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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를 가다-마케도니아·몬테네그로] 중세의 낭만 품은 유럽의 숨은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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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네그로 로브첸산에서 내려다 본 코토르의 전경.

3개 학회가 공동 주최하는 하계 국제컨퍼런스가 발칸반도에서 열릴 예정이라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불현듯 오래된 기억 속에서 내전으로 파괴된 도시의 이미지와 ‘유럽의 화약고, 발칸’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드리아해의 절경, 300만년 넘은 오흐리드 호수, 예술·무역의 중심지 코토르

1991년 5월부터 1992년 8월까지 필자가 모 일간지의 국제부에 근무하면서 유럽과 소련을 담당하던 시절,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이슈가 바로 유고연방의 분열과 내전이었다. 발칸반도의 다민족국가 유고슬라비아는 각기 다른 종교와 역사, 복잡한 민족 구성으로 모자이크에 비유됐다.

세계사 시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들의 이름 때문에 헷갈렸고 영어와는 생판 다른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인명이나 지명을 우리말로 표기하기 위해 전문가를 찾아 자문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4반세기가 흘렀다. 저마다 뿔뿔이 갈라져 독립한 그 나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쟁의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을까?

호기심이 당겼다. 7월 12~23일 그리스 아테네부터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를 거쳐 잘스부르크에서 뮌헨까지 52명 일행이 대형 버스로 2300km를 이동하는 대장정이었다. 고민 끝에 거금을 내고 막판에 참가신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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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네그로 코토르 구시가지(위쪽)와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

유고연방의 역사 : 서기 2세기 로마제국 영토에 편입된 이후 4~15세기 동로마(비잔틴)제국과 16~19세기 오스만터키 지배를 거쳐 1876년 독립한 세르비아왕국은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암살사건으로 1차 대전에 휩쓸렸다가 승리하자 1918년 세르비아 민족 중심의 1차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건설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강성을 원치 않았던 1차 대전 승전국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세르비아에 합병시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을 만들었다. 여기에 몬테네그로까지 합병하면서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1차 대전 전승 강대국들의 이익에 맞게 건설된 유고슬라비아는 복잡한 다민족 국가답게 민족·종교·이념 갈등으로 분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상 속에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해 유고왕국은 1941년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나치점령에 항거하는 게릴라그룹 가운데 요시프 티토가 이끄는 인민해방군이 주도권을 잡았다.

2차 대전이 끝나자 티토를 국가원수로 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공산주의 이념과 티토의 지배 아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등 6개의 공화국과 코소보, 보이보디나 등 2개의 자치주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는 35년 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사망하자 잠재돼 있던 지역 갈등과 민족 갈등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1989년 슬로보단 밀로세비치가 권좌에 올라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자 1991년 6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시작으로 9월에는 마케도니아, 다음해인 1992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잇따라 연방 탈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에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진압군 병력을 파견해 내전 상태로 빠져들었다. 연방에 남아있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1992년 신유고연방을 선포하며 유고연방의 명맥을 유지하려 했지만 두 나라 간에도 갈등이 증폭돼 2006년 5월 몬테네그로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6개 공화국으로 분열됐다. 더구나 2008년 세르비아 영내의 코소보 자치주까지 독립을 선포해 유고슬라비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마케도니아 : 국토 면적이 남한의 27% 수준인 발칸 남부의 내륙 산악국가다. 인구는 206만 명이지만 정교를 믿는 마케도니아인이 65%, 이슬람교를 믿는 알바니아계가 25%, 집시가 9.6%로 구성이 다양하다. 특히 유럽에서 전체 인구 대비 집시의 비율이 불가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아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간혹 집시 정착촌을 볼 수 있다.

메테오라수도원이 있는 그리스 칼람파카(Kalampaka)마을에서 국경을 거쳐 오흐리드(Ohrid)에 도착하기까지 280km를 달리는 데 대형버스로 5시간이 걸렸다. 로마제국, 불가리아왕국, 비잔틴제국, 세르비아 왕국, 오스만제국, 유고연방과 연방 해체 후 독립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이 발칸의 다른 나라와 비슷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마케도니아는 1991년 독립선언 이후 그리스의 완강한 반대로 국제사회의 승인이 늦어져 1993년에야 UN에 가입할 수 있었다. 같은 이름의 주가 그리스에 있고 거슬러 올라가면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제국이 그리스 역사의 일부이기에 마케도니아란 국명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리스의 반대 이유였다.

현재 134개국이 마케도니아 국명을 인정하고 있으나 유럽연합(EU) 회원국인 그리스와의 외교관계를 고려한 한국 정부의 수교 연기 결정으로 마케도니아는 쿠바·시리아와 함께 한국의 미수교국으로 남아있다. 그래선지 국경검문소를 통과하는데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2800m 높이의 산과 바다 같이 드넓은 호수로 둘러싸인 오흐리드는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어, 198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300만 년이나 됐다는 호수 주변은 유럽에서 인류가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라고 한다. 수심 290m, 면적 450㎢에 이르는 오흐리드 호수의 3분의 2는 마케도니아, 3분의 1은 알바니아 땅이다.

오흐리드는 BC 148년경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군사와 무역의 중심지였고 10~11세기에는 제1 불가리아왕국의 수도이자 마케도니아 정교회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바위를 뜻하는 ‘흐리드(hrid)’에서 지명이 유래한 것처럼 오흐리드의 역사는 바위산 위에 축조된 성곽과 올드 타운 곳곳에 남아있는 비잔틴 양식의 교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때 365개의 교회가 있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듯하다.

절벽 위에 자리잡은 성 클리멘트(St. Climent)성당은 오흐리드의 수호성인으로 일컬어지는 클리멘트의 유해가 보관된 곳으로, 1295년에 지어진 교회의 모습을 복원한 것이다. 성 클리멘트는 893년 성 판텔레이몬 수도원을 건립하고 최초의 슬라브대학을 세워 헬라어로 된 성경을키릴 문자로 번역하고 문학작품을 집필했으며 선교사를 양성했다.

현재 키릴 문자는 동유럽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중앙아시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슬라브어족에 속하는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다. 투명하고 깨끗한 오흐리드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 자리잡은 성 요한 카네오(St. John Caneo)성당의 절경(絶景)은 요정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1세기 초 불가리아 왕국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세워졌다는 성 소피아성당은 오스만제국 시절 내부 프레스코 벽화를 석회로 덧칠해서 모스크(이슬람교 사원)로 사용한 덕분에 예수 승천, 성모좌상 등 잘 보존된 비잔틴 양식의 벽화를 복원할 수 있었다.

사무일왕 요새에서 내려오는 길 중간에는 기원전 200년경 세워진 그리스식 원형경기장이 있는데, 동전 떨어지는 소리도 잘 들릴 정도로 음향 설계가 잘 되어 있어 매년 오흐리드 여름 축제가 여기서 열린다.

몬테네그로 : 인구 68만 명, 국토는 남한 면적의 15% 수준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어 방언으로 ‘검은 산’이라는 의미의 나라 이름이 말해주듯 험준한 내륙 산악과 해안 절벽으로 이뤄져 있다. 두르미토르산(2522m)등 해발 2000m에 가까운 산이 여럿 있다.

이런 점에선 이웃 알바니아와 비슷하지만 백사장만 72km, 아드리아해와 맞닿은 총 연장 259km의 아름다운 해안을 갖고 있어 해양관광과 레저 등 휴양지가 잘 발달돼있다.

여행 4일째,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서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까지 195km 거리를 4시간 만에 도착했다. 포드고리차는 한 국가의 수도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일행이 묵기로 한 라마다 호텔이 그나마 몇 안 되는 현대식 건물로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포드고리차는 인구 13만5000명으로 비잔틴 시대엔 중요한 대상로(隊商路)였고, 2차 대전 때 70여 회의 폭격을 당하기도 했다. 1946년 ‘티토그라드’라는 이름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내의 몬테네그로의 수도가 되었고, 연방 붕괴 후인 1992년 옛 이름으로 복귀했다.

7월 17일 아침 영원히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포드고리차에서 코토르까지 해발 1749m의 로브첸산 비탈을 굽이굽이 도는 해안 도로는 경사가 심한 절벽에 가드레일도 없는 외길이었다. 대관령이나 문경새재 옛길은 비교가 되지 않는 가파른 산세다.

61인승, 바퀴 여섯 개짜리 대형 버스가 한 굽이를 돌 때마다 아찔아찔했다. 조금이라도 핸들을 잘못 틀었다가는 그대로 낭떠러지로 추락하게 될 형국, 손끝 발끝이 저려왔다. 더구나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비탈에는 사고 난 자동차의 잔해가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세 시간 가까이 산을 넘는 동안 일행 모두가 까마득히 높은 곳에 매달린 외줄타기 곡예사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핸들을 이리저리 틀어가며 끝없이 이어지는 구절양장 길을 따라가면서 반대쪽에서 차가 오면 수시로 후진까지 하는 크로아티아 출신 운전기사의 운전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 지옥 같은 두어 시간이 지나고 평지에 접어들자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절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코토르(Kotor) 만(灣)을 뱀처럼 굽이굽이 돌고 돌아 평화로운 작은 섬을 스쳐 지난 후 드디어 가장 안쪽에 위치한 코토르에 도착했다. 앞으로는 쪽빛 아드리아해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험준한 로브첸산, 양 옆은 견고한 해자와 성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다.

‘검은 숲’이란 뜻을 가진 코토르는 고대 로마의 식민지로 출발해 세르비아 왕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 아래 해상 무역의 거점으로 발전해왔다. 베네치아 지배의 흔적은 지금도 성벽 곳곳에 남아있는 날개달린 사자 부조(浮彫)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에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바다의 문’이라고 불리는 서문 앞 관광안내소에선 한글로 된 안내지도를 받아볼 수 있다.

중세시대 석공술이 발달하고 조상(彫像)연구학교가 있었던 예술과 무역의 중심지답게 코토르 구시가지의 석조 건축물과 기념물은 고색창연하고 정연하다. 공예품·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선 골목을 기웃거리는 묘미가 쏠쏠하다. 여행자는 코토르가 간직한 묵직한 세월의 두께를 수많은 사람이 오가며 반들반들하게 닳아버린 길바닥의 포석에서 새삼 확인한다.

김세원 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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