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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토끼냐 산토끼냐, 오도가도 못하는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불법 이민 대책을 놓고 딜레마에 직면했다. 자신의 충성층인 보수 백인 유권자들을 지키려면 반이민 정책을 밀어붙여야 하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 소수 인종으로 지지층 확장에 나서려면 이민 정책을 완화해야 한다. 집토끼 백인 지지층과 산토끼 히스패닉 유권자 사이에서 교집합을 찾기 어려운 불법 이민 문제를 놓고 트럼프는 22일(현지시간) 애매한 답변을 내놨다. 트럼프는 이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불법 입국자들을 다룰 때는 매우 단호하고 강력해야 한다. 나는 표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불법이민 대책은) 단호해야 하며 공정해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트럼프가 무조건적인 강제 추방을 완화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공정’과, 추방 고수를 예고하는 ‘단호’를 동시에 거론하자 여러 해석이 나왔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가 1100만 명의 불법 체류자를 어떻게 할지 고심하고 있는 게 공개적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는 공정한 대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강력한 대응을 주장했다. 캠프는 트럼프가 이민 정책을 바꿀지 여부를 놓고 상충하는 신호를 내보낸다”고 전했다.

대선 후보에까지 오른 트럼프의 대표 상품은 ‘멕시코 장벽’이다. 그는 멕시코 불법 이민자를 성폭행범으로 몰고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겠다는 초현실적 공약을 내걸어 백인 보수층의 마음을 잡아챘다. 그러나 지지율 추락으로 위기를 맞자 지난주부터 유세 현장에서 히스패닉ㆍ흑인 등에 구애하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20일엔 히스패닉 대표단까지 만났다. 이에 미국 언론은 트럼프가 오는 25일 콜로라도주 유세 때 완화된 이민 정책을 발표한다고 일제히 전했다. 하지만 트럼프 캠프는 이날 “25일 발표는 없다”고 수정했다.

ABC 방송에 따르면 트럼프가 이민정책 발표를 연기했다.

불법 이민자 추방 조치 완화는 트럼프에겐 뇌관이다. 산토끼 히스패닉의 마음을 돌리려다 집토끼 백인 보수층의 이반을 부를 수 있다. WP는 “불법 이민에 대한 격한 반대가 트럼프가 (유권자들에게) 먹힌 핵심”이라며 “강제 추방 조치를 조금이라도 바꾸거나 완화했다가는 보수 지지층을 분노케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민자들에 대해 가장 적대적이다. 미 공공종교연구소(PRRI)가 지난 6월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이민자 때문에 범죄가 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트럼프 지지자(68%)-공화당 지지자(57%)-무당파(39%)-민주당 지지자(24%)의 순으로 동의했다. ‘불법 이민자를 강제 추방해야 한다’를 놓고도 트럼프 지지자(41%)가 가장 많이 호응했고 공화당 지지자(29%), 무당파(21%), 민주당 지지자(11%)로 찬성 비율이 떨어졌다. 한 달 후 NYTㆍCBS뉴스 여론조사에서도 트럼프 지지자의 51%는 ‘소수인종을 과도하게 대우하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의 49%는 ‘너무 적게 대우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트럼프로선 백인 지지층에게 배신감을 주지 않으면서도 히스패닉을 달랠 묘수를 찾는 게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트럼프는 대신 클린턴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클린턴의 고질병인 ‘클린턴 재단’과 ‘e메일 스캔들’이 다시 도지고 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저널(WSJ)에 따르면 클린턴의 국무장관 재직 시절 클린턴 재단 인사가 고액 기부자인 바레인 왕세자와 클린턴의 면담을 추진했다. 이는 해외 인사가 돈을 내고 현직 국무장관과 비선으로 접촉하려 한 게 된다.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공직 윤리상 논란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재단 측은 다른 고액 기부자의 청탁을 받아 영국 축구계 인사의 비자 발급도 주선하려 했다.

이 같은 청탁 e메일이 공개되자 트럼프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법망을 피해 왔다”며 “재단은 당장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특별검사를 임명해 재단을 수사해야 한다고도 요구했다. 재단 논란이 재점화하는 가운데 WP는 연방수사국(FBI)이 클린턴이 국무장관 때 사설 e메일 서버를 통해 주고 받은 e메일 1만4900건을 추가로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e메일이 공개될 경우 내용 여하에 따라 소멸해가던 e메일 스캔들이 다시 불거질 수 있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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