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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25 - 하혈하는 여인의 출혈은 왜 멈추었나

예수가 가면 군중도 따라갔다. 마가복음에는 그런 장면이 있다. 예수는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갔다. 그러자 군중이 예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몸이 아픈 이도 있고, 마음이 아픈 이도 있었다. 그때 유대교 회당을 책임지고 있는 회당장이 와서 예수 앞에 엎드렸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5장23절) 그 말을 듣고 예수는 길을 나섰다. 지금도 호수 북쪽의 가버나움에는 유대교 회당의 유적이 있다. 이 일화의 배경은 가버나움 일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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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 북부의 마을 가버나움에는 지금도 유대교 회당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사람들은 절박하게 예수를 찾는다. ‘고통’이나 ‘죽음’과 마주할 때 특히 그렇다. 그건 우리의 삶이 결국 ‘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인생에서 마주치는 그 모든 기쁨(喜)과 분노(怒), 슬픔(哀)과 즐거움(樂)이 실은 ‘순간’이다. 지독한 고통이나 허무한 죽음과 대면할 때 그런 ‘순간의 헛헛함’은 극도로 증폭된다. 존재의 바닥마저 푹 꺼져버리는 텅 빈 공허. 그것을 껴안고 우리는 갈망한다. ‘순간’을 넘어서는 순간, 그런 영원의 순간을 꿈꾼다. ‘치유’라는 이름으로,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예수의 뒤를 군중이 따라갔다. 사람들은 서로 밀치며 엉켜있었다. 그 속에 한 여인이 있었다. 무려 12년 동안 하혈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여인은 나이가 얼마나 됐을까. 만약 마흔 살이라 해도 20대 후반부터 하혈을 한 셈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성경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오히려 상태만 더 나빠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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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아스의 호텔 벽에 걸려 있던 판화. 갈릴리 호수 일대의 옛 모습을 담고 있다. 2000년 전의 갈릴리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나는 갈릴리 호숫가에 섰다. 찰싹찰싹, 자잘한 파도가 밀려왔다. 눈을 감았다. 하혈하는 여인. ‘그녀는 몸이 아팠겠지. 아픈 몸을 이끌고 호숫가로 나왔겠지. 예수라는 남자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예수 외에는 달리 기댈 곳이 없지 않았을까.’ 12년은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녀가 30대라면 자기 삶의 3분의 1, 40대라면 4분의 1을 고통의 나날 속에서 보낸 셈이다.

유대 사회는 철저한 율법 사회였다. 구약의 모세 때부터 그랬다. 여성이 월경을 할 때는 7일 동안 부정하다고 여겼다. 부정한 여인이 만지는 것은 모두 부정해진다고 믿었다. 그 여인이 깨끗해지려면 월경을 멈춘 후에 다시 7일이 지나야 했다. 그리고 8일째 되는 날에는 제사장에게 비둘기를 가져가 번제와 속죄제의 제물로 바쳐야 했다. 예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12년간 계속 하혈을 한 여인은 유대 사회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을 받았을 터이다. 남편과의 잠자리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물건에 손을 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철저하게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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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하는 예수. 로마의 지하무덤 카타콤베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나는 ‘하혈하는 여인’을 통해 ‘하혈하는 나’를 본다. 저마다 삶의 상처가 있다. 그래서 피를 흘린다. 깊이 박힌 상처에서는 더 오래 피가 흐른다. 10년, 아니 20년, 아니 30년이 지나도 피가 멈추지 않는다. 그때마다 우리는 의사를 찾아간다. 나름의 처방을 찾는다. 성경 속의 여인처럼 말이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 깊고 오래된 상처는 좀체 아물지 않는다. 왜 그럴까. ‘뿌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손만 대도 부정하게 된다고 여겨지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댔으니 말이다. 예수를 따라가던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밀쳤다. 몸이 아픈 여인은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예수의 옷자락, 그 끝에 손가락이라도 닿으려고 말이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가복음 5장28절)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몸에서 출혈이 멈추었다. 마가복음에는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사람들은 이 일화를 ‘예수의 이적’으로만 분류한다.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르다. 거기에는 ‘치유의 작동 원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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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레 비다(1823~1895)가 남긴 예수 생애의 동판화 연작 삽화. 한 손은 땅을 짚고 한 손은 예수의 옷자락을 향해서 뻗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절박해 보인다.

여인은 예수의 옷에 손을 댔다. 영어로는 ‘touching’이다. 그건 단순히 옷자락을 만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어 성서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손을) 대다’는 그리스어로 ‘hapsomai’다. 거기에는 ‘불을 밝히다(light)’‘(관심이나 감정에) 불을 붙이다(kindle)’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은 ‘불을 밝히는’ 일이었다. 여인의 마음에 ‘불을 붙이는’ 일이었다. 그 불로 인해 여인의 하혈이 멈추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 광경을 찬찬히 눈 앞에 떠올렸다. 여인이 손을 댄 것은 그저 옷자락이 아니었다. 직물로 짠 천 조각이 아니었다. 옷자락을 만졌다고 우리의 마음에 불이 켜지지는 않는다. 설사 그것이 예수의 옷자락이라 해도 말이다. 그럼 무엇이었을까. 여인이 손을 댄 것은 예수의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그것은 예수의 겉모습이 아니라 예수의 속모습이다. 예수 안에 깃든 ‘신의 속성’이다. 거기에 닿을 때 우리의 마음에 불이 켜진다. 하혈이 멈추고, 고통이 멈춘다. 왜 그럴까. ‘상처의 뿌리’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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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화가 파올로 베로네세의 작품 ‘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하는 예수’.

예수는 알아차렸다. 자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말이다. 그래서 군중을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반문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서로 밀쳐대는데,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물었다. 예수는 사방을 둘러봤다. 그때 여인이 앞으로 나아갔다.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가복음 5장34절)

예수의 대답은 다소 뜻밖이다. “나의 능력이 너를 구하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의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의 옷자락이 그녀를 구원했는데, 왜 예수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했을까. 나는 이 대목에서 ‘치유의 작동원리’를 읽는다.

여인은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부정한 여인이 손을 댔으니 상대방은 오염이 돼야 마땅하다. 하혈하는 여인이 손을 댔으니 예수는 부정한 사람이다. 결과는 거꾸로였다. 예수로 인해 오히려 하혈하는 여인이 깨끗해졌다. 그게 바로 빛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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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째 혈루증으로 고통받는 여인은 어둠에 잠겨 있다. 예수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손을 뻗을수록 빛이 드러난다.

어둠이 빛을 만지면 어찌 될까. 캄캄하게 될까. 어둠만 남게 될까. 아니다. 어둠이 빛이 된다. 그래서 여인의 내면에 불이 켜졌다(kindle). 그게 믿음이다. 어둠이 자기 안의 빛을 믿는 일. 그게 믿음이다. 자기 안의 빛을 깨닫는 일. 그게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도 말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그럴 때 ‘상처의 뿌리’가 소멸된다. 끝없이 상처에 양분을 공급해주던 ‘내 안의 어둠’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기독교 영성가 다석 유영모는 ‘별’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밤하늘의 별은 하느님이 앞 못 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점자(點字)로 보낸 메시지다. 생각이라는 마음의 손을 내밀고, 그 점자를 더듬어 읽어 하느님의 메시지를 읽어낸다.” ‘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한 예수의 일화’도 우리에게는 점자다. 단순한 이적 일화로만 읽기에는 속에 담긴 메시지가 자꾸만 반짝인다. 내 안에 흐르는 ‘신의 속성’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우리는 손을 내밀어 더듬더듬, 일화 속의 별들을 더듬는다. 그 별을 통해 새겨진 점자를 하나씩 둘씩 해독하며 우리는 걸음을 뗀다.

마침내 예수는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그의 딸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회당장에게 말했다.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가복음 5장36절) 집 앞에서 사람들은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었다. 예수는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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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 작 ‘야이로의 딸을 되살림’. 예수는 누워 있는 소녀를 향해 “달리아 굼!”이라고 말했다.

우리도 그렇다. 예수를 비웃는다. ‘우리 안에는 어둠뿐이다. 빛은 이미 죽었다. 삶은 순간이고, 고통은 영원하다.’ 우리가 보는 삶은 그렇다. 예수는 달리 말한다. 우리 안의 빛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비웃는다. 누가 봐도 죽었는데 아직 살아있다고 우기니 말이다. 회당장의 집에서 예수를 비웃었던 유대인들처럼, 우리도 예수를 비웃는다.

예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누워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탈리타 쿰!(Talitha, coumi!)”(마가복음 5장41절) 히브리어로 ‘소녀여, 일어나라!’는 뜻이다. 예수가 직접 사용했던 언어인 아람어로 하면 “달리다 굼!”이다. ‘달리다’는 ‘소녀’, ‘굼’은 ‘일어나다’는 의미다. 그러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성경에는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다녔다’고 돼 있다. 소녀의 나이는 12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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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낭만파 화가 조지 퍼시 제콤 후드 작 ‘예수와 야이로의 딸’. 예수의 오른편 뒤에서 소녀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의심쩍인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다.


이슬람 영성가 루미의 ‘거울’이라는 시를 감리교 이현주 목사는 이렇게 번역했다.

‘우리는 거울이자 그 속에 비치는 얼굴
순간의 영원을 맛보고 있다
우리는 고통이자 고통을 치료하는 약
달콤한 생수인 우리는 그것을 퍼내는 항아리’-『루미시초』중에서

루미는 노래한다. 우리는 거울이자, 그 속에 비치는 얼굴이라고. 그러니 안과 밖이 둘이 아니다. 어둠과 빛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둠이자, 그 속에 비치는 빛’이다. 너무 짧아서 우리가 절망하는 ‘삶의 순간들’조차 루미는 순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순간 속에 ‘영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미는 순간을 통해 영원을 맛본다. ‘고통’도 그렇게 노래한다. ‘우리는 고통이자, 고통을 치료하는 약.’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나의 능력이 너를 구한 것이 아니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말이다. 우리는 고통이자, 고통을 치료하는 약이니까. 우리는 어둠이지만, 그 속에 빛이 있으니까.

그것을 믿지 못하는 우리에게 예수는 말한다.
“달리다 굼!”
어둠은 어둠일 뿐이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예수는 또 말한다.
“달리다 굼!”
나의 상처는 너무나 깊어 결코 치유될 수 없다고 버티는 우리에게 예수는 말한다.
“달리다 굼!”
일어나라고. 소녀처럼, 하혈하는 여인처럼 일어나라고. 우리 안에 잠자는 빛을 향해 예수는 또 말한다.
“달리다 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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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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