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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벽돌로 축조된 세계 最古의 조선소 만나다

인도 로탈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의 도크(dock) 유적지. 고급 벽돌로 축성된 조선소는 물을 끌어들이고 내보내기 쉽게 설계됐다. 김경빈 기자



2012년 여수 세계 엑스포 때의 일. 인도 파빌리온은 그저 그런 공예품과 조각품, 의상으로 채워졌다. 인도관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순간 아찔한 패널이 다가왔다. 단연 시선을 잡아매는 사진이 있었으니 ‘세계 최고의 조선소 로탈(Lothal)’. 세계 최고라니…. 호기심은 이내 반드시 방문해야 한다는 책무로 바뀌었다. 막상 생면부지의 그 장소를 찾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마침내 기회는 오는 법, 해양 실크로드 탐사의 하나로 찾아갔다.



[연중기획] 해양 실크로드 문명 대탐사 -14- 인도 - 하 하라파 문명의 로탈

로탈은 다른 유적과 달리 상세 정보가 포털에서도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그만큼 오지고 덜 알려졌다는 증거. 인도 뭄바이 공항에서 구자라트 아마다바드 공항을 거쳐 다시 90여㎞를 달렸다. 황무지다. 농경지가 더러 나타나고 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기는 하지만, 준사막 지대.



고기후·고지리·고식생의 모든 조건은 당연히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당시 번창하던 사바르마티강은 이 고대 항구와 캄베이만을 연결했을 것이고, 이 캄베이만을 통해 페르시아만으로 다녔으리라 짐작된다. 펀자브 지방을 통해 오늘의 아프가니스탄으로 연결되고 고대 그리스 문명과 연결될 정도로 인도 서북부는 대외 교류의 창문이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보면 기원전 5세기에 아키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는 명을 내려 부장 스카일락스를 인도양에 내보낸다. 그는 인더스강 하구부터 수에즈 운하까지 29개월간 탐험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로탈이 번성하던 시대에 인더스밸리 문명과 고대 그리스 문명이 연결돼 있었다는 좋은 증거.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기원전 8세기께에 이미 인도와 바빌론의 해상 교역도 존재했다.



로탈이 페르시아만 창구라면, 동시에 페르시아 문명에는 로탈이 인도로 들어가는 입구다. 인도 북서부와 페르시아만이 얼마나 가까운지는 지도를 펼쳐 보면 손쉽게 이해된다. 아라비아해를 통한다면 그야말로 지근거리.

1 로탈 우텔리아궁전이 있는 마을에서 주민들이 일을 하고 있다 2 소에게 물을 먹이고 있는 로탈 주민들. 김경빈 기자



수천 년 고대 문명이 남긴 건 벽돌뿐불과 7㎞ 지점의 부가보강 옆 사라그왈라 마을의 아름다운 우텔리아 궁전부터 찾아가봤다. 아름답긴 해도 삐걱거리는 층계, 무너진 창문, 먼지 쌓인 침실, 거미줄 쳐진 주방이 흡사 공포영화라도 찍을 만한 곳. 이런 황무지에 궁전이 들어섰다는 것은 중세 때까지만 해도 살 만한 동네였음을 입증한다. 생태사적 변천으로 장기적 사막화가 이루어진 곳. 우물가에 소가 모여들고 동네 사람은 소에게 정성 들여 물을 먹인다. ‘신성스러운 암소’의 고향답다.



로탈은 고대의 ‘입’으로 불린, 언어학적으로 ‘죽음의 장소’라 해석된다. 모헨조다로도 ‘죽은 자의 흙무덤’. 로탈과 모헨조다로의 연관성이 드러난다. 수천 년 고대 문명이 거품으로 사라지고 남긴 것은 벽돌뿐. 유물이야 20세기 들어와 발굴된 것이고 이곳을 살아가는 원주민에게 고대의 기억은 무너진 벽돌 더미로만 남아 있다. 그러하니 죽음의 공간이며, 이는 문명의 부침을 일상의 언어로 함의한 것에 지나지 않으리.



하도 덥기에 로탈 유적까지 데려다준 차량기사에게 기온을 물었다. 무려 섭씨 49도까지 올랐단다. 황량한 사막의 열풍이 불어온다. 낮은 평원으로 이어진 지평 위의 조금 높은 둔덕으로 올라갔다. 낮은 동산인 데도 일망무제의 전경이 펼쳐진다. 유적지는 둔덕에 집중되며, 아래쪽으로 일반 주거지와 강으로 연결돼 바다로 나가는 조선소 저수조가 건설됐다.



오늘날은 로탈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대항해에 적합한 항구 조건에서 벗어나지만 항구가 대체로 강항(江港)에서 해항(海港)으로 진화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쓰나미·태풍 등으로부터 해항은 위험하기도 했다. 문명은 바다에서 거슬러 올라와 강 언저리 둔덕에 자리 잡았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문명도 모두 인더스강의 계곡에 밀집됐다. 강은 바다로 이어지는 동맥이었으며 다시금 바다에서 강을 통해 문명의 본거지로 접근 가능했다.



유적은 S R 라오 박사가 1955~62년 발굴했다. 하라파 타운(BC 2500~BC 1900)으로 짐작된다. 항구는 선원들이 위급 상황에 피할 수 있는 성채와 아크로폴리스, 저지대의 마을로 이뤄졌다. 13m 높이의 진흙 벽돌로 장벽을 쌓아 보호했다. 우두머리는 아크로폴리스에 살았는데 그 집은 3m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졌다. 벽돌로 바닥을 깐 목욕탕, 하수로 배수, 우물 등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저지대 마을은 둘로 구분된다. 수공업자가 살았던 중심 상업지구와 일반 주거지. 수공업자는 오늘날로 치면 해외수출 명품을 제조하는 산업기술 인력이었다.



남은 유적 중에서 발군은 역시 독(dock)과 창고로 확인되는 거대 저수조다. 조선소는 고급 벽돌로 축성됐으며 물을 내보내고 끌어들이기 쉽게 과학적으로 설계됐다. 독특한 독으로 가로 214m, 세로 36m의 규모를 자랑한다. 이만한 크기라면 고대 선박은 충분히 여러 척을 건조하고도 남는다.



또 다른 중요 유적은 성채 남서쪽 창고다. 3.5m 기단 위에 가로 49m, 세로 40m 규모였다. 원래 화물을 보호하는 목재 캐노피가 달려 있는, 64개의 벽돌로 지은 큐빅 건물군으로 둘러싸여 있다. 무역거래 규모가 상당한 수준이었다. 구자라트 일대의 많은 물산이 로탈을 통해 캄베이만을 통해 멀리까지 유통됐다는 증거. 하라파 문명은 로탈 배후지의 풍부한 목화와 곡식을 주목했다. 게다가 구슬 목걸이 산업을 중시했다.



구자라트는 하라파 문명 유적지항구의 번성은 돌로 만든 구슬·구리·상아·조개·목화 생산품을 서쪽으로 수출하는 데서 비롯됐다. 페르시아만 양식의 도장, 테라코타 조각은 로탈이 외부와 적극적으로 접촉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항구는 기원전 1900년께 잦은 범람으로 파괴됐으며, 기원전 1700년께에는 하라파인조차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문명의 성쇠가 정확히 어떻게 전개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탄소 연대 측정 등 고고학 연구 결과에 의한 ‘유추’로 문명의 궤적을 파악할 뿐이다.



하라파 문명을 볼 수 있는 곳은 현재의 인도 내에서는 구자라트가 유일하다. 대부분 파키스탄에 속한다. 로탈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한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하라파 문명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담은 로탈고고학박물관은 1976년에 문을 열었다. 구슬은 고대 문명의 국제 거래에서 중요했다.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공예 수준을 보여준다. 홍옥수(紅玉髓)·마노·자수정·줄마노와 값진 돌로 만든 보석, 채색 도자기 구슬 등 다양하다. 도장은 많은 양이 출토됐는데 동물 모양, 인더스 문자 형상 등이 각인돼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두루 쓰인, 다루기 쉬운 동석(凍石)을 이용했다.



구자라트 해안은 예나 지금이나 조개가 풍부하다. 조개를 이용한 팔찌·목걸이 등이 다수 출토됐다. 신석기와 청동기 사이의 장신구 발달사에서 대차가 없음을 보여준다. 조개를 이용한 인류 문명의 궤적은 그만큼 장기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하라파인은 구리와 청동 제품을 만들어 썼다. 아마도 구리는 인도양을 통해 오만에서 수입했을 것이다. 돌칼과 뼈창 같은 다양한 도구도 출토됐다. 도기는 거대한 그릇부터 접시, 단지에 이르는 일상 용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테라코타로 만든 동물과 인간 형상 중에는 수메르인도 있다. 바다를 통한 국제 간 문명 교류가 지속적이었음을 암시한다.



로탈인은 시스템을 갖추고 다양한 형태의 계량기를 만들어 썼다. 홍옥수·석회분 같은 다양한 재료가 등장한다. 계량시스템의 정립은 국가통치와 경제시스템의 일정한 룰이 자리 잡았다는 증거다.

로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전성기때의 상상도.



놀라울 정도로 세련된 도시계획로탈의 문명사적 위상과 의의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초기 인도인의 정착사는 흔히 ‘언어의 화석학’을 통해 이야기된다. 고언어의 궤적은 종족 변천의 맥락을 품고 있기 때문. 그런 점에서 『베다(Veda)』는 문학작품이기는 하지만 초기 인도인의 사회종교적, 정치경제적 복합적 존재 양태를 잘 알려주는 결정적 사료다.



그러나 미궁의 고대 문명이 1922~23년 모헨조다로 유적 발굴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힌두, 혹은 신디(sindh)라고도 부르는 거대한 유적은 예수 탄생으로부터 최소한 2700여 년을 앞선다. 하라파 문명도 같은 시대에 발굴됐다. 신석기와 청동기를 병용하는 인더스 문명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이름하여 인더스밸리 문명. 이로써 기원전 3000년께에 인도 문명이 수메르·바빌론·이집트·아시리아 문명과 동일 반열에 서 있었음이 증명됐다.



인더스밸리 문명은 방대한 도시를 품고 있었다. 극도로 파괴된 문명의 흔적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세련된 도시계획을 보게 된다. 오늘의 인도 문명은 이들 고대 문명과 단절적이지 않다. 인더스밸리 문명이 중요 요소로 취급한 모든 요소가 여러 문화의 퓨전을 거치면서 누적돼 쌓인 결과물이 오늘의 인도 문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탈은 그러한 문명의 대외적 창구, 즉 해양문명 교류의 국제적 창구로서 기능했다.



사막화된 벌판에 쓸쓸히 마른 나무가 몇 그루 서 있고 텅 빈 저수조에는 수천 년 전 벽돌만이 그날을 증거한다. 이런 곳에서 인류의 조선산업이 싹트고 국제물류가 본격적으로 이뤄졌음을 생각하면 벽돌 하나하나가 세계문화유산인 셈. 황무지 로탈은 우리에게 문명사 초기에 인류가 시도했던 국제 항로의 거친 도전과 응전을 암시하는 결정적 증거이니!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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