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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 요약(58)

왕건 왕릉



태조 왕건(877~943년)은 왕이 되기 전엔 ‘천하의 싸움꾼’이었다. 896년 스무 살의 왕건은 궁예 휘하에 들어간다.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왕조를 건국한다. 이후 무려 18년 동안 견훤의 후백제, 통일신라와 치열하게 자웅을 겨뤄 60세인 936년 마침내 천하를 통일한다.



[수험생과 부모가 함께 보는 NIE] -58- 태조왕건 ①

왕건의 40년 싸움꾼 인생에서 유일한 패배가 927년(태조10) 11월의 대구 팔공산 전투였다. 그보다 전인 925년(태조8) 10월 고울부(高鬱府·경북 영천) 성주인 능문(能文)이라는 자가 왕건에게 귀부한다. 그곳 성주가 귀부한 것은 신라의 자존심에 큰 생채기를 내는 일이었다. 왕건은 신라의 동요를 염려해 귀부를 거부한다. 수일 후 왕건과 견훤은 지금의 선산 부근인 조물군(曹物郡) 전투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해 화의를 맺고 인질을 교환한다. 왕건은 사촌동생을 인질로 보낸다. 그러나 이듬해 4월 견훤이 보낸 인질이 병으로 죽자 견훤은 고려의 인질을 죽인다. 반년 만에 이 화의는 깨진다.?



고려·신라의 동맹사실을 안 견훤에게 화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두 나라의 동맹은 후백제의 고립을 뜻한다. 견훤은 이를 깨기 위해 먼저 약자인 신라를 공격한다. 다급해진 신라는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왕건의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경주를 점령해 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하는 잔악한 행동을 한다. 그러곤 경순왕을 즉위시킨다. 왕건은 군사 5000을 이끌고 신라를 구원하러 내려가다 대구 팔공산인 공산동수(公山桐藪)에서 경주에서 북상하는 견훤과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왕건 혼자 겨우 살아남았을 정도로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신라 말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918)가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고치고 그해 7월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면서 도성으로 삼았던 궁터. [중앙포토]



역사가들은 견훤의 경주 침입 3년 후인 930년 고창군(안동) 전투를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이라 한다. 여기서 왕건이 승리하자, 고창군 주변 30여 성은 물론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의 110여 성의 성주와 장군들도 귀부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견훤의 신라 침략과 팔공산 전투가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이라고 생각된다. 통일신라의 수많은 성주와 장군들이 두 사건을 보면서 존왕(尊王)주의를 내세워 신라를 끝까지 정통왕조로 존중한 왕건에게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3년 후 고창군 전투는 이런 신뢰를 확인하는 의식에 지나지 않았다. 견훤은 작은 승리에 도취돼 천하 대권을 놓치는 자충수를 두었다.



 



927년의 팔공산 전투가 후삼국 전쟁의 향방을 가른 육전(陸戰)의 대표적 전투라면, 나주전투는 당시 해전(海戰)의 대표였다. 903년부터 935년까지 왕건은 나주를 놓고 견훤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왕건은 견훤의 잔당으로 해전에 능하여 ‘수달’로 불린 능창(能昌)을 사로잡아, 나주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나주전투는 견훤과 궁예의 대리인이 자웅을 겨룬 전투로서, 승리를 거둔 궁예의 태봉국이 견훤의 후백제국을 압도하는 국면을 만들었다.?이 전투의 지휘자 왕건은 단숨에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후삼국 최대 해전 나주전투의 실리는 결국 전투의 종결자 왕건의 몫이 되었다.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위치한 사찰 도피안사에 안치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왕건의 집안은 대대로 개성에 근거를 두고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바다상인(海商) 출신이다. 그의 조상들이 바다상인으로서 축적한 자본과 인맥이 전투의 승리, 나아가 고려 건국의 밑천이 됐다. 왕건의 집안과 해상 교역을 통해 오랫동안 유대를 맺어온 서해안 일대 해상세력은 왕건이 나주로 출정할 때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해상세력 출신 복지겸(卜智謙)은 궁예가 횡포하여 민심을 잃자, 배현경·신숭겸·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 고려를 세운 공신이다.

936년 견훤이 숨진 뒤 왕건이 그의 무덤 가까운 곳에 세운 개태사(開泰寺?충남 논산시 연산면 소재)의 전경. 한을 품고 숨진 견훤의 영혼을 달래려는 왕건의 뜻이 담긴 사찰이다. [중앙포토]



918년 6월 왕건은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곧바로 즉위 조서를 반포한다. 그 첫머리에 전왕 궁예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전왕은 사방이 무너질 때 도적을 없애고, 점차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나라를 통합하기 전에 폭정과 간사함, 협박으로 세금을 무겁게 하여 백성은 줄어들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도를 넘는 궁궐 공사로 원망과 비난이 일어났다..”(『고려사』권1 태조 1년 6월)



왕건에게 찾아가 쿠데타를 권유한 심복들도 왕건과 같은 진단을 내린다. 궁예는 18년간 왕으로 재위했는데, 24년이 지나도록 삼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얘기인가? 쿠데타 당시를 기준으로 24년 전은 894년이다. 궁예는 양길 휘하에서 영월 울진을 점령(892년)한 데 이어, 894년 명주(강릉)를 점령한다. 궁예는 이때 자신을 따른 군사가 3500명에 달하자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독립 세력이 되었다. 그러니까 홍유·배현경 등의 비판은 궁예가 이 시점을 기준으로 24년이 지나도록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주장인 셈이다. 896년 궁예는 개성 왕건 부자의 귀순을 받아들이고, 철원을 도읍지로 삼아 사실상 왕조를 건국한다. 삼한 통합을 공언한 건 이 무렵으로 보인다. 901년 고려를 건국한 궁예의 즉위 일성(一聲)은 의미심장하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여, 평양의 옛 도읍이 무성한 잡초로 덮였다. 나는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삼국사기』권50 궁예 열전)



 



궁예는 옛 고구려의 역사와 영광을 회복하고 계승하는 삼한 통합을 천명하여 정통 왕조 신라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의 국가 경영 의지는 국호에 잘 나타나 있다. 901년 건국 후 918년 왕건에게 쫓겨나기까지 궁예는 국호를 고려(901년), 마진(摩震, 904년), 태봉(泰封, 911년)으로 세 번이나 바꾼다. 18년짜리 나라에서 국호가 이렇게 바뀐 예는 이례적이다.



첫 번째 국호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뜻이다. 고구려의 역사와 영토를 계승하겠다는 궁예의 취임 일성이 고려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이다. 건국 당시 궁예가 지배한 지역은 대부분 옛 고구려의 영토였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국가를 건국했기 때문에 이곳 세력의 호응을 얻기 위해 국호를 그렇게 정했던 것이다. 두 번째 국호 마진(摩震)은 범어 ‘마하진단(摩河震旦)’의 약칭이다. 마하는 ‘크다’, 진단은 동방을 뜻하여, 마진은 ‘대동방국’의 뜻이다.(이병도, 『진단변(震檀辨)』) 궁예는 특정 국가를 계승하는 통일 정책을 버리고 고구려·신라·백제를 아우르는 ‘대동방국’ 건설이란 새로운 통일 정책으로 전환한다. 국호 마진에는 그런 상징성이 담겨 있다. 세 번째 국호 태봉(泰封)의 ‘태’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봉’은 봉토, 즉 영토다.(이병도, 『삼국사기 역주』) 즉 ‘태봉’은 서로 뜻을 같이해 화합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고구려·신라·백제를 아울러 조화를 이룬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궁예의 이상이 담겨 있다.?



 



궁예의 근거지 철원에 도피안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곳에 865년 제작된 금박을 입힌 쇠로 만든 비로자나불이 있다. 이 불상 뒷면에 새겨진 글 속에, 석가불 입적 후 천년이 지나면 말세가 오는 것을 슬퍼하며 이를 구제할 미륵불의 도래를 염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궁예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약 1세대 전이다. 궁예가 이곳 철원을 도읍지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염원을 갈구한 이 지역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궁예가 미륵불로 자처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궁예는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미륵의 이상향 용화세계를 태봉이라는 국호에 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에 불과했다. 고구려 계승의식을 지지한 송악의 왕건을 비롯한 옛 고구려 지역 출신 현실주의자의 반발은 필연적이었다. 궁예는 그로 인해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상주의 군주였던 궁예의 꿈은 현실의 기득권 연합세력에 산산조각 났다. “통일을 완성하지 못한 채 폭정과 인륜을 저버렸다”는 평가는 현실주의자들의 매서운 반격을 담은 선고였다.



졸지에 왕위를 빼앗기고 유폐된 견훤은 석 달 뒤인 935년 6월 처자식을 데리고 금산사를 탈출, 나주로 도망해 고려에 망명을 요청한다. 견훤이 귀순한 지 5개월 뒤인 그해 11월, 신라 경순왕은 직접 개경에 와 신라의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한다. 왕건은 그해 12월 항복을 받아들인다.



 



견훤은 고려 귀순 1년 뒤인 936년(태조19) 6월, 왕건에게 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아들이자 후백제의 왕인 신검(神劒)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한다. 같은 달 왕건은 마침내 출정 명령을 내린다. 신검은 동생·문무백관들과 함께 고려군에 항복한다. 왕건은 이해 12월 견훤의 무덤에서 가까운 곳에 개태사(開泰寺:논산시 연산면)란 사찰을 창건하고 직접 법회를 연 뒤 다음과 같은 글을 짓는다.



- 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제315호 2013년 3월 23일, 제316호 2013년 3월 30일, 제317호 2013년 4월 7일, 제318호 2013년 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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