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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꼿꼿 선비, 중국인 마음 뒤흔들다

중국 싼먼현 우두외양. 이곳은 최부 일행이 표류 끝에 뭍으로 올라온 표착지다. 전민규 기자



“맞아요, 여기에 조선의 최부 선생이 묵고 갔어요. 동방의 마르코 폴로, 최부 선생이 묵었다는 사실은 우리 마을의 큰 자랑입니다.”



최부의 『표해록』 인문여행 -1- 부친상 귀향 중 표류

지난달 30일 중국 동남부 저장(浙江)성의 한적한 어촌 싼먼(三門)현 푸펑(蒲峰)촌의 35세 젊은 촌장 황웨이(黃偉)는 한국인 방문객을 맞으면서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어 아주 오랜 세월의 무게를 지닌 사당(祠堂)을 가리켰다. 528년 전의 아주 낯선 손님, 조선 선비 최부가 묵었던 절이었다. 아직도 그 건물은 일부가 남았고, 특히 최부의 저작에 등장하는 본채 건물은 그때 모습 그대로였다.



한국인도 대개는 낯설게 마련인 최부라는 인물이 왜 이곳에서는 뜨거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일까. 조선을 지배했던 성리학적 이념으로 완벽하게 무장했고, 그를 생활에 구현하는 데 지나칠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인물. 생사의 고비에서도 결코 제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던 사람. 그러나 함께 표류했던 42명의 동료에게는 아주 거북한 상황을 불렀던 성격의 소유자.



그는 사실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너무 자주 피웠다. 그 ‘말도 안 되는 고집’이란 차라리 목숨을 내놓을지언정 내가 믿고 따르는 바를 결코 허물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너무 완고한 태도를 보여 일행 전체가 큰 위험에 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최부의 최초 표착지인 저장 싼먼현이 그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최부 기념 도로의 표지판이다. 표지판에 적힌 금남(錦南)은 최부의 호다. 전민규 기자



목숨과도 바꾸지 않는 원칙528년 전의 현장인 싼먼에서 그의 기록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는 성종 18년(1487년) 도망친 인구의 수를 조사하는 임무를 받고 제주에 경차관(敬差官)의 직위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1월 부친의 부음을 들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말리는 여러 사람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배를 띄워 고향인 전남 나주로 급히 향하다가 표류를 시작한다.



식수가 떨어져 오줌을 받아먹으면서, 굶주림과 갈증에 생사를 조금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을 겪다가 결국 일행은 중국의 저장 해역에 당도한다. 표류 11일째였다. 중간 크기의 배 두 척이 다가왔다. 죽을 고비를 넘기는 표류의 역정 속에서도 최부는 상복(喪服)을 벗지 않고 있었다.



일행 중 여럿이 최부에게 상복을 잠시 벗고 가지고 왔던 관복(官服)을 입으라고 권유했다. 조선의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임을 다가오는 배의 사람들에게 보여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로써 ‘해적(海賊)’이라는 오해를 피해야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그러나 최부는 완강했다. “표류를 하면서 고생을 하는 것 모두 하늘의 뜻이고, 이곳에서 저들을 만나는 것도 다 하늘의 뜻이다. 그 하늘의 뜻을 어기고 어찌 구차한 짓을 할까”라며 일거에 일행의 요청을 뿌리치고 만다. 일행들로서는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중국인들과의 대화는 모두 필담으로 이뤄졌다. 그들은 재물을 요구했으나 표류선에 그런 금은보화가 있을 수 없었다. 잠시 물러갔던 그들은 밤중에 다시 들이닥쳤다. 이제는 완연한 해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최부의 배에 오른 그들은 값이 나가는 물건은 모조리 빼앗았다. 아울러 최부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칼질을 해가며 고문까지 한 뒤 최부 일행의 노와 닻을 훼손한 뒤 물에 빠뜨렸다.



그로부터 다시 3일을 표류한 최부의 배는 결국 표착지점인 저장 싼먼 앞의 우두외양(牛頭外洋)에 닿는다. 최부가 조선으로 생환할 때까지 일행과 최부, 또는 최부와 중국 관원 사이에서 늘 문제로 떠올랐던 것이 그가 걸치고 있던 상복이었다.



정확한 표착지점은 싼먼 현정부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바위 일부가 무너져 있었다. “일찍 알았다면 그 모습을 완전히 보전했을텐데, 안타깝게도 우두외양의 소머리를 닮은 바위 일부가 채석 때문에 무너졌다.” 싼먼 정부의 외사 담당 바오셴위안(鮑先元) 과장의 설명이다. 이어 그는 “나머지 관련 유적은 이제 철저하게 보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곳에서 최부 일행이 표착할 당시의 상복 문제를 떠올렸다. 최부 일행이 표류 뒤 처음 뭍에 오르기 직전 “이번에는 제발 상복을 벗고 관복을 입어 위엄을 보임으로써 화를 면해보자”는 일행의 간절한 제안을 받았다. 그에 대한 최부의 대답이 또 ‘걸작’이다. 그는 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는 일을 ‘권도(權道)’라고 일갈한다. ‘권도’는 원칙을 버리고 임기응변을 위해 취하는 변통의 방식이다. 최부는 “너희는 왜 옳고 바름을 해치도록 나를 이끄는 것이냐”고 했다. 그는 이어 “상복을 벗는 일은 효(孝)가 아니며, 사술(詐術)로 남을 속이는 것은 신(信)이 아니다. 나는 옳음으로 일관하겠다”고 버틴다.

중국인이 그린 최부의 초상이다. 상상한 모습이다. 싼먼 인근의 대도시 닝보(寧波) 고려사 박물관에 있다. 전민규 기자



수차례 닥친 생사의 고비그때는 관원(官員)으로 행세하는 사람들의 배 여섯 척이 최부의 선박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 또한 상황을 살핀 뒤 “조금 있다 오겠다”며 돌아간 상태였다. 그때 최부는 생사가 걸린 판단을 내린다.



재물에 탐을 내는 상대의 모습을 우선 지켜본 최부는 그들이 해적이거나 또는 그 반대의 관원이라고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결국 배를 버린 뒤 빗속을 뚫고 멀리 보이던 마을로 도망을 치기로 했던 것. 이 대목에서 우리는 최부라는 인물이 지닌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최부 일행이 선박 여섯 척을 몰고 온 사람들에 끌려갔다면 일행은 현지 해역에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로 몰려 몰살을 당한 뒤 “왜구를 소탕했다”는 보고 대상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컸다. 『표해록』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아무튼 천신만고 끝에 뭍에 오른 최부는 일행 모두에게 이런 당부를 한다. “예의를 차릴 줄 알아야 한다. 앞으로 현지 사람들을 만나 내가 이야기할 동안 모두 꿇어 앉아 있고, 현지 사람들을 응대할 때는 반드시 일어나 절을 하라”고 했다.



그 현장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지 정부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훙먀오(紅廟)라는 촌락이었다. 이곳이 바로 최부 일행이 뭍에 올라 빗속을 뚫고 도망쳐 처음 닿은 ‘사람 사는 마을’이었다. 60대에 접어든 노인 한 사람은 책을 펼쳐들고 우리 일행을 맞았다. 그가 밑줄을 치며 읽었다고 보여준 페이지에는 최부의 일행이 처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의 광경이 적혀 있었다. 현대 중국어 번역본 『표해록』이었다. 그들은 우리 일행에게 맛이 시원한 수박을 건넸다. 옆에서 일행이 수박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노인 하나는 이런 말을 했다. “인연이 있으면 천리를 달려와 만난다(有緣千里來相會).”



“최부의 행적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주민 중의 한 사람이 “조선의 선비가 이곳을 거쳤다는 옛날이야기를 어른들에게서 들어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마을에는 최부 일행이 “바닷물에 흠뻑 젖어 있던 옷을 말렸다”고 했던 옛 불당(佛堂)이 지금은 묘당(廟堂)의 모습으로 아직 남아 있었다.



최부의 당시 기록에는 “둘러싼 사람들이 마치 벽처럼 늘어서 있는 듯했다. 우리가 그 앞으로 나아가 읍을 하자 사람들 모두 두 손을 모으며 몸을 굽혀 답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생사의 고비를 가까스로 벗어나 뭍에 올라온 사람, 왜구라는 의심을 미처 풀지 못했지만 갈증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최부 일행을 대하는 현지 사람들의 예(禮)가 눈길을 끈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소통의 밑바탕이라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끝까지 지킨 예(禮)당시 저장 일대 왜구의 피해는 혹심했다. 따라서 왜구를 향한 현지 주민들의 증오심은 아주 높은 편이었다. 따라서 문제는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최부 일행이 왜구가 아닌, 조선 사람이라는 점을 증명해야 하는 문제였다. 현지 주민들의 의심은 쉽게 풀리지 않았고, 최부 일행의 고난은 따라서 끝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최부 일행을 관가에 넘기기 위해 이들을 에워싼 채 길을 나섰다. 곳곳에서는 “왜구를 죽여라”며 위협을 가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이 우거진 곳을 지날 때였다고 했다. 지금 그곳은 구쑹(古松)이라는 마을로 남아 있다.



그곳에서 최부는 ‘은유(隱儒)’라고 표현한 한 사람을 만난다. 배움이 있지만 시골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성명은 왕을원(王乙源)이라고 했다. 그는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던 최부를 측은하게 여겨 술을 대접했다. 그러자 최부는 “우리 조선은 부모의 상을 당하면 3년 동안 술과 고기 등을 입에 댈 수 없다”며 거절한다.



옆에서 함께 고생하고 있던 일행의 눈에 이 광경은 어떻게 비쳤을까. 그러나 최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왕을원이 “귀국에서도 불교를 믿느냐”고 묻자 최부는 “우리는 오로지 유가의 가르침만 숭상한다. 집집마다 모두 효성과 공손함, 충직함을 삶의 근간으로 삼는다”고 대답한다.



최부의 이런 자세와 태도는 사실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을 그저 극단적인 성리학자로만 봐야 할까. 외곬의 답답한 유생으로만 치부하면 그만일까. 그러나 약 5개월 채 못 미치는 여정을 거치면서 최부의 이런 면모는 만났던 중국인들의 마음을 흔든 대목이기도 하다.



원칙이 분명해 제 중심을 잃지 않으며, 생각과 행동에 거짓이 끼어들지 않으며, 남을 대할 때 정성을 다 함으로써 위선을 배제하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의 사정을 가능한 한 멀리 읽어 자칫 죽었을지도 모를 상륙 직전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지혜’도 드러낸다.



거대한 땅을 지닌 중국과의 대화는 어쩌면 이런 경로를 따라야 마땅할지 모른다. 제 원칙과 명분을 잃지 않으면서 상대의 마음을 끝까지 헤아리는 예를 통해 서로가 조화를 이루는 상태 말이다. 최부의 528년 전 대화는 그런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최부의 신분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기까지 중국 관원들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그러나 거듭 이어진 확인 과정을 통해 최부와 그 일행이 조선인이라는 점을 확신하는 상황에 이르면서 동양의 전통 정신세계 가치를 바탕으로 한 깊은 대화가 차츰 강도 높게 이뤄진다. 그 과정을 더 따라가 보자. <계속>



 



 



싼먼(중국 저장성)=유광종뉴스웍스 콘텐츠연구소장 ykj33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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