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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유대인 수천명 무지리스로 ‘디아스포라’

아라비아 상인이 향료와 캐시미어 직물을 구하기 위해 찾던 무역항인 콜람의 어촌 마을 풍경. 뒤편에 영국 등대가 보인다. [사진 주강현]


남인도 서쪽 해안에는 콜람·알랩패이·코치·칼리쿠드 같은 유수의 항구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이름하여 말라바르 해안. ‘스파이스 루트(향료의 길)의 꽃’과도 같던 무역항이다. 믈라카 제도 등에서 실어 나른 향료가 말라바르 해안에 당도하면 아라비아해를 가로질러 아라비아·페르시아 등지로 실려 갔다.


남인도 남단 카나쿠마리에서 트리반드룸을 거쳐 코치까지 육로로 북상하다 보면 어쩜 지구상에서 가장 길고도 긴 상가를 만나게 된다. 아라비아해를 통해 들이닥친 아랍 상인의 무역 전통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는 증거다.


이슬람 사원들은 이방인의 눈에 특이하게 다가온다. 예언자 무함마드(571~632) 생존 때인 621년 모스크가 인도 최초로 이곳에 들어섰다. 그보다 훨씬 전인 4세기께 아랍 무역 상인이 당도한 것으로 확인된다. 아랍 정착촌이 이미 형성된 상태에서 이슬람이 재빨리 포교됐으리라.


말라바르는 일찍부터 이슬람 상인이 오가던 무역의 바다였다. 그 흔적이 융?복합적인 건축물과 다양하게 섞인 언어, 식당에서 파는 아라비아 음식, 가게의 말린 대추야자에서 잘 보인다. 물경 1500여 년 전부터 형성된 무슬림 사회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마필라라 부르는 이들 아랍의 후손 덕분에 현존 케랄라 주민의 25%가 무슬림이다. 무슬림은 이슬람 국가와의 종교적 연고를 찾아 아랍에미리트나 사우디아라비아·말레이시아 등으로 수백만이 새로운 디아스포라를 실현 중이다.

1 콜람의 향료 시장. 육두구·정향·계피 등이 팔린다. 2 콜람의 어시장 모습.


무슬림과 공산당이 눈에 띄는 케랄라州케랄라 곳곳에선 공산당의 망치와 낫이 보인다. 아마 인도에서 가장 사회주의가 발전한 주일 것이다. 사회적 기반시설, 의료와 교육시스템 등은 인도 내에서도 사회 공유적인 특질을 가장 잘 드러낸다. 왜 그다지도 체 게바라 포스터가 눈에 많이 띄는지. 인도가 힌두의 나라라고 알고 있는 이방인에게 무슬림과 공산당이 자주 눈에 띄는 케랄라는 유별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첫 방문 도시 콜람은 케랄라 수로로 이어지는 조용한 항구로 아라비아 상인이 향료와 캐시미어 직물을 구하기 위해 찾던 무역항이다. 묵카다 시장을 먼저 찾았다. 한국의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을 합쳐놓은 듯하다. 수백 년 묵은 시장에는 없는 물건이 없다. 스파이스 루트를 물들이던 향료 가게는 대거 사라졌고 흔적만 남았다. 육두구·정향·계피 등을 팔고 있다.


콜람 북쪽에는 영국 등대가 서 있다. 전형적인 에디스톤 등대 양식인데 영국에서는 19세기에 유행했다. 등대 인근에 포르투갈 요새가 있다. 콜람 어부들이 살아가는 해변의 어촌이 요새로부터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아주 오래전에 아라비아해의 상선이 찾아오던 해변이다. 나중에 포르투갈·영국 등의 배들도 합세했다.


콜람 어부들은 해변 모래사장에 움막 같은 집을 짓고 아예 모래밭에서 잔다. 그들은 동이 터오면 일제히 바다로 나가 ‘일’을 본다. 플라스틱으로 오염된 바다에 비해 덜 문명적일 이유도 없다. 그들은 자신이 잠자고 배설하는 그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아침시장에서 거래를 통해 자잘한 돈을 마련한다. 잡혀 나오는 고기의 총량에 비해 어부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으며 구경꾼도 부지기수다. 가난의 일상화가 이 오랜 해변의 풍경이다. 콜람 어부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도 기록해 둘 일이다.


케랄라 운하는 ‘문명의 고속도로’그다음 탐사한 알랩패이는 야자수로 둘러싸인 쾌적한 운하 도시다. 북부운하와 남부운하가 도심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국제 상인의 거래가 이루어지던 교역장이 있다. 케랄라 운하는 ‘문명의 고속도로’였다. 거친 아라비아해의 위험한 해안을 피해 아늑한 수로로 물산을 유통시켰다. 가격이 만만치 않은 집배를 빌렸다. 요금은 천차만별인데 ‘바가지’가 일상화돼 흥정은 기본이다. 2층 침실이 있는 집배는 중국 어망이 늘어선 수로를 가로질러 무려 900여㎞를 오간다.


세계인이 찾아들던 케랄라 운하의 명성은 오늘날엔 매년 8월 멤바드나 호수에서 열리는 네루 트로피 보트경기로 재현되는 중이다. 높이 치솟은 뱃머리가 달린 30여m 길이의 배에 100여 명이 타고 노래를 부르며 수로를 가로지른다. 장관이다. 보트경기 하나를 보기 위해 전 세계 매니어가 몰려든다. 케랄라의 뱃길 고속도로는 이처럼 장기 지속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알랩패이에서 수로로 북상해 케랄라의 핵심이랄 수 있는 코치에 도착했다. 600년 이상 상인이 찾아오던 활기찬 코치. 오늘날에는 관광객이 그만큼 찾아드는 인도의 명소가 됐다. 코치의 명물은 익히 광고판 등에 등장하는 중국식 어망이다. 1400년에 쿠빌라이 칸 황실 상인이 처음 전했다고 한다. 정화가 아프리카로 갈 때도 말라바르 해안에 자주 들렀다. 남인도 서해안이 그만큼 중국 측에서도 페르시아나 아랍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다는 증거다.


일찍이 ?한서? 지리지에 광저우(廣州)에서 인도로 가는 노선이 등장한다. 의정은 광저우에서 페르시아 상선을 타고 인도로 구법활동을 떠났다. 무수히 많은 당나라 승려가 천축국으로 떠났음은 인도-중국 네트워크가 정착됐던 사정을 말해 준다. 중국식 어망은 먼 후대인 14~15세기 중국인 정착촌이 형성되던 시기의 흔적이다.


대체로 관광객은 코치 요새에서 한나절을 보낸다. 강 하구에 발달한 삼각주에 자리 잡은 도심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코치 요새는 바다에서 수로로 접어드는 천혜의 길목이다. 성프란시스 교회부터 찾아가니 1524년 코치에서 사망한 바스코 다가마의 묘비가 누워 있다. 유골이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옮겨지기 전 이 유서 깊은 교회에 14년간 묻혀 있었다. 1506년 세운 산타크루즈 바실리카 성당, 군대 열병식장, 인도 초기 가톨릭공동체의 유산을 포괄하는 인도-포르투갈 박물관, 포르투갈 이후에 들어온 네덜란드인의 공동묘지 등이 도보 거리에 포진한다.


고풍스러운 건축물은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로 바뀌어 이국적 관광지로 손님을 끄는 중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무역항의 후예답게 상인들은 장사 솜씨가 뛰어나다.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중국·인도·아라비아의 모든 건축양식이 조합돼 만들어낸 거대한 문명의 용광로답다.


코치의 국왕인 비라 케랄라 바르마에게 무역권 확보의 뜻으로 헌정된 맛단체리 궁전은 1555년 포르투갈인이 지었다. 1663년에 네덜란드인이 궁전 이곳저곳을 수리했으며, 그로부터 네덜란드궁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케랄라의 궁궐이기는 하지만 전형적인 서양식 건축으로 꾸몄다. 오늘날 케랄라 지방에 허다하게 눈에 띄는 성당과 교회는 이들 식민의 유산이리라.

코치의 유대인 촌락과 유대교회당 시나고그. 유대인의 인도 거주 역사는 2000년 가까이 된다.


맛단체리에서 오토릭샤를 타고 유대인 거주지로 들어섰다. 유대인 거주지는 코치항에 접해 있으며, 오늘날도 향료 거래의 중심지다. 유대교회당인 시나고그부터 찾았다. 포르투갈 시대인 1568년 세워진 것을 1662년 네덜란드인이 파괴했으며, 다시 2년 후에 네덜란드인이 이곳을 차지하면서 재건했다. 시계탑이 건립된 것은 1760년. 그렇다면 유대인은 언제부터 남인도에 살고 있었을까.


놀랍게도 이미 서기 72년에 유대인 수천명이 코치 북쪽의 코둔갈루르(일명 무지리스)로 피신을 온다. 2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유대인이 살아왔다는 뜻이다. 코둔갈루르에서는 이미 고고학 발굴로 로마시대 동전이 쏟아져 나왔다. 이곳은 로마 지도에도 등장한다. 기원 전후에 동서 교류가 활발했던 오랜 항구다.


동일 시대인 70년께 이집트의 그리스 상인이 로마령 이집트에서 출발해 인도까지 항해한 기록인 ‘에리트라해 안내기(The 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에 무지리스가 등장한다. 후추와 여타 향신료, 금속공예품 등이 거래되고 있었고 많은 그리스 선원이 무역에 종사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유대인 수천 명이 오늘의 코치 근처로 집단 이주한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계피·사프란·강황 등 온갖 향료 가게 즐비유대인은 인도 왕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잘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1524년에 무슬림 모아족이 유대인 정착촌을 파괴하자 유대인은 오늘의 코치로 본거지를 옮겨 재정착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곳곳에 향료 가게가 즐비하다. 붉고 노랗고 푸른 향료들이 전통 방식으로 마대 자루에 수북이 쌓여 있고, 관광객용으로 작은 봉지에 담아 종류별로 팔기도 한다. 계피·생강·카더몸·강황·정향·사프란·박하, 심지어 마늘 등 온갖 향료가 모두 모여 있다. 진한 향료 냄새에는 만국 상인을 애타고 설레게 했던 어떤 욕망의 뜨거움 같은 것이 배어 있다. 국제무역 거점의 큰손이 아랍인과 더불어 유대인이었고, 당대 향료무역이 큰돈을 움직이는 국제 품목이었음을 증언한다.


유대인촌 가까운 곳에 공동묘지도 전해온다. 히브리어 비석이 눈에 띈다. 이곳 인도에서 나고 자라고 죽어가면서 대를 이어 장사꾼 전통을 이어왔다. 지금도 후예들은 가게를 운영하고 자금을 돌리면서 풍족한 삶을 이어 나가고 있다. 한 민족이 이 엄청난 인도 대륙에서 2000여 년을 이어갔다는 사실에서 어떤 전율할 무엇이 느껴진다. 아라비아해의 문명적 헤게모니는 바다를 건너온 무슬림에다 그 이후에 들어온 기독교까지 합쳐져 복합 형태를 갖추었다. 중국 문명의 힘은 말레이반도 일부, 그러니까 벵골만 동쪽에서 멈춘 것으로 파악된다.


아라비아해에 면한 코치 해양박물관에서 인도양을 주름잡는 인도 해군의 저력과 위용을 확인한다. 방문객에게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로만 다가오지만 포르투갈의 에마누엘 요새로부터 오늘날 인도 해군부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군사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인도 해군은 중국의 ‘일대일로’ 진출에 경계를 보이면서 거침없이 인도양에 군림하는 중이다. 말 그대로 ‘인도양’이다. 


 


다음에는 인도(하) 세계 최초의 조선소?로탈이 소개됩니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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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