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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독일어 대본 수백 번 읽고 소화했죠”

2016바이로이트 ‘파르지팔’에서 시동 역을 맡은 테너 김석철(가운데)



리하르트 바그너 음악극에 관한 한 무한 감동의 사운드를 선사하는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1876년 바그너 전용 극장으로 세워져 오늘날까지 140여 년의 역사를 발전시켜 온 이 무대에 데뷔한 한국 가수 강병운, 연광철, 전승현, 사무엘 윤은 모두 베이스/베이스바리톤의 저음역이었다. 그리고 올해 처음으로 한국인 테너가 그 꿈의 무대에 도전했다. 해외에서 찰스 킴(Charles Kim)으로 활동하고 있는 테너 김석철(42)이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데뷔한 첫 한국인 테너 김석철

8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앞이나 시내에서는 그를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를 건네거나 감탄을 표하는 사람이 많았다. 출연 첫 해지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는 7월 25일 개막일에 두 프로덕션에나 출연한 덕분이다. 오전 11시에 열린 ‘어린이를 위한 바그너(Wagner fuer Kinder)’ 시리즈 중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테너 주인공 에릭 역을 멋지게 소화해 찬사를 받았고, 오후 4시에 시작된 개막작 ‘파르지팔’에서는 세 번째 시동(Knappe) 역을 노래했는데, 이는 독일 전역에 TV로 중계됐다. 1막에서 노기사 구르네만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불만을 표출하는 이 세 번째 시동을 눈여겨본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출연하는 성악가들은 모두 6월에 모여 이곳에서 석 달을 보낸다. 축제 기간은 7월 25일부터 8월 말까지지만, 연습(프로베·Probe)은 6월 초순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5일 오전 11시 어린이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6일 오후 4시 ‘파르지팔’을 관람한 뒤 테너 김석철을 만나 이제까지 걸어온 길과 바이로이트의 연습 방식, 그리고 노래의 철학에 관해 물었다.



 

‘파르지팔’ 1막의 폭격 당한 교회

무대에 오른 테너 김석철(왼쪽 끝)



“자연스런 고음과 환상의 발성” 찬사 총 10회에 걸쳐 어린이 관객을 홀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공연 마지막 날 보러갔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바로 옆 어린이 오페라 공연장 앞에 줄을 선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물으니 바이로이트뿐 아니라 베를린·드레스덴·뮌헨·라이프치히 등 여러 곳에서 왔다고 했다. 보리스 셰퍼가 지휘하고 율리아 휘브너가 연출한 이 공연은 전체 시간이 70분으로 축약됐고, 원래 노래로 부르게 되어 있는 여러 부분이 주고받는 대사로 바뀌었다.



여주인공 젠타를 사이에 두고 유령선 선장과 싸우는 사냥꾼 에릭 역의 김석철. 그가 젠타를 향해 ‘꿈 이야기’와 ‘카바티나’를 들려줄 때 관객들은 갑자기 숨을 죽이며 그의 목소리를 더 잘 들으려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독일의 권위 있는 음악전문지 ‘노이에 무지크차이퉁’은 그의 “자연스럽게 뻗어나가는 고음과 환상적인 발성”을 칭찬했다. 다른 매체들에게서도 “탁월한 에릭(ein brillanter Erik)”, “최고의 에릭(Super-Erik)”이라는 찬사를 받은 그에게 어떻게 연습했는지부터 물었다.



“먼저 바그너의 독일어 대본을 수백 번 반복해 읽으면서 단어와 문맥의 내용과 의미를 충분히 파악한 뒤, 악보를 직접 피아노로 치면서 노래합니다. 음악 속에서 작곡가의 의도를 찾아보려고 노력하죠. 그럴 때면 눈앞에 멜로디 라인이 긴 계단처럼 펼쳐집니다. 그 계단에 가사를 입히며 걸어간다고 할까요. 그런데 대본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그저 외국어 딕션에만 의존해 기계적으로 노래하게 되고, 내 노래가 아닌 다른 사람의 노래를 부르는 꼴이 됩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에 참여하며 처음으로 노래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별로 길지 않은 부분이었지만, 저와 청중이 오롯이 제 목소리와 노래에 집중하는 그 순간이 아주 각별하게 느껴졌습니다.”



고교 시절에도 노래를 좋아해 중창단에서 활동했지만 성악을 전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치과대학에 지원했다가 재수를 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더위 속 힘겹게 공부하는 친구들과 자신을 격려하려는 마음으로 학원 옥상에서 비공식적으로 친구들을 초대해 연 그의 리사이틀은 큰 인기를 끌었고, 주위의 권유로 결국 치대 대신 음대 성악과에 지원하기로 생각을 바꾼다.



입시 준비는 쉽지 않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피아노까지 연습해 서울대 성악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노래 공부에 몰두했다. 오페라 대본이나 리트 텍스트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언어로 만들어 멜로디에 싣는 식이었다. 3학년이었던 1997년, 중앙 콩쿠르 남자 성악부문에서 베토벤의 가곡 ‘입맞춤(Der Kuss)’으로 1위를 차지하면서 김석철은 자신의 훈련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운동을 더 잘하기 위해 근육부터 단련시키듯, 학교를 마치고 미국 커티스 음대에서 수학하는 동안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3년간 집중적으로 독일어 강좌를 들었다. “언어의 의미를 모르는 학생에게 딕션 훈련에 의지해 노래하게 하는 것이 미국식 성악 교육의 문제”라는 생각에 커티스 졸업 후 독일로 무대를 옮겼다. 그리고 2003년부터 2011년까지 도르트문트 극장 주역가수로 활동했다.



2010년 이 극장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 타이틀 롤을 노래한 것이 올 11월 국립오페라단의 로엔그린 역에 자신 있게 임하는 밑거름이 됐다. “로엔그린은 위기에 처한 약자를 돕는 성배 기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누명을 쓴 여주인공 엘자를 구하러 왔다가 사랑에 빠집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캐릭터이며, 사랑을 위해 성배 기사가 누릴 수 있는 영생의 특권을 포기할 만큼 열정적인 존재이기도 하죠.”

‘파르지팔’의 3막 자연으로 돌아가라

파르지팔을 유혹하는 꽃처녀들



좋은 소리 최우선으로 … 그 위에 가사 얹어 김석철은 우베 에릭 라우펜베르크가 연출을 맡은 이번 바이로이트 ‘파르지팔’에 ‘세 번째 시동(Knappe)’으로 출연해 명료하게 전달되는 발음과 배역의 개성을 살린 표현력으로 찬사를 받았다. 네 명의 시동 중 가장 비중 있는 배역이다. 무대 위에서 그는 성전 안에서 잠자는 난민을 깨우고 의자를 옮기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연기 동선이 복잡해 노래하는 데 힘겨운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연습이 시작될 때 다들 모여 연출가로부터 연출 콘셉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라우펜베르크는 1막 무대를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점령한 아랍 지역의 한 성당으로 설정했는데, 제 역할은 바그너 원작에서는 기사의 시동이지만 이번엔 수도회 예비수사입니다. 연출가가 가수들의 발성과 호흡에 무리가 되지 않는 연기를 주문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어쨌든 정해진 동선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바이로이트의 연습 과정과 지휘자, 연출가와의 소통에 관해 물었다. “우선 연출가와 함께 연출 콘셉트와 연기 동선을 익히고, 지휘자·반주자와 함께 피아노에 맞춰 연습합니다. 지휘자 하르트무트 핸첸은 각 가수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했고, 자신의 작품 해석방식을 강의하듯 들려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무대에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습하고 드레스 리허설을 거쳐 공개 리허설을 가졌습니다. 그 뒤에 드디어 개막공연이 있었죠.”

2016바이로이트 어린이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에릭 역을 노래한 테너 김석철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는 동안 그는 자주 노래를 불렀다. 공명이 잘 되는 곳에서는 항상 소리를 내보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한국 무대에서 그의 노래를 들은 것은 2005년 성남아트센터 개관 공연 ‘파우스트’의 타이틀 롤, 2007년 성남아트센터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의 바쿠스 역이었는데 타고난 미성과 자연스러운 발성, 유연한 레가토가 매번 인상적이었다. 텍스트 이해를 바탕으로 한 표현력도 뛰어나 모든 면에서 일찍부터 잘 다듬어져 있는 테너로 보였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발성에 완벽을 기하려는 노력을 긴 세월 동안 이어가고 있었다.



“2013년 국립오페라단에서 ‘파르지팔’을 초연했을 때 파르지팔 역의 커버 가수로 참여해 그때부터 베이스 연광철 선생님께 발성법을 배우면서 제 발성의 문제점을 수정하고 크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텍스트 이해를 기반으로 해 정확한 발음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러다 보니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노래를 했죠. 하지만 정말 이상적인 소리를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발성의 원리를 제대로 깨닫고 나니 이제는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그 위에 미끄러지듯 가사를 얹게 됩니다. 그러면 최상의 소리를 전달하면서 음악과 텍스트를 하나로 조화시킬 수 있죠.”



바이로이트에 데뷔한 테너 김석철은 자신의 힘과 에너지를 즐기며 빠르게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 같았다. 일어나자마자 축제극장으로 달려가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며 배역을 연습하고, 자신의 리허설이 없는 시간에는 다른 공연 리허설들을 챙겨 보았다고 했다. “베르디를 비롯한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오페라 텍스트가 대체로 직설적인 것과는 달리 바그너 텍스트는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차 있어 훨씬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그는 “온종일 바그너만 해석하고 바그너만 노래하고 바그너와 함께 살아가는 바이로이트의 이번 여름이 너무도 행복하다”며 밝게 웃었다.



바그너 헬덴테너로 꾸준히 성장하고 싶은 희망과 함께 “텍스트와 음악을 철저히 이해하는 진정한 가수로 학생들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을 세우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



 



 



바이로이트(독일) 글 이용숙 음악평론가 rosina@chol.com, 사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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