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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아키히토의 생전 퇴위 회견은 ‘인간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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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헌법 1~8조가 일왕 관련이지만
실질 권력 없는 상징적 존재
결혼·퇴위도 정부 승인 필요
한·일 현안 관련 과잉 해석 금물

일본학연구소장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비디오 회견을 통해 ‘생전 퇴위’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일본사회에 큰 파문이 일고 있다. 신문은 호외를 발행하고 방송은 특별프로그램을 편성해 보도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본 정치권과 국민들은 이를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일왕의 생전 퇴위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실현 가능한 실질적 방안을 모색하고자 부심하고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 퇴위가 가능토록 하는 특별법 제정을 검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듯하다.

전 세계에는 입헌군주제든 절대군주제든 왕을 모시고 있는 국가가 41개국이나 되지만 일본의 상징 천황제는 독특한 제도다. 전후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사령부는 일왕의 전쟁 책임을 정면으로 추궁할 경우 초래될 극심한 반발과 사회적 혼란 그리고 점령 통치의 안정과 효율성을 고려해 일왕을 처벌하지 않고 존치하기로 결정했다. 이어서 헌법 제정을 통해 일왕의 존재 방식을 상징 천왕제로 못 박았다. 나중에 평화헌법으로 불리게 된 이 헌법은 놀랍게도 일왕의 법적 지위 및 역할을 규정하는 데 제1조부터 제8조까지를 할애하고 있다. 상징 천황제는 일왕으로부터 실질적 정치권력을 박탈하고 일왕이 다시는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대신 국가와 국민통합의 상징으로만 존재하도록 규정했다. 일왕은 외교사절에 대한 신임장 제정 및 국가행사 참여, 재난지역 방문 등 국사 행위 혹은 공무로 일컬어지는 일에만 참여할 뿐 일체의 정치행위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일왕의 이름으로 병탄되어 황국신민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받았던 굴욕의 역사를 기억하는 우리로선 천황제 자체에 대해 거부감과 더불어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왕 아키히토는 일 왕실의 백제계 혈통과의 인연을 주장하는 파격적 언사를 구사했고, 식민통치 역사에 대해서는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명한 바 있다.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생전에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만약 생전에 그의 방한이 이뤄진다면 과거사 사죄로 한·일 간의 역사 갈등을 매듭짓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없지 않았다. 아마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일왕 사과요구 발언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맥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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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내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우익과 보수 세력의 지존이자 극진한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여전히 신적인 존재다. 또 한편으로 진보 세력에게는 그가 자유주의 이념과 평화사상을 지닌 평화헌법의 수호자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그는 1978년 야스쿠니에 A급 전범이 합사된 것에 크게 반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그 후 야스쿠니 참배를 중단했다. 사이판 방문 시에는 한국인 전몰자 위령비에도 참배한 바 있어 역사 화해와 평화 애호의 이미지가 구축되기도 했다. 진보 일각에서는 일왕의 생전 퇴위 의사표명을 두고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개헌 움직임에 일격을 가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일부 우익세력은 일왕의 생전 퇴위가 가능하도록 차제에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양측 모두 일왕의 발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린 아전인수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89년에 왕위를 계승받은 이래 27년이 경과했다. 현재 82세 고령으로 두 차례의 수술과 병환으로 공무를 수행하기에 벅찬 건강 상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일왕의 생전 퇴위 의사 표명은 고령과 질병으로 인해 더 이상 공무수행이 어렵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의 표명이자 이제 왕위라는 보직을 해제해 달라는, 명예퇴직을 허용해 달라는 절규가 아닐까 생각된다. 일왕의 왕위 계승을 규정하고 있는 현행 헌법과 황실전범은 생전 퇴위를 상정하지 않고 공무수행이 어려울 경우 섭정을 둘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일왕은 애초부터 헌법이 기본적 권리로 보장하고 있는 ‘직업 선택의 자유’도 박탈당한 채, 세습에 의해 강제로 왕위에 취임해 지위를 벗어날 자유도 없이 죽을 때까지 공무를 수행해야 하는 운명을 법적으로 강요받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결혼조차 정부의 승인을 필요로 할 정도로, 자신의 의사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헌법상 상징인 천황은 일본 국민의 총의와 절대적인 존경과 경외심에 갇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조차 없다.

전후 70년간 일왕은 큰 재해를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국가 행사나 역사적 제전에 참가해 자리를 빛내는 이른바 ‘공무’를 수행토록 강요받아 왔다. 일왕이 지닌 카리스마와 권위를 최대한 이용해 애국심과 국민 통합의 고양을 꾀해 온 것이 지금의 상징 천황제하의 일왕의 존재 방식이다. 일왕의 생전 퇴위 희망은 고령화사회 일본에서 병들고 힘든 노인의 퇴직할 권리와 실존적인 고뇌를 토로한 ‘인간 선언’은 아닐까?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일본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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