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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 된 오늘 추억

원래 이 글은 벚꽃이 활짝 핀 봄에 쓰려고 했다. 늦어도 초여름에는 썼어야 했는데 끝없이 최고온도의 더위를 갱신하는 더위, 폭염의 한여름을 통과하며 쓰고 있으니 철없는, 철모르는 글이 되어버렸다.



지난봄, 벚꽃이 마치 전등을 켠 것처럼 환하게 핀 저녁에 나는 아내와 함께 중앙공원을 걸었다. 그날은 벚꽃이 절정에 이른다는 주말 저녁이라 봄밤의 흥취를 만끽하려고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날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아마 두 아들의 진로, 양가 부모님의 건강, 그리고 우리의 노후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잠시 벤치에 앉았을 때는 벚꽃 핀 봄밤이었으므로 잇사의 하이쿠 이야기도 했다.



김상득의 행복어사전

“밤에 핀 벚꽃 오늘 또한 옛날이 되어버렸네.”



아내가 말했다. 오늘 또한 옛날이 되어버렸다는 이 표현이 참 절묘해요. 오늘 또한 옛날이 되어버렸네.



나는 이명세 감독의 영화 ‘지독한 사랑’을 떠올렸다. 영화 ‘지독한 사랑’, 당신도 봤지? 강수연 씨랑 김갑수 씨가 주연한 영화인데, 하도 오래전에 본 영화라 줄거리는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거기 이런 장면이 나와. 서로 사랑하는 여자와 남자는 바닷가 셋방에서 살림을 차리고 살았는데 어느 날인가 결국 헤어져야 하는 때가 오자 근처의 산으로 소풍을 가는 거야. 이별 기념으로 말이야. 그런데 그때까지 총천연색이던 화면은 그 소풍 장면에서만 흑백으로 바뀌는 거야. 소풍이 끝나면 다시 원래의 컬러 화면으로 돌아오고. 영화를 볼 당시에는 예사로 넘겼는데. 아마 두 사람은 세월이 흘러도 그날의 소풍을 잊지 못하고 추억하겠지. 두 사람은 그것을 알고. 그러니까 그 소풍은 기념사진 같은 거지. 먼 훗날에도 꺼내보며 지금을 떠올릴 흑백기념사진. 두고두고 기억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특별한 오늘이 있고 그런 오늘은 옛날이 되어버린다. 잇사의 하이쿠에 나오는 오늘처럼.



아내가 말했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반과거 시제’ 같아. 베르테르가 로테네 과수원에서 나무에 올라가 과일을 따 로테에게 주는 장면을 쓴 문장을 두고 『사랑의 단상』에서 반과거 시제라고 했어요. 베르테르는 현재시제로 말하지만 그건 이미 추억의 소명을 지닌 것이라고. 그러니까 추억의 소명을 지닌 오늘은 옛날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오늘도 옛날이 되어버릴 텐데 우리도 기념으로 사진이나 찍어요.



나는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결국 사진 속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핑계를 댄다. 요즘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너무 많은 사진을 찍어. 밥 먹기 전에도 찍고 커피 마시면서도 찍고 사람을 만나도 찍고 혼자 있어도 찍고 화장실 가서도 찍고 매일매일 하루에도 수십 번 사진을 찍는다니까. 당신 말대로, 아니 바르트 말대로 하면 모든 순간이 반과거가 되는 거야. 모든 순간이 추억의 소명을 지닌 특별한 순간이, 옛날이 되어버리는 오늘이 되는 거지.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어느 순간도 추억이 되지 않는 거야. 너무 많은 특별한 순간은 한 순간도 특별하지 않거든. 추억의 소명을 지니는 게 아니라 추억의 소멸을 지니는 거지.



그래서 안 찍겠다는 거야?



아니, 찍어야겠지. 찍을 게.



열대야 때문에 밤새 잠을 설치던, 어서 오늘이 옛날이 되어버렸으면 하고 바라던 며칠 전 휴대전화기에서 그날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았다. 내친김에 책장에서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도 찾아보았다. 그날 아내가 말했던 부분은 이랬다.



““우리는 찬란한 여름을 보내었다네. 나는 주로 로테네 과수원에 가서 과일을 따는 긴 장대를 들고 나무에 올라가 꼭대기의 배를 따고, 그러면 로테는 밑에서 그걸 받는다네.” 베르테르는 현재 시제로 말하고 이야기하지만, 그 정경은 이미 추억의 소명을 지닌 것이다. 이 현재 뒤에서 반과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리하여 어느 날인가 내가 그 장면을 회상하게 될 때면, 나는 과거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 사랑의 정경은 처음의 황홀했던 순간처럼 뒤늦게야 만들어진다.”



아내는 평소에도 예쁘지만 웃으면 더 예쁘다. 나는 평소에도 화난 것 같지만 웃으면 더 화난 사람 같다. 벚꽃 핀 봄밤에 찍은 사진 속에서 아내는 환하게 웃고 나는 화나게 웃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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