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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 요약(59)

금강 전경. 성호 이익은 “금강 물길은 개경과 한양을 감싸지 않고 굽은 활처럼 등지고 흘러 술사들이 말하는 ‘반궁수(反弓水)’ 형상이라 고려가 이 지역 인물의 등용을 금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앙포토]



 



[수험생과 부모가 함께 보는 NIE] -59- 훈요10조

?‘훈요십조(訓要十條)’는 고려 태조 왕건이 숨지기 한 달 전인 943년(태조26) 4월에 직접 작성한 문서이다. 글자 그대로 ‘교훈이 되는 10가지 조항의 중요한 정책’이라는 뜻의 훈요십조는 고려 왕조가 존속한 500년 내내 중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하나의 기준과 근거로 활용되었다. 즉 고려 왕조 통치 강령이며, 오늘날 헌법에 준할 정도의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데 훈요십조는 왕건이 지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약 100년이 지난 현종 때(1010~1031년 재위) 현종의 측근인 경주 출신의 신라계 정치인 최항(崔沆)이 작성했다는 주장이 있다. 1918년 일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제기한 ‘훈요십조 위작설’이다. 이마니시는 “태조의 훈요십조는 병란으로 소실되었는데, 최제안(崔齊安)이 최항의 집에서 그것을 얻어 임금에게 바쳐 세상에 전해졌다”(『고려사』권98 최제안 열전)는 기록을 근거로, 최항의 집에서 발견된 훈요십조는 최항의 작품이라 했다.



최항은 최언휘의 손자이다. 최언휘는 경주 출신으로 당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급제한 뒤 귀국했다. 당시 중요 기록은 모두 최언휘의 손을 거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왕건의 핵심 참모였다. 또한 최항은 태조에서 목종까지 일곱 국왕의 실록인 7대 실록의 편찬 책임자였다. 이 7대 실록은 1011년(현종1) 거란의 침략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이 최항이 경주 출신의 신라계 인물로서, 후백제에 대한 나쁜 감정 때문에 훈요십조를 조작했는데, 당시 실록 편찬자가 최항의 가짜 훈요십조를 태조의 것으로 잘못 알고 역사책에 기록했다는 게 이마니시의 주장이다. 그러나 최항의 훈요십조 조작 여부를 떠나 등용 금지 지역을 전라도로 본 이마니시의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주장을 받아들여 위작설을 제기했다.



성호 이익은 전주 출신인 이성계의 조상들이 함경도 여진 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등용을 금지한 훈요십조 때문이라 했다. 또한 이 지역 인물의 등용을 금지한 것은 풍수지리설을 유포한 도선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 했다. 그는 다른 글에서 금강의 물길은 개경과 한양을 감싸주지 않고 굽은 활과 같이 등지고 흘러 술사들이 흔히 말하는 반궁수(反弓水) 모양이라서, 등용을 금지한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성호사설』권3 天地門 ‘漢陽’조).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한 이중환(李重煥·1690~1752)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중환은 성호 이익의 ‘반궁수’론을 이어받아 금강의 물길이 거꾸로 흐르는 배류수(背流水)라고 덧붙이고 있다. 참고로 섬진강·영산강·낙동강도 그러해서, 우리나라 3대 배류수에 해당한다(『고려사』 지리지 양주(梁州·*양산)조 참고). 그런데 하필이면 금강만 배류수로 본 것일까? 등용 금지 지역을 전라도로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익과 이중환처럼 볼 경우 이 지역(금강)에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 지역도 포함된다. 전라도로 국한한 사실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마니시는 이들의 잘못된 주장을 빌려 위작설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문제삼은 훈요10조 중 8조를 다시 읽어보면, 금지된 대상은 특정 지역이 아니라, 삼한 통합에 반감과 원한을 가진 사람이다. 반감을 품은 사람들의 지리적 범주를 ‘차령 이남, 공주 밖’으로 에둘러 표현한 것뿐이다. 현재 학계는 굳이 지역을 따지자면, 통합전쟁에서 고려에 가장 저항이 심했던 후백제 수도인 전주를 포함해 공주 홍성(당시 운주) 지역 정도로 보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 가운데 통합에 반감을 가진 사람의 등용을 금지하려 했던 것이다. 1011년(현종2) 거란의 침입으로 태조에서 목종까지 일곱 국왕의 실록과 함께 많은 기록들이 불탔다. 이 속에 훈요십조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고려는 1013년 9월 소실된 일곱 국왕의 실록을 다시 편찬하기 시작해, 1034년(덕종3) 일곱 국왕의 7대실록 36권이 완성된다.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발견한 훈요십조도 실록 편찬을 위한 자료 수집 과정에서 발견돼 새로 편찬된 『태조실록』에 수록된 것이다. 고려 후기 역사가 이제현은 훈요십조를 ‘신서십조(信書十條)’라 했다(『익재집』권9 ‘충헌왕세가’). ‘신서(信書)’는 글자 그대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글로, 친서이자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공개할 수 없는 사신(私信)을 말한다. 훈요십조의 특성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즉 훈요십조는 공식 문서가 아니라 국왕이나 그 측근 관료들 사이에 비전(秘傳)된 통치의 지침을 담은 내부용 문서다. 약 100년이 지나 다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역사 자료로 공개된 것이다.? 최항은 천추태후의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 왕위에 오른 현종을 옹립한 인물이다. 그는 현종이 즉위한 뒤 현종의 스승과 재상을 역임한 측근이다. 그는 국왕들에게 전해 내려온 훈요십조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목종은 죽기 직전 최항에게 신왕 현종을 보좌할 것을 부탁했다. 이때 왕실에 전래된 훈요십조를 현종에게 전하라는 부탁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 7대실록 편찬 책임자인 최항의 집에서 훈요십조가 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훈요십조를 조작할 이유는 없었다. ?흥왕사는 ?덕수현(德水縣)?이라는 하나의 현을 옮기고, 그곳에 짓기 시작해 12년 만인 1067년(문종21)에 완공된 고려시대 최대 사찰의 하나다. 건립을 주도한 문종에 대해 관료집단은 크게 반대한다. 재상 최유선(崔惟善)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 태조 신성(神聖)왕의 훈요십조에, ‘국사 도선이 국내 산천의 순역(順逆)을 관찰하여 사원을 세울 만한 곳에 짓되, 후세의 국왕 및 공후(公侯) 귀척(貴戚) 후비 신료들이 다투어 사원을 지어 지덕을 훼손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폐하의 고려는 선조의 업을 이어받아 오랫동안 태평한 상태입니다. 비용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성대한 운세를 지켜 후세에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백성의 재산과 힘을 소비하여 불필요한 일에 허비하여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십니까.”(『고려사』권95 최유선 열전) 최유선은 신라가 함부로 사원을 지어 지덕을 훼손해 망했다는 훈요십조 2조에 근거해 문종의 흥왕사 건립에 반대한 것이다. 훈요십조는 이같이 국왕의 정치를 비판하거나, 주요한 정치 현안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 많이 인용됐다. 이런 사례는 많이 찾을 수 있다. 고려 당대인도 훈요십조를 사실로 믿었다는 증거다. 훈요십조는 이같이 일종의 헌법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를 위작으로 몰아간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고려 역사의 출발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위작설에서 제기된 지역 차별에 관심을 갖고, 그런 차별의 역사적 근거를 훈요십조의 8조에서 찾는 경우가 없지 않다. 지역 차별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과 결합되어 훈요십조를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인데, 학계 연구 성과의 축적으로 8조는 지역 차별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임이 판명되었다.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에 있는 서희(942~998) 장군 부부의 묘. 그가 숨진 998년(목종 1년) 조성됐다.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됐다. 조용철 기자



 



고려의 6대 국왕 성종(成宗·981~997년 재위, 960~997년)에 대해 고려 후기 유학자 이제현은 성종이 고려 종묘와 사직의 완성, 인재의 양성과 발탁, 민생의 교화와 안정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현군(賢君)으로 평가했다. 경종은 재위 6년 만에 숨졌다. 광종의 무자비한 숙청에 피해를 본 세력이 여전히 조야에 포진하고 있어 광종의 개혁정치는 실종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성종은 광종의 정치를 계승하여 고려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17년 재위 기간 중 거란과 전쟁까지 치렀지만, 성종은 고려의 역대 국왕 가운데 ‘어진 군주(賢主)’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치세술(治世術)은 무엇일까?



우선 성종은 즉위 직후 언로(言路)를 개방했다. 5품 이상 모든 관료에게 현안에 대한 의견을 올리게 했다. 그 가운데 성종의 귀에 거슬릴 정도로 성종을 비판한 28가지 조항의 최승로(崔承老)의 시무상소가 전해지고 있다. 시무상소에서 최승로는 광종의 개혁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경주 출신의 신라계 유학자인 최승로는 광종이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과, 과거를 통해 발탁된 신진세력에 의존해 개혁을 하려다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개혁을 주도할 만한 인재가 부족해 개혁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호족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옛 신라와 후백제 출신의 유교 정치가들도 광종 개혁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보고 익힌 뒤 귀국해 태조 때 중용되어 크게 활동했다. 그런데 광종은 이들을 배제하고 쌍기와 같은 중국계 귀화관료를 중용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했다. 최승로는 그러한 광종의 정치를 비판한 유학자의 대표격이다.



즉위 직후 광종의 정책을 계승하려던 성종에게 최승로는 마뜩찮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이같이 비판적인 인물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광종이 추구한 화풍정책의 한계를 보완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한 것이다. 군주들이 언로를 열다가도 따가운 비판에 마음을 닫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성종은 끝까지 마음을 열어 신하들의 비판을 듣고 정책에 반영했다. 인적 청산에 치중한 광종과 달리 성종은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고려의 법과 제도를 완성했다. 즉 최승로 계통의 ‘화풍파’(중국 문물 도입을 주장하는 유학자 집단) 관료들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3성6부와 같은 정치제도 및 2군6위와 같은 군사제도를 완비했다. 또한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가 직접 지방을 지배하도록 행정제도도 개혁했다.



성종 재위 중 최대 위기는 993년(성종12) 거란의 고려 침입이다. 조정에선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이른바 ‘할지론(割地論)’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서희(徐熙)는 “적과 만나 그들의 의도를 살핀 뒤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성종을 설득했다. 이어 서희는 직접 거란 진영을 찾아가 사령관 소손녕과 담판했다. 그는 거란의 고려 침입이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데 있음을 파악하고 관계 단절의 대가로 압록강 이동 지역을 확보했다. 서희는 화풍을 강조한 유학자 출신의 관료집단과 달리 고려의 전통문화를 강조한 인물이다. 고려 고유의 전통문화를 당시엔 ‘토풍(土風)’ 혹은 ‘국풍(國風)’이라 했다. 서희는 국풍파의 대표격이다.? 성종은 즉위 직후 서희와 같은 고려의 전통을 중시하는 관료집단을 개혁정치의 또 다른 우군으로 끌어안아 서희에게 오늘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관어사(兵官御事)의 벼슬을 내렸다. 성종은 자신과 가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훌륭한 재목이라면 발탁하여 미래 정치의 자산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서희와 같이 거란의 침입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왕조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성종은 이념 성향이 다른 인물들을 써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든, 독특한 인재 등용책을 구사한 군주였다. 그렇다고 다양한 세력의 틈바구니에 휘둘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능한 군주도 아니었다. 그는 호족 중심의 낡은 정치와 관료 시스템을 물갈이하려 했던 광종의 개혁을 완성하는 것을 통치의 목표로 삼았다. 화풍정책을 계승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함으로써 고려의 정치·경제·군사 제도를 개혁해 왕조의 체제를 새롭게 하려 했다. 인적 청산에 집중했던 광종과는 이런 점에서 달랐다. 위기의 시대에 소외된 정치세력은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종은 이런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여 실천했다. 화풍 성향의 유교 관료집단과 국풍 성향의 관료집단을 함께 끌어안는 조화와 균형의 리더십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나라 안팎에 현안이 발생하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왕조의 면모를 일신시켜 나갔다. ‘성종’이란 칭호에 걸맞은 군주였던 셈이다.?



 



- 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제321호 2013년 5월 5일, 제328호 2013년 6월 23일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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