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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의 상해 임시정부 망명 시도 성공했다면 대한제국 이어졌겠죠

이석 총재가 17일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황손의 집’ 승광재를 나서고 있다. 전주=오종찬 프리랜서


“왜 조선이 그렇게 힘 없이 망했나요? 고종 황제 할아버지를 친일파가 ‘무능한 임금’이라 불렀어요. 그게 첫째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왕조를 아주 격하시켜 버렸어요. 세계에 519년의 왕조 역사를 가진 나라가 없어요. 이걸 잊어가고 있어요.”


고종을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조선의 ‘마지막 황손’ 이석(李錫·75) 사단법인 황실문화재단 총재의 말이다. 그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義親王)의 12남9녀 중 10남이다. 고종이 낳은 9남 4녀 중 성인으로 자란 자녀는 순종과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된 영친왕(英親王), 의친왕, 덕혜옹주(德惠翁主) 3남1녀뿐이다. 고종의 고명딸이자 ‘마지막 황녀’였던 덕혜옹주는 이 총재의 고모다.


영화 ‘덕혜옹주’에 대한 역사 미화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17일 전북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황손(皇孫)의 집’ 승광재(承光齋)에서 이 총재를 만났다. 승광재는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황제 시절의 연호인 광무(光武)에서 ‘광(光)’자를 따고 잇는다는 의미의 ‘승(承)’자와 합쳐 ‘고종 황제의 뜻을 이어가는 집’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 총재는 이날 폭염에도 불구하고 전통 한복 차림을 하고 문화탐방객들을 향해 ‘조선 왕조 519년’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1 2004년 일본 황거 앞에서 ‘한일병합 무효’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이석 총재. 2 붓글씨로 사필귀정(事必歸正)을 쓰는 이 총재.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조카인 그는 지난달 30일 서울의 한 영화관에서 ‘덕혜옹주’를 관람했다. 시사회에 앞서 이 총재는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洪裕陵)에 있는 부친 의친왕과 덕혜옹주 묘를 참배했다. “8월 15일이 아버님 제사인데 미리 묘소를 갔습니다. 덕혜옹주 고모님 묘소가 (의친왕 묘에서) 10m도 안 떨어져 있어요. 거기에 절을 하고 신고를 했습니다.”


권비영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덕혜옹주’는 19일 기준 누적 관객 444만 명을 넘기며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에 자신의 혈육이 등장하는 이 총재의 감회는 일반 관객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106년 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망하지 않았다면 그는 2004년부터 자신이 머물고 있는 495㎡짜리 ‘민박형 한옥’ 승광재가 아닌 43만2703㎡의 ‘웅장한 궁궐’인 경복궁에서 왕족의 일원으로 대한제국을 다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배경 탓인지 그는 입헌군주제 개헌을 주장했다. 2006년 8월 그가 만든 황실문화재단에선 ‘조선 황실 복원 운동’도 펼치고 있다. 최근엔 전국에서 복원운동을 지지하는 ‘독립군’도 1만여 명 모았다고 한다. 다음은 이석 총재와의 일문일답.


-영화를 본 소감은.“내가 ‘덕혜옹주’ 영화를 만든 허진호 감독을 미리 만났어야 했습니다. 슬프게 망한 왕조라 무슨 특별한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퓨전 음식 같은 스타일이에요. 역사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되는데. 작은아버님 영친왕도 상해 임시정부로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어물쩍거리고 없어지고. 덕혜옹주도 좀 비참하게 대마도 도주(島主)와 강제 결혼했는데 첫날밤부터 매를 맞으셨대요. 거만하다고. 그래서 나중에 정신착란에다 치매까지 걸리셔서 돌아가셨는데.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실어주려면 속속들이 역사를 파고 공부를 한 다음 영화를 찍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을 해요.”


-덕혜옹주는 실제 어떤 분이었나요.“여성으로서 뭐라 그럴까 매력 있는 분이에요. 고종 황제께서 (덕혜옹주를) 늦게 보셨어요. 예순이 다 돼서. 그렇게 재롱을 많이 떠셨답니다. 창덕궁에서 재롱 떠시는 걸 보고 고종 황제께서 스트레스 다 풀고 그러셨다고 합니다. 일본은 공부시킨다는 명목으로 덕혜옹주와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리고 갔는데 방학 때도 돌려보내지 않았어요. 영친왕을 낳은 엄비(嚴妃)도 화병으로 돌아가신 거죠. 참 안타까운 역사입니다.”


-영화에선 영친왕이 상해로 망명하려 한 것으로 그리고 있어요. 이 부분이 실제 사실과는 다르다고 해서 논쟁이 일고 있는데요.“일본이 조선을 이렇게 침략한다는 것을 무마시키기 위해 영친왕을 마사코(方子·이방자) 왕비와 결혼시켜 유럽으로 해서 쭉 한 바퀴를 돌게 하는데 상해도 방문할 계획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거기에 고종 황제 할아버지께서 미리 (약혼녀로) 정해준 영친왕의 왕비인 민갑완 여사가 와 있었어요. 그런 것도 참 멋있었는데 영화에선 그걸 안 했더라고요. 그런 게 좀 아쉬웠어요.”


-만약 상해 망명이 성공했다면 왕실이 독립운동을 주도했을까요.“그렇죠. 아버님(의친왕)은 1919년 11월에 상해로 망명을 하려고 하셨어요. 그러다가 신의주 안동역 열차 안에서 일본 경찰에 잡히셨어요. 그때 영친왕이 상해 임시정부에 모셔지고 아버님이 망명에 성공을 했더라면 대한제국이 전승되는 거죠.” (의친왕은 망명에 실패한 이후 12년간 창덕궁에서 감금 상태로 지냈다.)


-형 이우(의친왕의 차남)에 대한 기억은.“그 형님은 상당히 민족의식이 강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일본 군인이 됐어도 일본말을 안 하시려고 했대요. 부대 내에서도. 정신병자라고 욕을 먹으면서도 일본말을 안 하시고 그러셨대요. 만주에서 독립군 말을 몰래 기르고 있었는데 일본이 전세가 이상하니까 일본으로 전출시켰어요. 그리고 일주일 만에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터져 돌아가셨어요. 그분은 아직 일본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있죠.”


-고국에 돌아온 덕혜옹주는 어떻게 생활했나요.“그땐 이방자 왕비가 살아계셨으니까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뒤 수강재(壽康齋) 건물에 사셨다고요. 복상궁이라고 하는 노인 한 분이 살아계셨어요. 그분이 덕혜옹주를 보살폈죠. 식구들이 쭉 앉아서 절을 하고 나면 못 알아보시는 거예요. 하늘만 보시고. 치매에다 정신착란이니까. 그리고 ‘고모님’ 하고 손을 잡으면 눈물이 주르륵 나고 그랬어요. 그러시다가 이방자 왕비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먼저 돌아가셨어요. 그게 89년 4월 21일이었어요. 그때 정상적 대화를 못 나눴어요. 작은아버지 영친왕도 서울 명동 성모병원에서 7년을 계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 평가한다면.“상해 임시정부를 만든 뜻은 좋았어요. 근데 거기엔 기둥이 없었어요. 그때 우리나라엔 왕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왕실에 신경 썼나요.“박 대통령은 우리가 사는 칠궁(七宮)에 생활비를 줬어요. 그때 이방자 왕비가 살아계시니까 한 달에 한두 번씩 청와대에서 접대를 했다고요. 왕실에 상당히 관심이 있었습니다. 프랑코(1892∼1975) 총통이 왕정을 만든 스페인으로 청와대 직원들이 가서 연구를 했다는 말도 들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왕실의 부활을 견제했나요.“이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영친왕을 못 오게 한 겁니다. 근데 밑에 정치조직이 없으니까 친일파를 데리고 정치를 한 거예요. 그래서 친일파가 역사 왜곡을 시켰죠. 왕조를 완전히 무너뜨린 거죠.”


-현 정부의 한·일 외교를 어떻게 평가하시나요.“위안부 문제는 그렇게 처리하면 안 됩니다. 일단 우리나라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선 일왕이 와서 종묘사직에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해야 됩니다. ‘조선왕조를 이렇게 짓밟아 놔서 미안하다’고요. 지금 살아 있는 할머니들이 그러잖아요. ‘돈 10억 엔이 문제가 아니다’고요.”


-한국은 어떤 권력 체제가 맞다고 보나요.“미국에서 돌아와서 26년째 ‘왕실 살리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있어도 왕실이 상징적으로 존재하는 체제가 필요해요. 그래야 국민의 정신이 모입니다. 정신적 지주가 있으면 국민의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상징적인 왕실을 만들기 위해 ‘독립군’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지금.”


-독립군 운동이 구체적으로 뭔가요.“2006년 전주에서 황실문화재단을 만들었어요. 처음에 시작할 때는 사람들이 신경을 안 썼어요. 역사가 왜곡이 돼서 ‘이가(李家)들 나라냐’고 한다고요. ‘이조(李朝), 이조’ 그러잖아요. 그게 잘못된 거거든요. 조선 왕조인데. 그래서 그때 만들어놨지만 활성화되지 않다가 한 2~3년 전부터 내가 강의를 전국적으로 하니까 사람들이 경청을 해줘요. 전국에 50개 지부를 만들어 회원을 받고 있어요.”


-입헌군주제 개헌이 필요하다는 건지.“대통령이 있어도 상징적인 왕실을 만들어 역사·문화·전통으로 삼는 거죠.”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실제 황제가 된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건지.“그건 말도 안 됩니다. 그런데 왕실이 없어진 지 100년도 안 됐어요. 아직 5대 궁이 살아 있으니까 상징적으로 살아 있는 왕손들을 거기에 살게 해야죠. 건물이라는 게 인간이 살아야 오래간다고 그러니까 왕조를 계속 연결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멋있는 나라, 전통의 나라를 다시 만들고 싶어요.”


-황손으로서 마지막 꿈이 있다면.“‘헬조선’은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를 그렇게 격하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가 있는 나라인데. 우리 신세대가 그러면 안 되거든요. 그래도 우리 조국인데. 우리나라는 똘똘 뭉쳐 통일만 하면 세계적으로 최고의 나라가 될 수 있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전통과 역사를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 신세대가 역사를 확실하게 알았으면 좋겠어요.”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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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