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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에게 ‘혁명 동지’ 장제스 데려간 천치메이

1 1915년 9월 25일, 위안스카이 타도를 위해 귀국하기 직전, 도쿄에서 동지들과 합영(合影)한 쑨원(앞줄 왼쪽 다섯째) 천치메이(앞 줄 왼쪽 넷째).



천커푸(陳果夫·진과부)와 천리푸(陳立夫·진립부) 형제에게는 두 명의 삼촌이 있었다. 세상 구경은 막내 삼촌 천치차이(陳其采·진기채)가 먼저 했다. 1898년 청나라 정부는 유학생 선발 시험을 실시했다. 상하이(上海)에서 고학 중이던 천치차이도 일본 유학의 꿈을 이뤘다. 육군사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자 여기저기서 손을 내밀었다. 젊은 나이에 후난(湖南)성 군사학교(武備學堂) 총교관으로 부임했다.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91-

큰삼촌 천치메이(陳其美·진기미)는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이었다. 다섯 살 때 글을 깨우쳐 신동 소리를 들었다. 의협심도 남달랐다. 여덟 살 때 불길에 휩싸인 친구를 구했다. 가는 곳마다 대접을 받았다. 열다섯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돈벌이에 나섰다. 전당포에 취직했다. 이유가 명쾌했다. “돈 있는 곳에 가야 밥을 굶지 않는다.” 타고난 강심장에 계산이 치밀하다 보니 주인의 눈에 들었다. 12년간 싫은 소리를 한마디도 듣지 않았다. 전당포는 인간세상의 애환과 염량세태(炎凉世態)를 엿볼 수 있는 묘한 곳이었다. 세상사 별 게 아니라는 것을 진작 깨달았다. 어린 조카 커푸와 리푸는 툭하면 야단만 치는 아버지보다 삼촌 천치메이를 잘 따랐다.



 전당포 직원 때려치우고 비단공장 취직동생의 성공에 천치메이는 충격을 받았다. “잘 돼야 전당포 주인”이라며 직장부터 때려치웠다. 동생을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 “큰 도시로 나가고 싶다. 일자리를 알아봐 주기 바란다.” 치차이는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는 상하이의 비단공장에 소개장을 써줬다. 전당포 근무경력 탓인지 금전 출납을 도맡았다.



비단공장 회계나 전당포 직원이나 그게 그거였다. 금방 싫증이 났다. 비밀결사 청방(靑幇)을 노크했다. 청방은 천치메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돈 장사 밑에서 노예생활 하던 인간 말종이다.”



천치메이는 실망하지 않았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해만 지면 사창가를 찾았다. 상하이의 사창가는 청방의 독무대였다. 그간 모은 돈을 2년 만에 다 날렸다. 밤거리 여인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청방 단원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다시 동생에게 하소연했다. “나도 너처럼 일본으로 가겠다.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 훗날 몇 배로 갚겠으니 좀 내놔라.” 1906년 봄, 스물아홉 살 때였다.



일본땅을 밟은 천치메이는 혁명에 투신키로 작정했다. 우선 도쿄 경찰학교에 입학했다. 도쿄에는 쉬시린(徐錫麟·서석린), 치우친(秋瑾·추근), 장징장(張靜江·장정강)등, 저장(浙江)출신 혁명가들이 몰려있었다.



저장출신들은 거의가 광복회(光復會) 회원이었다. 천치메이는 남들에 비해 늦게 혁명에 눈을 떴다. 저장 출신이긴 했지만 광복회 와는 연줄이 없었다. 광둥(廣東)사람 쑨원이 영도하는 동맹회(同盟會)에 가입했다. 싫다 좋다, 말수가 적고 표정이 없다 보니 쑨원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장제스(蔣介石)도 천치메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땅을 밟았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허구한 날 붙어 다녔다. 천치메이는 아홉 살 어린 장제스의 청이라면 뭐든지 들어줬다.

2 천치메이(뒷줄 왼쪽에서 넷째) 형제와 조카들. 앞줄 오른쪽 부터 천리푸와 천커푸. 1911년 전후로 추정.[사진 제공=김명호]



한 번 본 사람은 친구로 만든 천치메이천치메이가 일본에 있는 동안 상하이의 혁명세력은 전멸상태였다. 쉬시린과 치우친의 죽음으로 저장은 더 심했다. 쑨원은 위기를 직감했다. 광둥과 윈난(雲南)에서 무장폭동을 시도했다. 결과는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처참했다. 혁명지도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광복회도 동맹회와 철저히 결별했다.



천치메이도 일본을 떠났다. 혁명당의 씨가 말라버린 상하이에 깃발을 꽂았다. 해외에 있던 쑨원은 “내우외환의 상황에서 혁명 세력을 일신했다”며 천치메이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천치메이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무술학교를 건립해 훠위안자(?元甲·곽원갑)를 교사로 초빙하고, 한번 본 사람은 꼭 친구로 만들었다. 청방도 천치메이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제 발로 찾아와 두목 자리를 권했다. 저장의 자본가들은 천치메이의 방문을 고대했다. 동맹회 가입 수락서를 내밀면 군말 없이 서명했다. 문화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하이 상인협회는 무장력을 갖추고 있었다. 천치메이는 이들도 장악해 버렸다. 위유런(于右任·우우임)의 민립보(民立報) 창간도 천치메이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장제스에게 항저우 점령 명령장제스를 동맹회로 이끈 사람도 천치메이였고, 쑨원에게 데리고 간 사람도 천치메이였다. 1911년 10월 10일, 후베이(湖北)성 우창(武昌)에 혁명의 총성이 울렸다. 천치메이는 저장과 장수(江蘇)의 혁명당원들에게 무장봉기를 독려했다. 직접 상하이 병기창을 접수하고 도독(都督)에 취임했다. 일본에 있던 장제스도 상하이로 불러들였다. “결사대를 이끌고 항저우를 점령해라.” 장제스는 천치메이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천치메이는 난징(南京)에서 학업 중인 큰 조카 커푸도 상하이로 불렀다. 장제스에게 앞날을 부탁했다. 천커푸의 회고를 소개한다. “삼촌은 입원 중인 병실에서 수저우(蘇州) 일대의 혁명 공작을 지휘하고 있었다. 장 선생을 처음 만났다. 위엄과 기품이 넘쳤다. 삼촌에게 그렇게 공손할 수가 없었다.” 장제스와 천씨 형제의 인연도 시작은 평범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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