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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살자고 남 희생 강요 조직 발전 막는 이기주의

영화‘비계 덩어리’(2010)의 한 장면.

모파상


프랑스 자연주의 작가 기 드 (Guy de Maupassant, 1850~1893)이 1880년 펴낸 중편 소설 『비계 덩어리』는 프랑스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작품이다. 1870년 발발해 이듬해에 프랑스의 참담한 패배로 끝난 보불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국가를 위해 실제로 희생하는 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져 준 문제작이었다.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그는 시대의 무거운 주제를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간결하고도 객관적으로 그려냈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소개한다.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해 프러시아 군대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도시 루앙을 점령했다. 루앙 시민들 가운데 유력하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점령군 사령관을 매수하여 아직 프랑스의 지배 하에 있는 도시인 디에프로 가는 통행증을 얻어 도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눈이 많이 내리는 추운 겨울밤에 커다란 마차에 열 명의 손님이 타게 된다. 돈 많은 포도주 도매상 부부, 큰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부부, 부동산 부자인 부부, 수녀 두 명과 공화파 민주주의자인 남자, 그리고 뚱뚱하여 별명이 ‘비계 덩어리 (boule de suif)’라고 불리는 창녀 엘리자베스 루쎄가 그들이다.


 


다수의 압력에 못 이겨 마음 바꾼 창녀추운 겨울날 짙은 안개와 눈발 때문에 예정된 시간에 중간기착지에 이를 수 없게 되자 마차 안의 승객들은 초조해진다. 아무런 준비 없이 급히 길을 나선 이들을 엄습한 추위와 허기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더해져 한층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모두가 극심한 시장기를 느끼고 있을 때 ‘비계 덩어리’가 자신의 바구니를 열어 준비해 온 포도주와 고기를 꺼내 식사를 시작하면서 마차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 누구도 말을 걸지 않던 ‘미천한’ 여인에게 먼저 포도주 사업가가 아양을 떨기 시작하고 ‘비계 덩어리’는 그들 모두에게 자신의 음식을 아낌없이 나눠준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서로 섞일 수 없었던 마차 안의 승객들을 추위와 허기에서 구해내고 이들 사이의 대화가 가능하게 한 것은 ‘비계 덩어리’의 음식이었다. 승객들은 모두 그녀의 음식을 함께 나눠먹음으로써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그 후 오랜 시간을 달려 중간기착지인 토트에 도착한 일행은 한 여인숙에 들어가 숙식을 한다. 다음날 예정대로 출발해야 했지만 갑자기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그곳의 관할관인 프러시아 장교가 출발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비계 덩어리’와 하룻밤을 자고 싶다는 그의 요청을 그녀가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프러시아 장교의 무례한 행동에 분노하지만 출발이 하루, 이틀 지연되면서 그의 요구를 거절한 ‘비계 덩어리’에게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창녀라면 굳이 사람을 가릴 것은 무엇이며, 동행하는 사람 대다수의 운명이 걸려 있는 일인데 개인적으로 거절한 것은 잘못했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었다. 사람들은 창녀만 남겨두고 모두 떠나게 해달라는 협상도 해보지만 장교에게 거절당한다. 사람들은 전전긍긍하면서 어떻게 하면 창녀의 마음을 바꾸게 할 수 있을 것인지 묘책을 강구한다. 이 도시 주변에서 곧 보·불 양군이 교전을 벌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도시 탈출이 불가능해 질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에 초조해진 일행들은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다. 일행 중 좌장격인 백작은 그녀를 찾아가 직접 회유를 시도하고 수녀들은 ‘신은 순수한 목적에서 행한 죄악을 용서할 것’이라는 말로 그녀를 설득하자 ‘비계 덩어리’는 다수의 압력에 못 이겨 마침내 마음을 바꿔 프러시아 장교의 방을 찾아가게 된다.


 배은망덕한 일행에 분노에 찬 눈물 흘려이튿날 아침, 드디어 일행에게 출발해도 좋다는 장교의 허가가 떨어졌다. 마차에 오른 일행들은 무사히 다시 출발하게 된 데 대해 안도감을 느꼈고 모두 신나서 들뜬 표정이었다. 그런데 초췌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마차에 오르는 ‘비계 덩어리’를 대하는 태도가 어제와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적장에게 몸을 판 더러운 여자’라는 생각에서 눈길도 주지 않고 그들끼리만 대화를 한다. 여인숙에서 각자 마련한 음식을 자기들끼리만 먹기 시작하고 급히 나오느라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그녀에게 누구 하나 같이 먹자고 권하는 이도 없었다. 배은망덕한 그들의 행동을 보면서 그녀는 심한 모욕감에 치를 떨며 분노에 찬 눈물을 흘린다. 마차가 출발하자 공화파 민주주의자가 갑자기 뜬금없이 휘파람과 노래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른다. 일행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노래를 부르는 그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한다. “조국에 바친 성스러운 사람이여, 이끌라, 떠받치라, 복수의 우리 팔을, 자유여! 그대를 지키는 자와 더불어 싸우라.” 마차에 탄 일행을 위해 몸을 바친 ‘비계 덩어리’, 그녀로 인해 그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돌보거나 지키는 자는 없었다. 겉은 도덕적이고 품위 있으며 애국심에 불타지만, 속은 욕심과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그들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비꼬는 듯이 연주되는 국가 속에서 그녀의 울음소리는 커져만 갔다.


 

『비계 덩어리』 1880년 초판본 표지.


자신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일 당연시‘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현상을 우리는 이 소설에서 보게 된다. 아홉 명의 지체 높은 귀족과 유지들을 구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한 여성이 희생된 것은 결과적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의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명제가 실현되어 최소의 비용으로 조직의 전체 효익(total benefit)이 극대화되었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비계 덩어리’의 희생으로 다수의 고귀한 프랑스 시민들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강변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타인을 위한 자신의 희생은 무슨 이유를 대면서 거부하는, 개인주의로 위장한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음을 본다. 최근 한국 교육부의 한 고위 공무원이 ‘국민은 개·돼지’라고 한 발언을 통해 국민을 섬긴다는 공복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들은 ‘비계 덩어리’의 희생을 당연시하면서도 무사히 위험을 벗어나자 그녀를 향해 ‘더러운 매춘부’라며 침을 뱉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든다.


기업조직에서도 이러한 ‘가진 자’의 갑질과 이기주의를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대기업의 대부분이 수평조직을 지향하는 팀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호칭파괴가 이루어져 말단사원부터 최고경영자까지 ‘OOO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기업들도 있어 업무중심의 수평적이고 효율적인 조직분위기가 정착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스의 지시만 기다리는, 여전히 위계적이고 관료적인 조직이라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안다. 최근 ‘형제의 난’ ‘오너 가족의 비리’와 같은 대형 ‘오너 리스크’로 기업경영에 갑자기 위기가 닥치게 되자 임직원들은 청춘을 바쳐 일해 온 조직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무기력과 체념에 빠져있다. 그들은 주인이 아니라 단지 기업경영의 들러리였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단결하여 스스로 조금씩 희생해야임직원뿐 아니라 소비자들도 무시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소비자들은 기업의 성장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때로는 철저하게 희생을 강요당해 왔다. 예를 들어, 독성이 있는 가습기 살균제를 생산, 판매한 기업들 때문에 희생당한 소비자들과 가족들이 기업에 진상조사와 피해보상을 요구했지만 이들은 정부의 방관 속에서 오랜 세월동안 진실을 은폐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피해 보상을 거부해왔다. 소비자는 결코 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 사회와 기업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비계 덩어리’처럼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한 소비자들을 제대로 도와주고 돌본 것은 정부도, 기업도 아닌, 피해자인 소비자 자신들이었다. 그들이 피해자 연대모임을 만들고 문제가 된 살균제 성분 분석을 전문가들에게 의뢰하고 양심가들의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정부에 호소한 결과 이 문제가 공론화 하기 시작했다. 결국 검찰에서 수사에 착수했고 다국적기업의 보스들이 한국 검찰에 소환되면서 상황은 반전되고 있다. ‘을’들이 뭉쳐서 자신들의 권익을 지켜내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기업의 달라진 두드러진 현상은 기업의 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의 변화다. 즉 기업경영의 지배권이 오너와 오너 가족에 한정되어 있던 구조가 사익만을 추구하는 잘못된 경영의사결정을 초래했다는 반성에 기반해 주주의 권리를 보호하고 이사회의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기업 지배구조가 크게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화제의 책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토마 피케티는 “자본의 수익률이 생산과 소득의 성장률을 넘어설 때 자본주의는 자의적이고 견딜 수 없는 불평등을 양산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분배의 양극화는 자본주의의 필연이라는 그의 주장을 뒤엎는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나오기는 어렵다고 해도 적어도 양극화 현상을 경감시키는 해법을 소설 『비계 덩어리』가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비계 덩어리’가 더 이상 희생양이 되지 않고, 다른 승객들이 큰 수고 없이 희생의 수혜자가 되는 구조를 불식하고, 마차에 탄 모든 사람들이 단결해 스스로 조금씩 희생하고 전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이기주의의 병폐가 해소되는 조직에서는 ‘비계 덩어리’의 눈물은 더 이상 보지 않게 될 것이다. 한국의 ‘비계 덩어리’들은 지금 화가 많이 나있다. 그들 스스로 동료의 눈물을 씻어주기 위해 단결하고 있다.


 


김성국이화여자대학교 경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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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