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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문학상] ⑤ 미당문학상 예심위원들의 릴레이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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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들이 흔히 말하는 시적 성취나 역량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잣대에 의해 가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사’라는 제도적 절차를 수행한다고 했지만) 1년 간 시인들이 쏟아낸 말들을 듣고 읽는 시간은 작품들의 우열을 가리고 평가하는 자리라기보다는 그들이 겪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고뇌에 동참하는 경험에 가까웠다. 우리가 살펴본 시인들 중에는 등단 후 충실하게 시적 세계관을 다져와 어느덧 자신의 미학적 견고함을 증명하는 단계에 이른 이도 있었다면, 상대적으로 대중 독자에게는 생소할지라도 지금 쓰고 있는 텍스트들이 향후 구축될 자신의 시적 세계의 윤곽을 미리 예감하게 만들어주는 이의 것도 있었다. 우리의 심사 독회가 객관적인 공정성을 만족시킬 것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제도로서 수여되는 이 상이 양자의 경우를 모두 격려하는 데 공평하게 기여하기를 바는 마음으로 10명의 시인들을 본심 대상작으로 선정할 수 있었다.

시단의 경향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흐름은 아무리 그럴 듯해 보이더라도 대개 허구이거나 제도적 요청으로 인해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가상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시를 읽어나가다 보면, 경향이라는 말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흐름과 리듬에 시인들이 자신의 언어를 온전히 내맡기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흘렀어도 가시지 않는 죄책감, 살아남은 자의 수치심을 바탕으로 현실을 감각하는 이들의 언어는 우리의 삶이 특정한 시간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잔인했던 봄의 생생한 고통으로부터 끝내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일종의 비망록이었다. 시야말로 매번 새롭게 시작하는 미학적 정신을 상징하는 장르라고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시는 고통의 밑자리라는 동일한 시공간에 계속해서 머무른 채 다른 삶에 대한 희망을 모색하려는 예술적 의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차후에 좀더 소상하게 적을 기회가 있겠지만, 본심 대상으로 선정된 시인들 가운데 내가 평을 곁들이기로 한 두 명의 시인도 이러한 희망의 원천을 사수하려는 특별한 노력과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최근에 김행숙이 써내려간 시는 망각으로 봉인된 시간을 소환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상실된 타인의 삶과 기억을 우리의 존재 곁으로 불러오게 하기 위해 그가 탐색하는 영역은 무의식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김행숙이 말하는 무의식이라는 영역이야말로 시가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오래된 희망의 영토일 것이다. 한편 손택수의 시에서는 일상의 세목들에 대한 겸허한 통찰들이 특유의 서정적 긴장과 절묘한 조화를 이끌어내며, 삶에 대한 깊은 긍정에 도달하는 장면들이 돋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순박한 낙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소박하지만 단단하게 생을 응시하는 그의 고요한 시선은, 때로 긍정이야말로 세상의 주변부에 놓여 있는 보이지 않는 삶의 조각들을 독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낙관과 희망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원래 하나가 아니다. 때로 희망은 구체적 낙관의 근거를 상실했을 때 더욱 빛나기도 한다. 낙관 없는 희망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은 폐허와 같은 삶 속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이들로부터 본능적으로 샘솟는 새로운 삶에 대한 충동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이 충동은 연대를 향한 우리의 본원적 갈망을 뜻하기도 할 것이다. 소중한 누군가를 상실했을 때, 그리고 그 상실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우리 공통의 비극이라는 점이 인지될 때 폐허는 그 자체로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희망의 터전이 되기도 한다. 더불어 있음, 또는 함께 있음이라는 감각은 우리가 특수한 집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사회의 불완전함이 상실을 통해 드러날 때 기적처럼 출현한다. 그럴 때마다 시는 공통의 상실을 언어의 온몸으로 기록으로써, 우리 각자가 연옥과 같은 삶 속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고통을 쇠줄 삼아 비극의 심연으로부터 진실을 인양하려는 시인들의 언어적 사투야말로 견고하게만 보이는 이 시대의 장벽에 균열을 낳고, 마침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는 희망의 원천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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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호=1984년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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