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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서 인류사를 읽다

저자: 나디아 허 역자: 남혜선 출판사: 어크로스 가격: 1만7000원



낯선 도시에 내린 여행자는 흔히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는다. 맛집이나 술집, 백화점이나 시장으로 달려가는 이도 많다. 대만 작가 나디아 허(何曼莊)는 독특하게도 동물원에 간다. 동물원은 그에게 아름다운 기억을 지상에 단단히 묶어주는 기억장치다. “눈앞에 보이는 동물원은 사실 그냥 동물원이 아니라 한 도시의 기억이다.”



『동물원 기행』

하여 그는 2012년 5월 타이베이시립동물원에서 출발해 2014년 3월 치앙마이 매왕 코끼리 캠프에 이르기까지 2년 가까이 세계 주요 도시의 14개 동물원을 탐방했다.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소설가로 등단한 그에게 동물원 기행은 역사를 기억하는 매력적인 방식이다.



“오래된 동물원은 거만하지도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게 그 시대의 흐름을 담아낸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 어떤 건물들보다도 훨씬 더 진실하게 그 도시의 성격을 반영한다. 이미 오랫동안 평온한 시절을 보낸 유럽의 동물원에서는 무언가 일단락되어 안정기로 접어든 곳의 우아함이 묻어난다. 이와 달리 중국 동물원들의 백태는 불안으로 가득한 시대를 증명한다.”(318쪽)



『동물원 기행』(원제 The Grand Zoo)은 박물지나 도감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서나 사회에세이에 가깝다. 부록1로 정리한 동물원 연대기는 희한하게도 혁명과 전쟁이란 단어로 가득 차 있다. 1640년 파리식물원이 대중에 개방된 뒤 370여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계 주요 동물원은 역사의 격변 속에 인류의 집단기억을 응축한 특수지대가 되었다.



베를린동물원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전투기 764대가 베를린 상공에서 떨어뜨린 폭탄 속에 초토화됐다. 3715종 가운데 살아남은 동물은 사자 두 마리, 개코원숭이 열 마리 등 모두 아흔 한 마리뿐이었다. 냉전 기간 중 서베를린을 지나가는 모든 기차가 정차하는 역은 딱 하나, 동물원역뿐이었다. 독일 통일 뒤 동서베를린의 동물원은 기능적으로 통합돼 세상에는 전쟁이나 이념도 앗아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베이징동물원은 중일전쟁 당시 국방 안전을 이유로 내세운 일본군에게 사자와 표범 등 대부분 맹수들이 독살당했다. 1949년 이 동물원에는 앵무새 세 마리, 짧은꼬리원숭이 열세 마리, 에뮤 한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반전은 정치 영역이었다. 다시 동물을 채워 넣는 작업이 ‘외교적 교류 통로’로 활용되면서, 베이징동물원은 수십 년 동안 국제 관계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 아시아 코끼리, 인도 코뿔소, 한국 표범 등이 친선 대사로 입국했다. 판다 ‘바오바오’는 베를린동물원으로 이주했고, 판다 ‘쟈오쟈오’는 미국에 가서 교배했다.



나디아 허가 한국의 ‘창경원’을 언급하지 않은 점은 아쉽다. 일제가 조선왕조를 말살하기 위해 활용한 것이 동물원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던 모양이다. 1907년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든 일제는 1911년 창경궁(昌慶宮)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개명하고 벚나무를 대량 심어 왕권과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는 궁궐을 격하시켰다. 1970년대까지 서울의 대표적 유원지로 꼽히던 창경원은 1984년 동물을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벚나무를 이식하면서 서서히 창경궁의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동물원의 정치학을 극명하게 보여준 예라 하겠다.



옮긴이는 후기에서 14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동물원이 얼마 전 문을 닫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쓴다. “동물들이 건물에서 산다는 자체가 이상한 일이기 때문에 억압의 상징인 동물원을 폐쇄해 동물들을 서식지로 돌려보내고 동물원 부지에는 동물보호센터와 함께 생태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한때 문명국가라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공공 동물원을 인간 스스로 없애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다. 광복 71주년을 맞은 이 땅은 창경궁의 복원만큼이나 일제 잔재를 뿌리뽑는 일에서 무심하고 느리다. 이런 깨달음을 넌지시 일러주는 동물원의 재발견은 인본주의 부흥의 한 열쇠다.



 



 



글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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