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44년전 그날, 8·3조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1972년 8월 3일 0시에 터진 ‘금융 쿠데타’ 
기사 이미지

1972년 8월 3일 태완선 경제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 경제3부 장관이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15호’를 공포하고 있다.

‘하룻밤 사이 경제계는 발칵 뒤집히고 상가는 놀라움에 어리둥절했다.’

1972년 8월 3일 중앙일보가 보도한 ‘심야 충격, 엇갈린 희비’라는 기사의 첫 문장이다. 72년 8월 2일 밤 11시 40분, 박정희 정부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경제의 성장과 안정에 관한 긴급명령 15호’, 이른바 8·3 사채동결 조치(이하 8·3조치)다.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발동된 8·3조치의 핵심 내용은 이렇다. ‘모든 기업은 72년 8월 2일 현재 보유하는 모든 사채를 정부에 신고해야 한다. 사채는 8월 3일자로 월이자 1.35%, 3년 거치 후 5년 분할상환으로 조정한다.’ 월 이자 1.35%는 연리로 16.2%다. 당시 시중 사채 금리는 40~50% 수준이었다.

쉽게 말해 기업이 진 사채 이자를 3분의 1로 깎아주고 갚는 날도 최장 8년 미뤄주겠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 물가상승률이 연평균 15%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정부가 기업들에 사실상 무이자 혜택을 준 것이나 다름없다. 시장경제를 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반시장적, 초법적 특혜였다. 8·3조치가 ‘금융 쿠데타’로 불리는 이유다.

# 1년 전 어느 날

71년 6월 11일,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이던 김용완 경성방직 회장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신덕균 신동방 회장과 함께 청와대를 찾았다. 이 자리에서 김 회장은 대통령에게 SOS를 보낸다. “각하, 수출 불황으로 가뜩이나 기업이 힘든데 40~50% 고리사채로 인해 더욱 어렵습니다.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고리사채의 금리부터 내리고 고리사채업자가 횡포를 부리는 것도 막아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기업이 살고 경제가 돌아갈 수 있습니다.(『코리안 미러클』중에서).”

박 전 대통령은 고심 끝에 당시 김용환 청와대 외자담당 비서관에게 밀명을 내린다. 훗날 재무부 장관과 4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용환 비서관은 71년 9월 비밀리에 사채동결 조치 작업을 추진할 팀을 꾸렸다.

이런 사실은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과 남덕우 재무부 장관, 김성환 한국은행 총재와 실무자 몇 사람을 제외하고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각료 대부분은 1년 후 8·3조치가 발표되기 2시간 전까지도 내용을 몰랐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용환 전 장관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채동결 비밀이 새나가면 사채업자가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받은 어음이 전부 쏟아져 나와요. 그러면 우리나라 기업 중에 살아남을 기업이 하나도 없죠. 다 파산합니다. 그때까지 쌓아올린 경제가 하루아침에 완전히 잿더미가 되는 것이거든요.” 나라의 운명을 걸고 벌인 위험천만한 작전이었다.

# 불가피했던 역사적 선택?
기사 이미지

8·3조치가 발령된 날, 은행 앞에 모인 시민들이 안내문을 읽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왜 그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8·3조치에 관여했던 관료들은 훗날 한결같이 “당시에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1960년대 한국은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이뤘다. 그 배경에는 엄청난 차관 도입이 있었다. 기업들은 외국에서 돈을 빌려와 공장을 지었다. 시설·운영자금은 대부분 고금리 사채를 썼다. 금융시장이 척박했기 때문이다. 자기자본은 부족한데 빚은 천정부지로 쌓이면서 부실기업이 속출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71년 8월 15일 미국 닉슨 대통령은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던 금 태환 정책 포기를 선언한다. 전후 세계 통화질서였던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한 것이다. 달러 약세를 노린 이 조치로 원·달러 환율은 급등했고 세계적 불황이 닥치면서 차관을 빌린 부실기업은 벼랑으로 몰렸다. 특히 고리사채를 마구 쓰던 기업들은 파산 직전, 숨 넘어기기 직전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부실기업을 살리기보다는 정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이들 차관을 쓰고 있는 기업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버렸기 때문이다. ‘대마불사’가 돼있었던 것이다.

# 드러난 고도성장의 그늘
 
기사 이미지

72년 8월 9일로 예정된 사채 신고 마감일이 다가오자 사채를 쓴 기업과 사채권자들이 전국 은행창구와 세무소로 몰려들었다.

 

정부가 정한 사채 신고 기간은 8월 3일부터 일주일 간이었다. 정부 발표를 반신반의하며 눈치를 보던 기업과 사채권자들은 신고 마감 막바지에 세무소와 은행창구로 몰렸다. 8월 9일 밤 12시까지 신고된 사채 건수는 4만677건, 액수로는 3456억원이었다. 당시 통화량의 80%에 달하는 엄청난 돈이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5월 말 기준 국내 통화량(M2)은 2312조8000억원. 지금으로 따지면 1840조원의 사채가 지하에서 돌고 있었던 셈이다.

더 기가 막힌 일도 있었다. 대통령을 찾아가 “고리사채로 기업이 다 망할 판”이라고 읍소하던 대기업 경영자들의 민낯이 드러났다. 당시 신고된 사채 중 1137억원(33%)은 기업주가 자신이 소유한 회사에 사채놀이를 한 돈이었다. 위장 사채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에 대한 조치와 처벌을 미뤘다. 기업들은 환호했다.

# 엇갈린 희비
 
기사 이미지

세무소 직원들이 접수된 사채 신고 서류를 정리하고 있다. 8월 3~9일 동안 신고된 사채액은 3456억원이었다. 당시 통화량의 80%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사채에 짓눌려 있던 기업에 8·3조치는 ‘희년(year of jubilee, 禧年)’과도 같은 것이었다. 희년은 50년마다 죄를 사면하고 빚을 탕감해주는 옛 이스라엘의 의식을 말한다. 빚만 탕감받은 게 아니다. 박정희 정부는 사채 동결 조치와 함께 2000억원이 넘는 긴급자금을 시중금리의 절반도 되지 않는 8% 이자로 기업에 공급했다. 현재 가치로 치면 40조원(44년간 평균 7% 금리를 복리로 계산)을 수혈한 셈이다. 대기업의 부실 장부는 나랏돈으로 빠르게 개선됐다. 기업 생산에서 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은 70년 8.8%에서 73년 4.4%로 감소했다. 기업 부채비율은 70년 313%에서 73년 288%로 하락했다

그러나 기업이 환호하는 사이 많은 서민·중산층은 피눈물을 흘렸다. 당시 사채권자 중에는 명동 사채시장의 ‘백 할머니’나 ‘광화문 곰’ 같은 큰 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금융시장이 미천했던 시절, ‘사채놀이’는 서민들이 돈을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실제로 8·3조치 때 신고된 사채 중 300만원 이상은 건수 기준으로 전체의 10%에 불과했다. 300만원은 당시 서울 시내의 고급 단독주택 한 채 값이다. 30만원 이하 소액 사채 신고액수도 100억원을 넘었다. 정부 조치 후 짧게는 3년, 길게는 8년간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할 처지가 되자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놀란 정부는 즉각 30만원 이하 사채의 동결 조치를 해제했다.

# 8·3조치가 남긴 명과 암

8·3조치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8·3조치 후반 작업에 참여했던 최각규 전 경제부총리의 평가를 들어보자. “정상적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있는 조치지요. 국민의 사적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니까 말이죠. 그러나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정말 부득이하고 불가피했다, 이런 측면을 이해해야 합니다.(『코리안 미러클』 중에서』 )”

8.3조치로 경기는 급반등했다. 72년 7.2%였던 실질 경제성장률은 이듬해 14.8%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금융시장에도 전환점이 됐다. 당시 국내에는 기업에 장기 금융을 조달할 금융기관이 거의 없었다. 제도권 은행은 정부가 소유한 산업은행과 4개 시중은행이 전부였고 대부분 단기자금을 공급하는 수준이었다. 기업이 고금리 사채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8·3조치는 지하경제를 지배하던 사금융을 양성화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정부는 사채시장을 대체하기 위해 단기금융업법·상호신용금고법·신용협동조합법을 제정했다. 제2금융권의 탄생이었다. 73년에는 기업공개촉진법이 만들어졌고, 74년에는 대통령 지시로 대기업의 기업공개를 촉구하는 ‘5·29조치’가 내려졌다. 기업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직접금융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가피론’을 내세운 극약 처방은 훗날 한국경제에 지울 수 없는 후유증을 남겼다. 『대통령의 경제학』 저자인 이장규 서강대 부총장은 “기업의 연쇄 도산 사태를 정부가 선제로 움직였기 때문에 막았을 뿐 아니라 그 뒤에 불어닥친 1차 오일쇼크도 견뎌냈고 중화학투자로 이어질 수 있었다”면서도 “시장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해 부작용이 두고두고 심각했다”고 강조했다.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평가는 이렇다. “8·3조치로 우리 기업은 부채를 겁낼 줄 모르고 몸집을 불리는 차입경영과 그룹경영으로 치달았고 자본을 충실히 하고 자기 사업에만 집중하던 우량 기업들이 오히려 시장경쟁에서 밀려나는 계기가 됐다. 우리 경제는 구조조정으로 대외 경쟁력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사채동결이라는 편법에 의존함으로써 위기관리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8·3조치가 1998년 외환위기의 씨앗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퇴출당했어야 할 부실기업이 관치금융의 그늘 속에서 차입경영을 지속했고 정경유착과 재벌체제가 구축되면서 위기 대응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위기가 오면 정부가 살려준다는 모럴 해저드가 시장에 뿌리깊게 박힌 계기가 됐다는 지적도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기업 오너의 위장사채나 부동산 투기 등은 처벌했어야 했다”며 “결국 기업가들은 정부와의 관계에 따라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지적했다.

# 에필로그 : 44년 전 그날, 그리고 오늘

44년이 지났지만 8·3조치는 여전히 한국 사회, 특히 정부와 정치권에 무거운 메시지를 던진다. 8·3조치를 발표하기 전 박정희 정부는 강도높은 부실기업 정리, 즉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원칙은 단호했다. 살아날 가망이 없는 기업은 청산하고 재기 가능성이 있는 기업은 재무구조를 개선시켜 살린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1969년 5~8월 8차례 걸쳐 30개 부실 차관 기업과 58개 은행관리기업이 정리됐다. 그러나 8·3조치로 구조조정의 원칙은 무너졌다. 이후 정부가 주도하는 구조조정은 부실기업 청산보다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연명시키는 방향으로 흘렀다.

최근 진행중인 조선업 구조조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책은행에서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은 조선사는 회계를 조작하고 부실을 감췄다. 그런데 더 큰 부실이 드러나자 정부는 또다시 나랏돈으로 호흡기를 달아주려고 한다. 고위 관료 몇 명이 비밀리에 청와대 서별관에 모여 나라의 큰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44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탕감으로 부채 문제를 덮으려는 시도도 여전하다. 지난 6월 중순 더불어민주당 가계부채 태스크포스(TF) 소속 의원들은 서울 서대문구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를 찾아 채권·채무 계약서를 파쇄하는 부채탕감 퍼포먼스를 했다.

더민주당은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10년 이상 연체채권을 일괄 소각하면 41만 명의 채무자를 구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숱하게 반복된 농어민 부채 탕감 정책에서 보듯, 탕감으로 부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박태균 교수는 “경제개발 초기였기 때문에 8·3조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하지만 시장원리를 정상적으로 적용하면서 원칙에 따라 처리하는 방안도 가능했을 것”이라며 “위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를 교훈 삼아 시장 원칙에 근거한 정책 결정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8·3조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