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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김녕만 윤세영의 따뜻한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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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숭이인 채 흐른 수박 국물이 덕지덕지 한 온몸,

손에 든 제 입보다 훨씬 큰 숟가락,

머리에 쓴 수박껍질이 지나온 시간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슬픈 듯 한데도 웃음이 나는 절묘한 사진이었다.

이른바 해학이었다.

여느 사진에서 볼 수 없었던 해학,

보자마자 그 사진이 내 가슴에 박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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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진을 본 게 사진기자로 막 자리잡을 무렵이었다.

한참 사진에 맛들여 이 책 저 책 마구잡이로 볼 때였다.

내 책도 아니었다.

선배의 책상에 올려져 있던 책을 무심코 들춰보다 보게 된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찍은 이의 이름이 김녕만이었다.

그는 일면식도 없었던 다른 신문사의 사진기자 선배였다.

그 후로 한번은 만날 줄 알았건만 묘하게도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가 사진기자를 그만둘 때까지도 그랬다.

 
하나 그 사진의 만남은 지독했다.

사진기자로 살면서 내내 가슴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슬럼프가 오거나 아이디어가 막히면 그 사진을 떠올렸다.

웃음이 절로 나며 난데없이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다.

고백하자면 지금껏 나를 이끌어준 사진 한 장이 바로 그 사진이었다.

내 삶과 동행해 온 사진 한 장이 바로 그것인 게다.

 
그가 기자를 그만두고 월간 사진예술 발행인을 할 때야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되었다.

2012년 뜬금없이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며 전화가 왔다.

“열화당에서 내 사진문고가 나올 예정인데 혁재가 꼭 좀 찍어줬으면 해”

무엇보다 반가운 전화였다.

열화당의 사진문고 시리즈는 대가가 아니면 꿈도 못 꾸는 것이었다.

 
언젠가 몇몇 사진가들과 토론을 하며 내가 이런 말을 한 적 있었다.

그의 얼굴조차 모를 때였다.

"김녕만의 해학은 세계적인 것입니다. 세상 어떤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그만의 시선이 있습니다. 사진계가 지금이라도 그의 사진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열화당 사진문고는 김녕만의 해학이, 김녕만의 휴머니즘이 비로소 제대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했다.

그러한데 그 책에 들어갈 당신의 사진을 내게 청했으니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만나서 사진을 찍기 전에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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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하고 정미소에 놀러 갔다가 팔을 심하게 다쳤어. 병원에 누워서 신문을 보다가 사진 한 장에 감동을 받았지. 그때 나도 저런 사진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어.”

꿈의 시작은 1968년 신문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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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해에 ‘고창읍성 축성연대 찾기’ 공모가 있었어. 아픈 몸으로 고창에서 서울 국립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퍼즐 찾듯 단서를 찾았지.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등의 자료를 뒤졌지. 그러다 ‘단종원년(1453년)이라는 단서를 퍼즐맞추듯 찾은거야. 그래서 상금을 받았지. 그 돈으로 상경하여 사진학원을 다니고, 군청 공보실에서 사진담당으로 일하게 되었어.”

그는 그 일로 기록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사진으로 뭐든 기록을 해두는 게 훗날 역사가 되리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 후 그는 사진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대학진학을 했다.

도저히 진학할 형편이 아니었지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던 형수의 권유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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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도 없던 고창 촌놈이 사진과에 들어간겨. 무리해서 입학은 했지만 가난한 처지라 매 학기 등록금이 문제였어.
카메라는 어찌어찌 빌리고, 그 사진을 공모전에 응모하여 받은 상금으로 겨우 등록금을 만들었지.
4년 내내 그랬어. 상금 타려 대학 다닌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었지만 내 입장에선 배부른 소리였어.
결국 카메라가 내 밥줄이었던겨. 지금도 난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못해.
카메라와 내가 한 몸일 때, 진짜 김녕만이 존재하는 것이여.”

그는 사진이 밥줄이었다고 힘주어 말했지만 나는 그 자신이 카메라 그 자체이고 사진이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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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그의 출판기념회에 갔다.

많은 그의 지인들 앞에서 나는 고백을 했다.

수박껍질을 머리에 쓴 그 사진을 여태껏 품고 살아 왔노라고.

몇 달 후였다.

사무실에 있으면 잠깐 앞으로 나오라는 전화가 왔다.

나갔더니 월간 사진예술 편집장인 그의 아내 윤세영과 함께였다.

뭐가 그리 급한 듯 운전석에서 내리자마자 사진을 내게 안겨주었다.

엉겁결에 받고 당황해 하는데 조수석의 윤세영 편집장이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선 부리나케 가버렸다.

속에 품고 살아왔던 바로 그 사진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한참을 그 사진만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게도 여느 때와 달리 웃음 대신 눈물이 났다.

나를 웃기고 울리는 건 그의 사진뿐 만 아니었던 게다.

김녕만이란 사람, 그 자체도 그랬다.

게다가 옆에서 빙긋이 웃고만 있던 윤세영 편집장 또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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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이었다.

이 부부는 그간 함께 만들어 왔던 월간사진예술을 다른 이에게 물려 주었다.

사진계에서는 이 사실이 화제였다.

흑자인 상태로 26년의 역사를 물려줬으니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왜 그리했는지 이 부부에게 물었다.

“이명동 선생에게 우리가 물려받았듯이 이 잡지를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이기명씨에게 대물림을 하는 게지”

이 부부의 아들 또한 사진가다.

이명동 선생의 자제가 사진가인데도 그리했듯 똑같이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은 게다.

만약 윤세영 편집장의 동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게다.

부창부수였다.
 

이 부부, 참 유별나기로 정평이 나있다.

같은 신문사 동료로 처음 만났다고 했다.

결혼식과  사진전을 함께했다.

윤 편집장은 예물로 '고향'이라는 사진집을 만들어 줬다. 

결혼 25주년엔 아내가 쓴 글을 보고 남편이 사진을 붙여 산문집을 출간했다.

월간 사진 예술을 맡아 함께 취재하며 글 쓰고 사진을 찍었다.

일까지 함께하며 사석에도 언제나 같이 나타났다.

‘함께’라는 의미를 제대로 보여 주는 부부였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말했었다.

“이 부부와 부부동반으로 만난 후 돌아가면 꼭 부부싸움을 하게 됩니다.”

그 후로도 숱하게 이런 말을 들었다.

마치 가슴에 품고, 머리에 이고 사는 듯한 모습이니 수많은 부부싸움을 유발시키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이 부부의 사진을 그렇게 찍어 두었다.

가슴에 품고 머리에 인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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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전, 이 부부와 만났다.

그들이 책을 꺼내 놓았다.

책 제목이 ‘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이었다.

그녀가 2013년 1월부터 지난 6월까지, 3년 반 동안 모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엮은 책이었다.

매주 목요일이면 가능한  ‘따뜻한 동행’을 챙겨 본 터에 연재를 마치게 되어 아쉬웠던 참이었다.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20여 년 전, 남편이 청와대 출입기자일 때의 일이다. 해외 출장을 떠났는데 비행기에서 전화가 왔다. 결혼기념일의 딱 그 시간이었다. 그날 전화를 연결해 준 이는 비행기의 사무장이었다. 20년이 지나 정년 퇴임을 앞둔 사무장이 마지막 비행을 마치고 오는 날, 우리 부부는 꽃다발을 들고 인천공항으로 달려갔다.’

‘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은 ‘김녕만과 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일 것이다.

그들의 ‘사람 살이’, ‘세상 살이’와의 동행이 따듯한 이유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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