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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혜만 받고 책임 안 지는 천민 상층이 ‘헬조선’ 자조 만들어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먼 나라로 갈거나/ 가서는 허기져 콧노래나 부를 가나/ 이왕 억울한 판에야/ 우리나라보다 더 억울한 일을/ 뼈에 차도록 당하고 살가나….”



『특혜와 책임』 펴낸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지난 22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원로 사회학자 송복(80·그림) 연세대 명예교수는 시를 읊조렸다. 박재삼 시인의 ‘서시(序詩)’였다. 1950~60년대 희망이라고는 찾기 힘든 청년 시절 그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거리에서 읊어대던 시였다. 송 교수는 ‘시대의 절망’을 자학하는 시라고 소개했다.



“이 나라에 사는 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었으면 차라리 남의 나라에 가서 살아보려 했을까. 절대적 절망에 빠져 있던 젊은이들의 분노와 좌절을 담은 시입니다.”



송 교수가 수십 년 전의 애송시를 끄집어낸 것은 당시 젊은이들의 분노가 50여 년 지난 지금 되살아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부국이 됐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다시 절망을 얘기합니다. ‘헬조선’이니 ‘흙수저’니 하는 말들을 들으며 그 원인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송 교수는 최근 고민의 결과가 담긴 책 『특혜와 책임』을 펴냈다.



 



-젊은이들이 왜 분노한다고 보나. “근본 원인은 우리 사회의 탐욕적 상층(사람들) 때문이다. 넥슨 주식을 뇌물로 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진경준 전 검사장, 자기 아들을 의경 ‘꽃보직’에 보낸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교육부 기획관 등 상층에 있는 이들이 보여준 행위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들을 보면 희망이 안 보인다.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라 외치고 이 나라를 탈출하고 싶어 하게 만든다.”



-우리 상층은 왜 그런가. “우리 사회 상층은 대체로 당대에 그 지위에 올라선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을 우리 사회 엘리트로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직역의 권력을 쥔 고위직층인 ‘뉴하이(New High)’와 대기업가층인 ‘뉴리치(New Rich)’로 분류한다. 이들에겐 서구 사회처럼 누대에 걸친 역사가 없다. 할아버지대 이상에서부터 켜켜이 쌓아 온 체화된 상식·교양·문화와 윤리가 내면화돼 있지 않다는 얘기다. 내면화는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때조차 교양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술에 취해도 한도를 넘어서지 않고 절제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다. 뉴리치는 그나마 집안의 역사도 오래되고 어렸을 때부터 자식 훈련을 잘 시키는 면에서 낫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 정도까지 온 것은 뉴리치 덕분이다. 하지만 각종 고시 등 시험을 통해 상층에 오른 뉴하이는 그렇지 못하다. 자신이 받고 있는 특혜를 인식하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지 않는 ‘천민상층’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구와는 어떤 차이를 보이나. “서구에는 상류사회가 존재한다. 200년 이상 지위를 유지해온 존경받는 집단, 존경받는 계층이 있다. 미국의 대법관들, 영국의 귀족들이 그렇다. 영국의 해리 왕자는 왕족인데도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헬기를 조종했다. 이런 게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고위직층은 역사가 짧아 그게 안 돼 있다. 이렇다 보니 자기 아래 사람에게 ‘갑질 행태’를 보이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오만한 행동을 한다. 우리 고위직층의 자녀 중 병역 면제자가 20%가 넘는다. 일반인은 4%가 안 된다. 군대 가도 전부 ‘꽃보직’을 맡는다. 이걸 보고 어떻게 그들을 존경하겠나.”



송 교수는 고위직층이 자신들이 특혜를 받았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이 높은 지위에 올라선 것은 자신의 노력과 맞먹는 운이 작용한 결과라는 이유에서다.



-고위직에 오른 이들이 억울하게 생각할 것 같다. “고위직층에게 지금 자리에 어떻게 올랐냐고 물어보면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나의 치열한 노력과 피와 땀의 대가다. 오직 내 스스로 키우고 연마한 경쟁력을 통해 획득했다’고 한다. 심지어 소위 ‘금수저’로 불린 이들도 말한다. ‘부모를 잘 만났지만 우리 사회의 지독한 경쟁관계를 이겨낸 것은 내 노력 덕분’이라고. 그들이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이다.”



-나머지 반은 뭔가. “우리 사회의 높은 지위는 통상 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는 데서 시작된다. 대학입시, 대기업 입사시험, 국가고시…. 그런데 이 시험의 당락은 통상 몇 점 차이로 갈린다. 0.5점과 1점 사이에 무수한 학생이 몰려 있다. 그런데 쟤는 떨어지고 나는 붙었다. 다시 말해 내 합격은 다른 이들의 ‘희생’ 위에서 이뤄진 것이다. 실력 차이가 크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다. 당락권에 있는 이들의 실력은 고만고만하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를 알아야 한다.”



-특혜를 받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1983년 버마 아웅산 사태 때 사망한 서석준이라는 대학 동기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때 마흔이 채 안 된 나이로 경제기획원 장관이 됐다. 장관 취임 때 내가 물었다. 어떻게 젊은 나이에 장관이 됐냐고 묻자 ‘우리 부서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정말 많다. 내가 된 건 정말 운이 좋아서다’고 하더라. 그의 대답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자신이 특혜를 받았다는 걸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송복 교수는 인터뷰 중 『논어』와 『맹자』에 나오는 글귀들을 쓰며 특혜받은 상층 사람들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민제 기자



생각에 잠긴 송 교수는 갑자기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그는 하얀 A4용지 뒷면에 힘 있는 필치로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는 문구를 썼다.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다. 송 교수는 『논어』 『맹자』에 나오는 글귀들로 두 차례 서예전을 열기도 했다. “특혜를 받았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가장 중요한 책임이 이 4글자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가장 먼저 내 목숨을 내놔야 한다는 얘기다. 영국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이튼칼리지’ 졸업자 중 1,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이들이 비공식 기록으로 5000여 명에 달한다.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간 결과다. 영국은 그래서 지난 300년간 전쟁에 진 적이 없다. 이 덕분에 우리보다 더 갈등이 첨예하고 빈부격차가 생겨도 ‘헬조선’과 같은 자조가 나오지 않는다. 고위직층이 특혜를 받은 만큼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고위직층엔 이런 모습이 없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우병우 민정수석을 보고 떠올렸다. 내 자신과 내 가족을 위해 공부해 지금의 자리에 오른 전형적인 상층이다. 그런데 아무리 자신이 결백하다고 해도 나라가 이렇게 난리인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게 말이 되냐. 국민과 나라가 불러서 그 자리에 간 것이라는 소명의식, 자신이 특혜 받았다는 인식이 없어서다. ‘○피아’로 상징되는 전관 문제도 그렇다. 많은 소득과 권력을 향유했던 이들이 임기가 끝나고 나서도 또다시 그 특혜를 누리는 현관으로 머무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맹자』에 나오는 ‘탐위모록(貪位慕祿) 부주어행도(不主於行道)’에 딱 맞다. 자리를 탐하고 돈을 그리워하니 도리에 맞는 행위를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에겐 존경받는 상층이 없나. “있다. 멀리는 신라의 상층이 있다. 황산벌 싸움에서 단기필마로 백제군에 뛰어든 화랑 관창이 대표적이다. 신라는 상층에 이렇게 목숨을 던지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삼국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다. 가깝게는 산업화 시절 초기에도 있다. 당시 고위직 관료들은 국가를 위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근대화를 이뤄냈다. 상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역사를 바꾼 동력이 나왔던 시기다.”



-변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정치제도를 바꾸고 좋은 대통령을 뽑아도 지금은 한계가 있다. 포퓰리즘과 저성장으로 인해 정치에서 역사적 동력을 찾기는 힘든 시대가 됐다. 그보다는 상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동력을 찾아야 한다. 앞서 말한 국가 위기에 목숨을 내놓는 것이 첫째다. 둘째는 불평등이 심할 때 기득권을 내려놔야 한다. 셋째는 평상시에는 갑질하지 말고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양보해야 한다. 특혜를 받는 이들이 무한책임을 지게 된다면 이를 중심으로 우리는 역사적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이 시대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특혜와 책임 송복 지음 가디언



송 교수는 서울대 정치과를 졸업하고 75년부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한 우리 사회 대표적인 1세대 사회학자다. 『조직과 권력』 『열린 사회와 보수』 등 7권의 저서와 학술논문 80편을 펴냈다.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는 한 학기 동안 한 노트 필기를 학기 말에 체크해 학점에 반영하고 출석을 엄격하게 점검해 ‘깐깐한 교수님’으로 통했다. 2001년에는 1년여간 중앙일보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했다. 2002년 퇴직 후에는 명예교수로 활동하며 다양한 강연 활동 등을 하고 있다. 제자인 전상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선생님이 국내에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을 대중화시켰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이번에 펴낸 책 『특혜와 책임』이 마지막 저작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내 나이가 팔순이다. 머릿속엔 아직 3권 이상의 책 구상이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책을 내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이번 책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냈다. 이 나라의 변화가 절박하다는 생각에 상층이 변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한 시간 반 넘는 인터뷰 시간 내내 송 교수는 나라 걱정을 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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