극은 아래와 위를 뒤섞는, 러시아 철학자 바흐친적 의미에서의 ‘뒤집기’를 상징한다. 남은 북에 좀 보내고, 북은 남에 좀 들어와 있는 출렁임이 태극무늬 아닌가. 이제 한반도의 통일은 전 세계적 치유의 상징이다. 고난을 넘나들며 위아래의 위계를 지우는 주름의 문화가 태극의 문화다. 그것의 의미를 되새길 때 평창은 통일을 기원하는 인류축제의 장이 될 수 있다.



축제란 무엇인가. 축제는 무엇보다도 ‘그냥’ 존재한다. ‘무상성’(無常性)이 축제의 존재 이유다. 강원도 평창이 보여줄 ‘주름의 축제’는 모든 이성적 언어의 대립 항들이 일시적으로 대립의 긴장관계를 무너뜨리는 공간, 기존 질서의 일시적인 ‘무화(無化)’다. 다양한 존재들이 높낮이의 차이를 버리고 일시적으로 ‘그냥’ 혼재하는 상태가 바로 축제화된 상태일 것이다. 물론 스포츠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 스포츠는 적과의 대결, 전쟁의 축소판이다.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다. 히틀러는 게르만인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악용했다. 동구가 체제 우월을 증명하기 위해 운동선수들을 육성했다면, 미국은 자본으로 물들였다. 리우에서 러시아의 약물 파동은 20세기식 스포츠 육성법의 잔재다.



스포츠의 원시성·놀이성 회복시켜야스포츠의 놀이성을 회복시켜야 한다. 스포츠는 관람자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놀라운 기술과 극한의 몸짓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최고의 몸의 예술이다. 프랑스 사상가 로제 카이우아(Roger Caillois)는 『놀이와 인간(Les jeux et les hommes)』에서 놀이의 기본 범주로 경쟁과 모의(模擬·실제의 것을 흉내 냄), 운과 현기증 등을 꼽았다. 스포츠야말로 네 가지 요소를 완벽히 구현시킨 인류의 문화적 발명품이다.



스포츠는 원시적이다. 꽃다운 나이의 몸이, 그것도 훈련된 몸이 대결을 벌인다. 올림픽은 바로 그 대결의 모든 요소가 집약된 거대한 문화적 축제다. 리우 올림픽이 강조한 것도 이런 측면 아니었을까. 어려움이 있었고 부작용도 적지 않았지만, 리우 올림픽의 개·폐막식을 보면서 여전히 올림픽은 잊고 살았던 인간의 원시성과 본성을 환기시켜주는 문화 행사임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리우는 인류의 허파이자 미래인 아마존의 가르침에 따라 ‘녹색의 올림픽’을 표방했고 돈이 주무르는 신자유주의 세상을 지양한 ‘빈자의 올림픽’을 추구했다. 개막식에는 리우의 빈민촌인 ‘파벨라’의 춤이 전 세계인을 매혹시켰고 폐막식에는 강제 이주당한 흑인 여성들이 오직 손과 자연의 산물로만 완성하는 레이스 짜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난민들이 한 팀을 이뤄 최초로 ‘국적(Nationality)’의 범주를 넘어섰다.



경쟁보다는 소통을, 대결보다는 놀이를 강조하는 브라질 특유의 국민성이 이를 가능케 했다. 기를 쓰고 이기려 하고 남을 누르려 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평창도 이런 점을 곱씹었으면 좋겠다. 그러기에 충분한 주름과 흰색이라는, 문화적 자양분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평창의 성공을 기원한다.



 



 



성기완 계원예술대 교수 kumbawan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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