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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26 - 태어나려는 자,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갈릴리 호숫가에 군중이 모였다. 다들 예수에게 다가가려고 서로 밀고 당겼을까. 예수는 아예 배에 올랐다. 그리고 뭍에서 조금 떨어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차분해졌으리라. 예수는 호숫가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배에 앉았다.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서 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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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티소 작 ‘배에서 설교하는 예수’. 호숫가에서 예수의 설교를 듣는 이들 중에는 갓난 아이를 업거나 안고 있는 여인들도 보인다. 예수의 메시지가 유대인의 일상을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 씨를 뿌렸다. 어떤 씨는 길에 떨어져 새가 와서 먹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졌다. 돌밭은 흙이 깊지 않아 뿌리가 얕았다. 싹이 돋았지만 결국 해가 솟아오르자 타버리고 말았다.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졌다.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했다. 또 다른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어떤 것은 30배, 어떤 것은 60배, 어떤 것은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 말끝에 예수는 이렇게 당부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복음 4장1~9절)

이 일화는 곳곳에서 수시로 인용된다. 그리고 다양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너는 교회에 다니니까 이미 좋은 밭이다. 그러니 100배의 열매를 맺을 거다” “좋은 밭이 되려면 교회 출석을 잘해야 한다. 헌금도 잘하고, 교회를 위한 봉사활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밭이 되지 않겠는가” “불신자들의 밭은 돌밭이고, 가시덤불이다. 믿는 이들의 밭은 다르다. 100배의 열매가 보장돼 있다. 천국이 그런 곳이 아니겠나. 100배의 열매가 열리는 곳이 아니겠나. 그러니 열심히 믿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는다. “믿습니다!”라고 큰소리로 외치며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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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 주위의 산촌에도 밭이 있다. 앞쪽에 가시덤불이 있고, 그 뒤로 좋은 밭, 다시 그 너머로 돌밭이 보인다. 갈릴리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갈릴리 호숫가를 걸었다. 물음이 올라왔다. 과연 그런 식의 믿음일까. 그렇게 소리친다고 믿어지는 믿음일까. 그럼 그게 교리로 무장한 신념체계와 무엇이 다른 걸까. 그리스도교가 그런 신념체계에 불과한 걸까. 예수가 말한 ‘씨앗’은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기독교주의’가 아니었다. 그러한 ‘~이즘’이 아니었다. 행여 ‘그런 신념체계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강고한 믿음이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큰 착각이다. 그런 생각은 결국 ‘근본주의자’를 낳고 만다. 어찌 보면 그들이야말로 돌밭에서 예수의 씨앗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말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마가복음 4장14절) 예수가 뿌리는 씨앗, 그 정체는 ‘말씀’이다. 그러니 예수는 말씀을 뿌린다. 그 말씀에 ‘이치’가 담겨 있다. 나와 이웃, 하느님 나라와 신의 속성이 어떻게 숨을 쉬고, 작동하고, 통하는가를 풀어주는 ‘이치’다. 그러한 이치의 씨앗이 여기에도 ‘툭!’, 저기에도 ‘툭!’, 이쪽 밭에도 ‘툭!툭!’, 저쪽 밭에도 ‘툭!툭!’ 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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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일화를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남긴 헤럴드 코핑(1863~1932) 작 ‘씨 뿌리는 사람’. 유대인 복장을 한 남자가 씨를 뿌리고 있다.

그럼 나의 밭에 떨어진 예수의 씨앗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게 핵심이다. ‘나는 세례도 받았고, 예수님도 믿고, 주일마다 교회도 빠짐없이 다닌다. 그러니 그 씨앗은 알아서 잘 자라겠지.’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왜 그럴까. 나의 밭이 돌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밭의 종류가 처음부터 정해진 건 아니다. 우리가 ‘씨앗’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돌밭이 되기도 하고, 길바닥이 되기도 하고, 좋은 밭이 되기도 한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예수가 뿌린 씨앗에서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려면 말이다. 답은 의외로 간명하다. 암탉이 되면 된다. 알을 품어서 병아리를 부화시키는 한 마리의 암탉이 되면 된다. 왜 그럴까. 예수의 씨앗(말씀)이 일종의 달걀이기 때문이다. 그냥 달걀이 아니다. 이치를 담고 있는 달걀이다. 그래서 부화를 시켜야 한다. 알이 부화할 때 속에 담긴 이치도 함께 깨어난다. 그렇게 깨어난 이치가 나를 통해 살게 된다. 예수가 뿌린 씨앗은 그런 식으로 싹이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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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지는 갈릴리 호수 위를 새들이 날고 있다. 저녁 노을과 호수의 물결이 독특한 화음을 빚어낸다.

헤르만 헤세는 소설 『데미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고 한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마찬가지다. 성경 속의 이치가 깨어날 때도 그렇다. 하나의 세계가 파괴된다. 이치를 거스르는 나의 착각과 오해, 그리고 고집이 파괴된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가 부서진다. 그들이 파괴될 때 비로소 새가 알에서 깨어난다. 그렇게 깨어난 새는 자유롭게 삶을 비행한다.

사람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단박에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비유를 들었다. 그래도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예수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다그치기도 했다. 얼마나 속이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마가복음 4장13절) 예수도 강조했다. ‘비유를 알아들어야’ 하고, ‘비유를 깨달아야’한다. 그래야 예수가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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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 작렬하는 태양과 먹이를 보고 날아온 새들이 보인다. 내가 품은 씨앗에서는 과연 싹이 틀까.

제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마가복음 4장11절) 예수는 복음서를 관통하며 숱한 씨앗을 뿌린 이유를 정확하게 밝혔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 때문이다. 영어로는 ‘The secret of the kingdom of God’이다.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신비’에 해당하는 단어는 ‘musterion’이다. ‘닫혀져 있다, 잠겨져 있다(closed-keep)’는 뜻이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는 자물쇠가 있다. 예수가 뿌린 씨앗(말씀)에도 자물쇠가 있다. 우리가 할 일은 비유에 담긴 자물쇠를 푸는 일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떡해야 자물쇠를 풀 수 있나?” “그럼 예수의 씨앗을 어떻게 품어야 하나?” “어떻게 하면 암탉이 될 수 있나. 알을 품는다는 게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는 오래 세월 내려오는 ‘암탉의 전통’이 있다. 예수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숱한 수도자들이 ‘좋은 밭’이 되고자 애를 썼다. 그들은 광야로 떠났다. 팍팍한 사막의 동굴에서 거하며 예수가 뿌렸던 씨앗(말씀)을 품었다. 자신의 내면에서 싹을 틔우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은수자(隱修者)’라 부른다. 그렇다면 암탉이 되기 위해 우리도 이스라엘의 광야로 가야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취업의 전쟁터에서 바쁘게 다니는 학교가 광야다. 아이들을 키우며 출퇴근해야 하는 바쁜 일상이 광야다. 거기서 우리는 얼마든지 ‘암탉’이 될 수 있다. 핵심은 ‘어디에서 알을 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알을 품느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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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 주변의 산촌 풍경. 예수도 저런 언덕에 난 길들을 걸으며 설교를 했다. 길 옆에는 지금도 이런저런 밭들이 보인다.

씨앗이 한 톨 떨어진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그게 나의 밭에 떨어진다. 그 다음에는 어떡해야 할까. 그 씨앗을 품어야 한다. 그래야 싹이 틀 테니까. 그런데 씨앗에서 싹이 트는 데는 온기가 필요하다. 암탉이 달걀을 품을 때도 그렇다. 거기에는 적정한 온도가 있어야 한다. 가슴에 알을 품고서 암탉이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어찌 될까. 따듯한 온기가 생겨난다. 그게 알을 깨운다. 예수의 말씀을 품을 때도 마찬가지다. 온기가 필요하다. 적정한 온도가 있어야 씨앗에서 싹이 튼다. 그게 뭘까. 예수의 말씀에서 싹이 트게 하는 따듯한 기운이 대체 뭘까.

다름 아닌 ‘물음’이다. 내 안으로 깊이 던지는 물음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예수님은 왜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을까?” 그렇게 물음을 던지고 나면 내 안에서 답이 올라온다. “이웃을 사랑하면 ‘평화’가 생길 테니까.” 그 답을 물고서 다시 물음을 던진다. “그런 평화가 왜 나에게 필요하지?”답이 떠오른다. “그 평화로 인해 내 삶이 평화로워질 테니까.” 다시 물음을 던진다. “그럼 그 이웃이 누구일까? 누가 나의 이웃이지?” 다시 답이 올라온다. “나의 하루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겠지.” 이렇게 답을 물고서 다시 물음을 던지면 된다. “그럼 예수님은 왜 그 사람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을까? 나의 몸은 나의 몸이고, 그들의 몸은 그들의 몸인데. 왜 굳이 ‘내 몸과 같이’라고 강조했을까?” 이렇게 물음과 답을 던지는 와중에 ‘온기’가 생겨난다. 그 온기로 인해 물음도 깊어지고, 답은 더 깊어진다.

어떤 물음은 바로 답이 올라온다. 어떤 물음은 그렇지 않다. 금방 답이 올라오지 않는다. 그런 물음은 더 깊이, 더 오래 던져야 한다. 더 절박하게 물어야 한다. 때로는 하루 만에, 때로는 일주일 만에, 때로는 한 달 만에 답이 올라온다. 그럴 때 내 안의 우물, 즉 신의 속성을 향해서 던진 두레박이 더 깊이 떨어진다. 그렇게 끊임없이 묻고 답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아하!”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예수의 씨앗이 싹 트는 순간이다. “아하, 그렇구나! 나와 이웃이 둘이 아니구나. ‘신의 속성’이라는 예수의 눈으로 보면 그게 하나의 몸이구나.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구나. 예수님 눈에는 그렇게 보이니까. ‘신의 속성’에서는 둘이 아니니까. 결국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자체가 신의 속성을 회복하는 길이구나!” 그렇게 자물쇠가 풀린다. 굳게 잠겨져 있던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내 안에서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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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밭은 어디일까. 예수의 씨앗을 어떻게 품는가에 따라 나의 밭이 달라진다. 길바닥이 될 수도, 돌밭이 될 수도, 좋은 밭이 될 수도 있다. 갈릴리 일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다. 예수도 저런 풍경을 배경으로 비유를 들었을 터이다.

그러니 밭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나의 밭은 돌밭, 너의 밭은 가시덤불, 그의 밭은 좋은 밭. 그렇게 선을 그을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의 밭에는 ‘신의 속성’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밭이 좋은 밭일까. 씨앗을 품고서 내 안으로 깊이 물음을 던지는 밭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밭이다. 그걸 통해 부화의 온기가 올라오는 밭이다. 그게 바로 ‘좋은 밭’이다. ‘예수의 씨앗’는 그런 밭에서 싹이 튼다. 그걸 통해 어떤 것은 30배, 어떤 것은 60배, 어떤 것은 100배의 열매가 맺는다.

예수는 성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가복음 4장26~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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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르 브뤼헐 작 ‘씨 뿌리는 사람’. 씨를 뿌리는 농부 뒤로 마을이 보인다. 그 뒤로 뾰족한 교회의 탑이 보인다. 어촌에는 배가 정박해 있고,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 있다. 마치 예수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이 대목을 ‘천국의 농사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느님 나라에는 땀흘려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다. 씨만 뿌려두면 저절로 자란다.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고, 이삭이 나오고, 낟알이 영근다. 우리가 할 일은 수확뿐이다. 그러니 천국의 삶이 얼마나 편하고 풍요롭겠나.” 이렇게 풀이한다. 여기에는 ‘천국의 삶=편한 삶, 풍요로운 삶’이라는 욕망의 등식이 깔려 있다. 그건 이 땅에서 우리가 꿈꾸는 욕망의 연장선이다. 천국의 삶이란 그렇게 단순한 걸까. ‘천국의 농사법’이 단지 그런 의미일까. 거기에는 하느님 나라의 더 깊은 신비가 담겨 있다.

우리는 저마다 밭을 가지고 있다. 그 밭이 돌밭이 되면 예수의 씨앗을 깊이 심을 수가 없다. 흙이 얕으면 뿌리도 얕게 마련이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뿌리째 뽑히고 만다. 그래서 씨앗을 깊이 심어야 한다. 그럼 어떡해야 씨앗이 깊이 심어질까. 그렇다. 씨앗을 품고서 내 안으로 깊이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럴 때 씨앗이 깊이 심어진다. ‘천국의 농사법’은 여기서부터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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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위로 오른 예수가 사람들을 향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며 설교를 하고 있다. 물가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천진난만하다.

깊이 심는 물음일수록 어려운 물음이다. 난해한 물음이다. 금방 답이 올라오지 않는다. 그런데 참 놀랍다. 어떤 물음은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물음을 내 안에 깊이 심어두고서 잠이 든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다가 문득 답이 떠오른다. “아하! 그거였구나” 그렇게 싹이 튼다. 사람들은 대부분 우연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우연이 아니다. 어젯밤에 내가 심은 물음의 씨앗이 밤새 자랐기 때문이다. 그게 샤워할 때 ‘툭!’하고 땅을 뚫고 나온 것이다.

절집에서는 그런 순간을 ‘깨달음의 순간’이라 부른다. 붓다는 새벽별을 보다가 깨달았고, 어떤 선사는 해우소(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다가 깨달았고, 또 어떤 선사는 방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다가 깨달았다. ‘와장창!’하고 그릇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서 깨달은 이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벽별을 중시하고, 해우소와 문고리와 그릇 깨지는 소리를 중시한다. 거기에 ‘깨달음의 단초’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다. 그런 순간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오래전에 심어둔 물음의 씨앗이 자라고 자라서 그 순간에 ‘툭!’하고 싹이 텄을 뿐이다.

예수가 설하는 ‘하느님 나라의 농사법’은 참 오묘하다. 씨앗은 왜 저절로 자랄까. 왜 싹은 저절로 트고, 이삭은 저절로 나오고, 낟알은 저절로 영그는 걸까. 왜 밤에 잠을 동안에도 계속 자라는 걸까. 여기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숨어 있다. 신은 인간을 빚을 때 ‘신의 속성’을 불어넣었다. 그러니 우리 안에는 ‘신의 속성’이 있다. 다만 선악과의 후유증으로 인해 잠들어 있을 뿐이다. 예수는 그걸 깨우고자 했다. 그래서 씨앗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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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얀 브뤼헐 작 ‘갈릴리 호수에서 설교하는 예수’. 군중이 모여 있고 저 멀리 예수가 배 위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나의 밭이 좋은 밭이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예수의 씨앗을 깊이 심어야 한다. 예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럴 때 씨앗이 내 안에 깊이 떨어진다. 잠들어 있는 ‘신의 속성’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가 예수의 말씀을 품고서 끊임없이 묻고 답할 때 씨앗은 더 깊이 내려간다. 그 와중에 온기가 생겨나고 씨앗에서 뿌리가 나온다. 깊이 심은 씨앗은 어디에서 양분을 취할까. 다름 아닌 ‘신의 속성’이다. 그래서 저절로 자란다. 저절로 싹이 트고, 저절로 줄기가 올라오고, 저절로 이삭과 낟알이 영근다. 그게 ‘하느님 나라의 농사법’이다. 그런 신비가 ‘씨 뿌리는 사람’의 일화에 녹아 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빗댔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가복음 4장31~32절) 그런 땅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 안에 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 그런 땅이 있다. ‘신의 속성’이 잠들어 있는 무궁무진(無窮無盡)한 땅이다.

그런 땅에 겨자씨 한 톨이 떨어진다. 예수의 말씀이 떨어진다.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의 밭은 돌밭인가? 아니면 좋은 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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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세계가 파괴될 때 새는 알에서 깨어난다. 내가 만든 에고의 잣대가 무너질 때 ‘신의 속성’이 깨어난다.

<27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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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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