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56)

수신사 김홍집의 행차 온건개화파 김홍집은 1880년 일본에 다녀오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 척사파의 공격 표적이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 고종은 강화도조약 체결 20일 후인 재위 13년(1876) 2월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를 일본에 파견했다. 김기수는 견문록 일동기유(日東記游)에서 어떤 사람이 “왜인은 서양의 앞잡이이니 귀신이면서 창귀이고, 적이면서 간첩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적을 정도로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팽배했다. ? 고종은 개화로 방향을 선회했지만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조정에서 치열하게 토론하는 한편 구언(求言) 등의 방법으로 널리 의견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고종은 재위 18년(1881) 62명의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면서 동래부 암행어사라는 명목으로 비밀리에 서울을 떠나게 하는 식의 비밀주의를 취했다. 고종과 민씨 척족정권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드디어 고종에 대한 직접 비판이 등장했다. 고종 18년(1881) 윤7월 소두(疏頭) 홍재학(洪在鶴)을 비롯한 강원도의 유생들이 복합상소(伏閤上疏:대궐문 앞에 꿇어 엎드리는 상소)를 올려 비난한 것이다. 고종은 홍재학에게 고문을 가한 후 범상부도(犯上不道)로 단정해 서소문 밖에서 목을 베었다. 홍재학의 처형은 유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고종 19년(1882) 5월에는 충청도 유생 백낙관(白樂寬)이 남산에 봉화를 올린 끝에 원정(原情:억울한 일을 소하는 문서)을 올려 “지금 전하 한 몸이 태조의 나라를 뒤집어엎는 것은 왕업을 받들어 계승하는 도리에 매우 어긋나며, 자신 한 몸을 지키기 위해서 선왕의 법을 폐하고 생민(生民)의 피를 마르게 하고 있습니다(고종실록 19년 5월 4일).” ‘고종이 자신을 위해 선왕의 법을 폐하고 생민의 피를 마르게 한다’고 주장했으니 목숨을 건 상소였다. 고종은 백낙관을 중죄수를 가두는 의금부 남간(南間)에 가두고 국문했다.



[수험생과 부모가 함께 보는 NIE] -56- 개국군주 망국군주 고종 ④

? 청일전쟁의 승전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국회를 장악할 수 있었고, 메이지 일왕은 ‘신성한 천황’으로 격상되었다. 무엇보다 일본군이 국민의 군대로 격상했다. 1895년 4월 17일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李鴻章)이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의 핵심은 요동(遼東)반도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는 것이었지만, 제1조는 “조선국의 완전 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승인할 것”이었다.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일본은 조선 내정의 폐단 때문에 동학 같은 내란이 일어나는 것이라면서 고종 31년(1894) 6월 25일 김홍집(金弘集) 내각에게 군국기무처를 구성해 내정개혁에 나서게 했다. 김홍집 내각이 수행한 개혁정책이 갑오경장(甲午更張) 또는 갑오개혁이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일본이 조선에 문벌 타파 정권의 정부 이양 학교 설립 등의 내용을 담은 ‘5강(綱) 16조(條)’를 보내 시행하라고 권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이 조약들이 반드시 우리를 진정으로 위한 것도 아니지만 병에 쓰는 약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평가했다. 기회도 되고 위기도 될 수 있었던 갑오개혁의 이중성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같은 책에서 황현은 “개정된 신법이 반포되자 백성들은 모두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고 기뻐하면서, 서양법을 따르든 일본법을 따르든 다시 태어난 것처럼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 군국기무처는 개국 연호 사용 문벌과 양반·상민의 계급 타파 연좌제 폐지 공사(公私) 노비제도 폐지 등의 대개혁을 단행했다. 김홍집 내각은 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았는데 대원군의 성향은 이런 근대적 개혁과 맞지 않았다. 김홍집 내각은 ‘대원군의 교자(轎子)를 8명이 메게 하고, 순검(巡檢)이 호위한다’는 등의 의절(儀節)을 마련했다. 대원군이 평양관찰사 민병석(閔丙奭)에게 ‘청국에 대군을 보내 일본군을 축출하고 친일 세력을 숙청해 달라고 요청하라’는 밀서가 발각되면서 대원군은 물러나야 했다. 청나라에 납치되고도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대원군의 한계였다.

김홍집의 젊은 시절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은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려다 고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고종은 일본의 지지를 받는 박영효가 귀국하자 내무대신으로 삼아 개혁을 주도하게 했다. 이때 상황 변화가 발생했다.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요동반도 반환을 요구해 관철시킨 삼국간섭(三國干涉)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고종은 러시아에 기대는 한편 김홍집·박영효 내각의 개혁정책에 발목을 잡았다. 고종은 “작년(1894) 6월 이래로 칙령이나 재가 사항은 모두 짐(朕)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 없다”고 반박했다. 고종은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이 근대국가로 가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헌정 체제가 수립되면 왕권이 제약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그 직후 민씨 척족 계열의 심상훈(沈相薰)이 ‘박영효가 왕비를 살해하고 정부를 뒤엎을 음모를 꾀하고 있다’고 상주했고,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고종 부부는 친러파로 돌변했다. 17년 전 수신사 김홍집이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갖고 들어와 ‘러시아 세력을 막으려면 중국과 친하게 지내고, 일본과 결합하고,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당시 고종이 그에 동조해 큰 논란이 일어났던 데 비하면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청일전쟁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고종 부부가 러시아로 기울면서 일본의 입지가 약해지자 육군 중장 출신의 신임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극단의 무리수를 구상했다. 고종 32년(1895) 8월 20일 일본 낭인들이 궁궐에 난입해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사건 가담자인 고바야카와(小早川秀雄)는 “궁중의 중심 인물인 민후(閔后)를 제거해 러시아로 하여금 그 결탁할 당사자를 잃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양책(良策)이 없다”고 말했다. 조선이 친러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을 막기 위한 만행이란 뜻이다.



?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일본에 의해 사실상 유폐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춘생문(春生門)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0월 12일 친위 1대대 남만리(南萬里) 등 800여 명의 군인이 고종을 대궐 밖으로 대동하고 나와 정권을 장악하려다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군부대신 서리 어윤중(魚允中)에 의해 격퇴된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 공사 및 러시아 공사도 이번 사건을 묵인 혹은 교사한 혐의가 있다(‘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No. 466)”고 분석하면서 ‘국왕 탈취사건’이라고 불렀다. 고종은 각 열강과 각 정파 사이의 탈취 대상으로 전락했다. ? 이런 상황에서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면서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11월 15일 새벽 일본에 위협을 당한 고종은 “짐이 신민에 앞서 머리를 먼저 깎겠다”고 길게 탄식하면서 정병하(鄭秉夏)에게 머리를 깎게 하고 유길준에게 세자의 머리를 깎게 했다. 이에 반발하는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선 가운데 고종은 벼르던 김홍집 내각에 역전 승부수를 던졌다. 재위 33년(1896) 2월 11일 새벽 세자, 후궁 엄씨 등과 함께 궁녀들의 가마를 타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 것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경무관 안환(安桓)을 불러 김홍집 내각의 대신들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포살령(捕殺令)을 내렸다. 사람들이 도주를 권하자 김홍집은 “죽으면 죽었지 어찌 박영효처럼 역적이란 이름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죽음의 길로 나갔다. 조병하와 어윤중 등도 군중에게 살해되었고 유길준·장박·조의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 근대국가 수립을 꾀했던 갑오개혁은 고종에 의해 좌절되었다.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제거한 데 이어 온건 개화파도 제거했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이유에 대해 황현이 ‘헌정(憲政)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고종은 조선이 헌정국가로 가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삼국간섭에 이어 아관파천까지 당한 일본은 전쟁으로 러시아를 격퇴하고 조선을 차지하기로 결의했다.? 자국 주재 외국 공사관으로 망명한 상태에서도 고종은 시대에 뒤떨어진 전제국가를 꿈꾸고 있었지만 이미 근대국가 체제에 들어간 일본은 그런 고종의 제국을 먹이로 삼을 정도로 성장했던 것이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89호 2010년 10월 24일, 제192호 2010년 11월 14일



http://sunday.joins.com/archives/42431http://sunday.joins.com/archives/42434



[ NIE 칼럼 전체기사 바로보기]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