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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해상돌격대 산둥 침투, 해방군 30명 쓰러뜨려

대만 각계가 주관한 산둥반도 해상돌격대원 개선 환영대회에 참석한 돌격대원들. 가운데 양복 입은 사람은 세계 반공연맹 총재 취정강(谷正綱). 1964년 여름, 타이베이. [사진 제공 김명호]


한국전쟁 정전협정 20일 전인 1953년 7월 7일, 국민당군은 진먼다오(金門島)에 연합지휘부를 신설했다. 7월 16일, 진먼 방위사령관과 미군 고문단이 지휘하는 국민당 대부대가 푸젠(福建)성 둥산다오(東山島)에 상륙했다. 전투기와 탱크의 엄호를 받으며 낙하산 부대와 합류한 상륙부대는 여섯 시간 만에 둥산다오를 점령했다.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휘날리며 만세를 불렀다. 중공의 수비 능력을 조롱하며 패기만만했다.


환호는 잠시, 중공의 반격이 시작됐다. 둥산다오 주둔군과 샤먼(廈門)·촨저우(泉州)·산터우(汕頭)의 지원군이 합세해 상륙부대를 공격했다. 이틀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주둔군은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전투력이 지원군을 능가했다. 국민당군 3400여명이 전사하고 항공기와 탱크가 고철로 변했다. 마오쩌둥은 신이 났다. “국민당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했다”며 직접 성명을 발표했다. “둥산 보위전의 승리는 둥산과 푸젠의 승리가 아니다. 전국의 승리다.”


한반도에 포성이 멎자 냉전시대가 열렸다. 소련과 신중국은 미국과 냉각기에 들어섰다. 대규모 군사충돌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대만 국민정부의 반공대륙(反攻大陸) 계획은 위기에 처했다. 당과 군 수뇌부는 새로운 반공계획 수립에 골몰했다.


1955년 1월, 왕년의 대 특무 취쩡원(谷正文·곡정문)의 제안이 주목을 끌었다. “명(明)나라 시절, 연해(沿海)지역을 엉망으로 만든 왜구(倭寇)를 따라 하자”며 정성공(鄭成功) 부자가 해상에 건립했던 군사기지도 언급했다. “해안지역에서 무장소동을 일으키면 중공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대륙시절, 요인 암살로 명성을 떨쳤던 국방부 정보국 국장 마오런펑(毛人鳳·모인봉)은 취쩡원의 의견을 흘려 듣지 않았다. 장제스에게 “무장세력을 대륙에 침투시키겠다”고 보고했다. 장제스는 긴 말을 하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정보국은 퇴역 군인 중에서 해상돌격대를 물색했다. 아무리 건장하고 용감해도 사고 친 전력이 있으면 제외시켰다. 일본 고베에 거점도 마련했다. 정박 중인 대륙 선원들을 매수해 연해지역 정보를 수집했다.


같은 해 12월 인내와 흉악함의 상징이었던 마오런펑이 심장병으로 급서했다. 신임 정보국장은 해상 침투에 흥미가 없었다. 1960년 예샹즈(葉翔之·엽상지)가 정보국장에 취임했다. 예샹즈는 대륙문제 전문가였다. 취임과 동시에 해상을 통한 대륙 침투를 추진했다. 수중 폭파요원 양성에 매진하고 해상돌격대를 발족시켰다. 해상돌격대는 하루가 멀게 대륙 연안을 습격했다. 날이 갈수록 산둥(山東)에서 광둥(廣東)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확대됐다. 중공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훈련 중인 해상돌격대원들. 1960년대 초반으로 추정. [사진 제공 김명호]


1962년, 대륙에 기근이 덮쳤다. 난민들이 홍콩 인근으로 몰려들었다. 국민당 해상돌격대의 출현이 더 빈번해졌다. 마오쩌둥은 긴장했다. 중앙 군사위원회에 지시했다. “보하이만(渤海灣)에서 통킹만(東京灣)까지 6000㎞ 지역에 주둔하는 해방군과 현지 민병은 순시를 게을리하지 말라. 출항 어선을 엄격히 단속하고, 국민당 돌격대를 섬멸해라.” 대륙 해안은 초목이 무성했다. 돌격대가 받는 제약은 한둘이 아니었다. 전멸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도, 돌격대는 침투를 멈추지 않았다.


1964년은 해상돌격대의 절정기였다. 산둥 침투작전이 가장 성공적이었다. 5월 중순, 정보국은 야전부대 출신 16명을 선발해 산둥성반공구국단(山東省反攻救國團)을 출범시켰다. 구국단은 한국을 경유해 목적지로 향했다. 부(副)대장 우둥다이(于東垈)는 군문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56세였다.


6월 1일 밤 8시, 상륙에 성공한 돌격대는 열 시간가량 격전을 벌였다. 해방군 30여명을 쓰러뜨렸다. 희생자 없이 모함(母艦)으로 와보니 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상륙정 고장으로 표류한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낙오된 두 명의 돌격대원은 배가 대륙으로 향하지 않기 위해 풍향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4일간 허기와 추위를 견디며 소변으로 목을 축였다. 한국 어선을 만나 구조됐을 때, 한 명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응급수술로 몸에 박힌 실탄을 제거한 나머지 한 명은 동료의 유골을 안고 대만으로 돌아왔다. 와 보니 재가 된 한 명 외에는 희생자가 없었다.


산둥반도 돌격대의 쾌거에 대만 전역이 떠들썩했다. 연일 친정부 시위대가 거리를 메웠다. “국제 환경이 어떻게 변하건, 국민당 정부의 반공대륙 정책과 결심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장제스의 건강이 전 같지 않았다. 대권을 장악한 장징궈(蔣經國)는 반공대륙 대신 대만건설을 표방했다. 1975년 중국은 감옥에 있던 국민당 간첩을 석방했다. 해상돌격대 출신 56명도 홍콩땅을 밟았다. 1987년 장징궈가 대륙 방문을 허락했다. 1990년 가을, 82세의 우둥다이도 26년 전 추억의 해변을 찾았다. 현지 공안국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대만 정보국 자료에 의하면 해상돌격대원은 2000명 좌우였다. 그 중 600여명이 대만인이고 나머지는 대륙출신이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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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