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서소문 포럼] 유일호, 순둥이보다 호랑이였으면

기사 이미지

고현곤
신문제작담당

장기영 경제부총리가 취임한 1964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9%에 달했다. 취임 일성은 “6개월만 기다려달라”였다. ‘침수방지 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한국 경제를 난파선에 비유해 붙인 이름이었다. 장 부총리는 입버릇처럼 “물가 안정은 통일운동이며 독립운동”이라고 말했다. 정면 돌파하는 스타일이었다. 일단 저질러놓고, 문제가 생기면 수습했다. 90㎏ 넘는 거구여서 ‘왕초’ ‘불도저’라는 별칭이 붙어 다녔다. 소비자물가는 이듬해부터 10% 언저리로 뚝 떨어졌다.

69년 취임한 김학렬 경제부총리는 명석한 두뇌로 실무를 꿰뚫었다. 매사 예리하게 판단했다. 기인이기도 했다. 성에 차지 않는 부하에겐 욕설을 퍼부었다. 동료 장관을 면박주기도 했다. 어느 관료의 회고다. “S과장이 보고하다가 김 부총리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죠. 김 부총리가 결재서류를 냅다 집어던지고 욕을 했습니다. S과장이 뒤돌아서 나오는데,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문을 연다는 게 캐비닛을 열었다죠.”(김흥기 『영욕의 한국경제』, 김진 『청와대 비서실』)

불도저 장기영과 욕쟁이 김학렬은 거침없는 스타일 때문에 적이 많았다. 하지만 온몸을 던지는 열정으로 늘 경제정책의 중심이었다. 그 전통은 민주화 이후에도 이어졌다. 최각규·강경식·진념·전윤철·이헌재 부총리…. 경제부총리 역할을 한 이규성·강봉균·강만수·윤증현 장관…. 이름만 들어도 카리스마 넘치는 당대 최고의 경제관료들이 거쳐갔다. 고비 때마다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에서 폐지했던 경제부총리를 부활했다. 장기영·김학렬을 꿈꿨는지 모른다. 산적한 현안을 감안할 때 경제 컨트롤타워를 다시 만든 건 잘한 일이었다. 현오석·최경환·유일호 3명의 부총리를 배출했다. 그런데 필자만 느끼는 것일까. 존재감이 예전만 못하다. 장기영처럼 추진력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김학렬처럼 실무를 꿰차고 조직을 장악한 것도 아닌 듯하다.

유일호 부총리는 학자 출신으로 재선 의원을 지냈다. 지난해 초 국토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자 총선을 앞두고 경력 쌓기용이라는 구설에 올랐다. 실제로 출마하기 위해 8개월 만에 장관을 그만뒀다. 표밭을 갈다가 두 달 만에 경제부총리로 돌아왔다. 여기저기 저울질했다는 꼬리표가 달렸다. 반년이 넘도록 사람 좋은 ‘순둥이’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다. 경제가 평안할 땐 무색무취한 순둥이 부총리도 괜찮다. 하지만 요새처럼 어려울 땐 독하고 무서운 게 낫다. 무슨 수를 쓰든 경제를 살릴 수만 있다면.

한국판 양적완화를 놓고 유 부총리는 한국은행에 주도권을 뺏긴 채 끌려다녔다. 조선·해운 구조조정에선 처음에 발을 뺐다. 그는 “기업과 채권단이 구조조정을 자율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조조정 지휘를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떠맡았다. 논란이 커지자 뒤늦게 유 부총리가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시간만 지체됐다. 중차대한 구조조정은 당연히 부총리 몫이다. 경제부총리는 환부에 약을 바를지, 아니면 도려낼지를 결정하고 책임도 지는 자리다.

추가경정예산을 놓고도 유 부총리의 행보가 모호했다. 추경 가능성을 부인하다 5월에야 추경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시장은 부총리 입을 주시하고 있다. 추경이 불가피한 건 주지의 사실. 처음부터 하겠다고 밝히고, 자신 있게 밀어붙여야 했다. 우물쭈물하니 시장은 실망하고, 추경을 해도 효과가 반감된다.

유 부총리는 국회 저출산·고령화 특위에 1급 공무원을 대신 보내기로 했다가 의원들의 반발을 샀다. 기획재정부는 “저출산 주무 부처가 아니어서…”라고 해명했다. 저출산은 국가 존립의 문제다. 부총리가 앞장서 머리띠 두르고 ‘침수방지 대책위원회’를 만들어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최근엔 기재부 세제실장이 갈 자리를 정하지 못한 채 옷을 벗었다. 세제실장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센 1급 공무원 중 하나다. 승진을 못하고 그만둔 건 드문 일이다. 관료들은 똑똑하다. 집권 후반기에는 계산이 더 복잡해진다. 보스가 챙겨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유 부총리가 순둥이로 남아선 안 된다. 사람은 무섭고 고약해도 조직을 장악하고,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

고현곤 신문제작담당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