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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동학 막으려다 외세 침탈 자초


【총평】


일본이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보호를 위해 군대 파병의 움직임을 보이자, 청은 신속히 군대를 파병했다. 청은 흥선 대원군을 군란의 책임자로 몰아 톈진으로 압송함으로써 일본의 무력 개입의 여지를 없애 버렸다. 청은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구식 군인들과 민중의 반란을 진압했고, 민씨 일파를 중심으로 한 친청 정권을 수립했다.


? 청은 임오군란을 진압한 뒤에도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용산에 주둔시키며 자신들의 침략적 요구를 관철하여 나갔다. 청의 위안스카이는 내정 고문으로 마건상을, 외교 고문으로 묄렌도르프를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묄렌도르프는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이라는 불평등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청 상인에게 통상의 특권을 제공했고,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1882).?

우정총국 건물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있으며 그 옆에 조계사가 있다. 개화당은 한국 최초의 우편행정기관인 우정총국의 낙성식 연회를 정변의 계기로 삼았다. [사진가 권태균]


? 군란 과정에서 도망간 일본 공사 하나부사가 군함을 이끌고 제물포에 나타나 무력시위를 하며 일본 공사관 피습과 소실, 일본인 피살 등을 구실로 조선 정부에 폭동군의 엄벌과 막대한 배상금 지급 등을 요구했다. 조선은 결국 1882년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고, 배상금 지급과 일본 경비병의 공사관 주둔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조약의 후속 조치로 1882년 박영효는 일본에 수신사로 갔는데, 이때 태극기가 사용되었다.


? 1880년대에 형성된 개화파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분열되어 갔다. 개화파는 청에 대처하는 방식과 개화 방법을 둘러싸고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로 나뉘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낙후된 조선을 근대적인 국가 체제로 개혁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급진 개화파는 군주권을 제한하고 내각이 책임 정치를 하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청과의 사대 관계 청산을 주장하고, 민씨 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했다.

전봉준 압송장면 서울로 끌려온 전봉준은 일본의 회유를 거부하고 사형당했다.


? 이에 반해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온건 개화파는 중국의 자강 운동인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아 점진적인 개화를 추진하자고 했다. 이들은 동도서기론의 입장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점진적 개혁을 위해 온건 개화파는 청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중요시하고, 민씨 정권과 타협하는 태도를 보였다.


? 급진 개화파는 근대적 인쇄소인 박문국을 설치하여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또한,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전환국을 설치하는 등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근대적 우편 업무의 도입을 위해 우정총국을 설치했다.


? 1884년에 프랑스가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얻으려고 청과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자, 조선에 주둔했던 청군의 일부가 베트남으로 이동했다. 이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급진 개화파는 일본 공사의 병력 지원 약속을 믿고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파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민씨 고관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는 14개조로 이루어진 새 정부의 정강을 발표했다. 개혁 정강에는 청과의 사대 관계를 청산한다는 내용과 인민 평등권 제정,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행정 조직 개편, 조세 제도 개혁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 급진 개화파는 지조법을 시행하고, 호조로 재정을 일원화했으며, 보부상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혜상공국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의 발전을 도모했다.


? 지조법(地租法)은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을 생산량 기준이 아니라 토지 가격에 따라 부과하는 방식이다.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시행한 것을 수용했다.


? 갑진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는 정강에서 밝혔듯이 대외적으로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려 했고, 사회적으로는 봉건적 신분 제도를 무너뜨리고 평등 사회를 이루고자 했다. 정강에 제시된 ‘문벌 폐지와 평등권의 제정’은 정부 차원에서 제시되었다는 점이 획기적이었다. 갑신정변은 정치적으로는 전제 군주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입헌 군주제로 바꾸려는 위로부터의 개혁 운동이었다. 그리고 국왕 중심의 정치에서 벗어나 내각 중심의 정치를 시행하는 입헌 군주제로 나아가고자 했다. 또한, 순사제의 시행과 호조로의 재정 일원화 등 근대적인 국가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개혁을 추구했다. 그러나 급진 개화파는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정변을 일으켜서 정권이 오래 유지될 수 없었다. 또한, 정변 과정에서 청군의 개입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일본의 지원만을 믿고 정변을 일으킨 것도 실패의 원인이었다. 개화파 정권은 명성 황후의 요청으로 청의 군대가 개입하는 바람에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 일본은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데 공모했으므로 공동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었음에도 육군 2개 대대의 병력을 한성으로 이동시켜 일본 공사관 소실 및 일본인 피살 등에 관한 배상을 요구했다. 민씨 일파는 이 요구에 굴복하여 일본과 공사관 신축 비용 부담과 배상금 지급을 명시한 한성조약을 맺었다(1884).?

사발통문 - 전봉준이 각 마을 집강에게 보낸 사발통문인데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이라고 쓰여 있다. -사진가 권태균-


? 일본은 청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청에 파견하여 톈진 조약을 체결했다(1885). 톈진 조약에서 일본이 청과 대등한 조선 파병권을 확보한 것은 후에 청.일 전쟁의 빌미로 작용했다.


? 갑신정변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러시아와의 교섭을 시도했다. 조선 정부는 러시아에 영흥만을 조차해 주는 대가로 러시아의 군사 교련단을 요구하는 교섭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1885년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했다. 거문도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뒤 영국은 러시아로부터 조선에서 영토를 확보하지 않을 것을 약속 받고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 조선은 미국에 박정양을 전권 공사로 파견하여 주미 공사관 개설을 시도했으나 청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다가 마침내 개설했다. 청은 흥선 대원군을 환국시키고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고종을 견제했다. 이렇듯 조선을 둘러싸고 열강의 대립이 격화되자, 조선 주재 독일 외교관인 부들러나 미국에서 돌아온 유길준은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자는 중립화론을 구상하기도 했다.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에는 청의 정치적 간섭이 강화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청은 경제력 침략을 가속화하여 우리나라에서 청 상인의 활동이 증가했다. 1880년대 중반 이후 청.일 상인들은 내륙 시장까지 진출하여 상권 경쟁을 전개하면서 조선 상인들의 경제적 피해는 늘어갔다. 황해도와 함경도에서는 방곡령이 내려질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다.


? 농민들 사이에서는 일본의 경제 침탈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커져 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란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민란이 전면적인 농민 항쟁으로 발전한 데에는 동학의 평등사상과 포접제라는 교단 조직이 큰 역할을 했다. 포접제는 동학 포교를 위해 각 지방에 만든 조직으로,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면서 농민군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 동학교도들은 1892년 전라도 삼례에 모여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 달라는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교조 신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듬해 손병희를 포함한 동학 대표 40여 명이 한성 경복궁 앞에서 복합 상소(伏閤上疏) 운동을 전개했다.


? 이어 동학교도와 농민 등 2만여 명이 보은 집회를 열어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 중지를 요구했다.


보은 집회에서는 교조 신원뿐만 아니라 탐관오리의 숙청, 일본과 서양 세력의 축출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동학이 종교적 차원을 넘어 정치.사회 운동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동학 농민 운동의 불씨는 전라도 고부 지역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멀쩡한 보(洑)를 허물고 만석보를 쌓은 뒤 수세를 강제로 징수했다. 이에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1894년 고부에서 민란을 일으켜 관아를 점령하고 관리들을 처벌했다. 그러고는 창고를 열어 양곡 1,400여 석을 몰수하여 부당하게 거둔 세금을 돌려주고, 만석보 밑에 새로 쌓은 보를 허물어 버렸다(고부 농민 봉기).


? 정부가 조병갑을 파면하고 박원명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자, 농민들은 자진하여 해산하였다. 그런데 농민군이 해산한 지 10일도 채 안 되어 난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의 참가자와 주모자를 가혹하게 처벌하자 농민의 불만이 폭발했다. 이에 전봉준이 전라도의 동학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봉기를 호소하자, 전라도 지역의 동학도인 남접 계통의 손화중, 김개남 등이 합세했다. 이들은 고부 백산에서 진용을 갖추고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원한다는 제폭구민(除暴救民)을 기치로 내걸고 봉기했다. 이후 농민군을 훈련하기 위한 호남 창의소도 조직했다. 이로써 제1차 농민 봉기가 시작되었다.


 


?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정부는 청에 파병을 요청했다.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의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했다. 외세의 개입으로 사태가 악화될 것을 우려한 농민군은 관군과 전주 화약을 맺고 스스로 해산했다. 이때 농민군은 정부에 폐정 개혁안 12개조를 제시했다. 폐정 개혁안에는 탐관오리와 악덕 지주 처벌, 봉건적인 신분 차별 폐지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에 자치 개혁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면서 폐정 개혁안을 시행했다.


? 한편, 정부는 농민군과의 개혁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교정청이라는 개혁 기구를 설치했다. 또한 정부는 청과 일본에 철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몰아내고 독점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이러한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일본군 3,000명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포위하고 정부군을 무장 해제했다. 청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일본은 아산만에서 청의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이후 일본은 연이은 전투에서 청군을 격파했고, 8개월 만에 청.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핵심 키워드】


☞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이라는 불평등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청 상인에게 통상의 특권을 제공했다(1882). 조선은 1882년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고, 배상금 지급과 일본 경비병의 공사관 주둔을 인정하게 되었다.


?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낙후된 조선을 근대적인 국가 체제로 개혁하고자 했다. [온건 개화파]는 중국의 자강 운동인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아 점진적인 개화를 추진하자고 했다.


?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는 14개조로 이루어진 새 정부의 정강을 발표했다. [지조법]을 시행하고, 호조로 [재정을 일원화]했으며, 보부상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혜상공국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의 발전을 도모했다.


? 일본과 공사관 신축 비용 부담과 배상금 지급을 명시한 [한성조약]을 맺었다(1884).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청에 파견하여 [톈진 조약]을 체결했다(1885).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1885년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했다([거문도 사건]).


? 조선 주재 독일 외교관인 부들러나 미국에서 돌아온 유길준은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자는 [중립화론]을 구상하기도 했다.


? 동학교도들은 1892년 전라도 삼례에 모여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이어 동학교도와 농민 등 2만여 명이 [보은 집회]를 열어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 중지를 요구했다.?? [동학 농민 운동]의 불씨는 전라도 고부 지역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1894년 고부에서 민란을 일으켜 관아를 점령하고 관리들을 처벌했다([고부 농민 봉기]). [보국안민(輔國安民)]과 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원한다는 [제폭구민(除暴救民)]을 기치로 내걸고 봉기했다. ?


? 농민군은 관군과 [전주 화약]을 맺고 스스로 해산했다. 농민군은 정부에 [폐정 개혁안 12개조]를 제시했다.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에 자치 개혁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면서 폐정 개혁안을 시행했다. 한편, 정부는 농민군과의 개혁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교정청]이라는 개혁 기구를 설치했다. ☜




 


 


【예상 문제와 해설】


1. 다음 자료에 나타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삼남 지방의 읍민들이 소요를 일으켜 관원을 협박하고 아전을 해쳤으며, 심지어 함흥의 백성들은 관찰사의 정당(政堂)을 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왕께서 영남에 안핵사와 선무사를 나누어 보냈으며, 호남 난민의 주모자를 참형에 처하였고 지방의 관리들을 처벌하였습니다.


① ?삼정이정청이 설치되는 계기가 되었다.


② ?당백전 발행에 따른 불만이 원인이 되었다.


③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정부군에 진압되었다.


④ ?서북민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여 시작되었다.


⑤ ?농민군과 정부군의 전주 화약을 이끌어 냈다.

* 2014학년도 6월 모의평가 3번


 

해설 : 정답 ①

① 삼정이정청은 임술 농민 봉기를 겪은 철종 때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2. (가)에서 (나)로 바뀐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가) 현재 외국 상품의 공급 및 내륙의 수요자나 생산자와 외국인과의 거래는 개항장 10리 이내로 제한되어 있다. 개항장에 거주하는 외국 상인들은 법정 지역 내에서 팔리지 않는 상품을 토착 상인에게 위탁해야 한다.

- 한국지 -


 


(나) 어떠한 벽촌이라고 하더라도 장날에 청나라 상인이 오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한다. 공주, 강경 등의 시장에는 어디나 20~30인이 와서 장사를 한다. 그들은 자기 점포를 갖고 장사를 하고 있다.

- 통상휘찬 1호 -

[보기]

ㄱ. 객주들이 상회사를 설립하였다.

ㄴ. 상인들이 철시 투쟁을 전개하였다.

ㄷ. 관리들이 주도하여 농광 회사를 설립하였다.

ㄹ.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보안회를 결성하였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 2015학년도 6월 모의평가 8번


 

해설 : 정답 ①

① ㄱ.ㄴ.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이후 '내지통상권'이 허용된 상황이다. 외국상인들에 대항하여 객주들이 근대적 상회사를 만드는 등 여러 노력이 이어졌다.


 


 


3. 다음 자료는 어떤 사건에 대한 견해이다. 이 사건에 대해 학생들이 나눈 대화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임금을 위협한 것은 순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고 거스르는 것이니 실패하는 첫째 이유이다. 외세를 믿고 의지하였으니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이 실패하는 둘째 이유이다. 인심이 따르지 않아 변이 안에서부터 일어날 것이니 실패하는 셋째 이유이다. ... (중략) ... 숫자가 적은 일본군이 어찌 많은 청군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실패하는 넷째 이유이다. 설사 김옥균과 박영효 등이 순조롭게 그 뜻을 이룬다 하더라도 이미 임금께서 친애하는 신하들과 여러 민씨를 죽였으니, 이는 왕과 왕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① ?일본의 지원 약속을 받고 추진되었어.


②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일어났어.


③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는 배경이 되었어.


④ ?청의 내정 간섭이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어.


⑤ ?일부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켰어.

* 2014년 7월 학력평가 7번


 

해설 : 정답 ③

③ 제물포 조약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임오군란의 결과이며 갑신정변의 결과로는 한성조약과 텐진조약이 맺어졌다.


 


 


4. (가), (나) 조약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제5조? ? 일본 공사관에 약간의 군사를 두어 경비한다.


? ? ? ? ? ? ? ? ? ? ?병영을 설치하고 수리하는 것은 조선이 맡는다.


(나) 제1조?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하고, 일본은 공사관을 호위하기 위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한다. 서명 날인한 날부터 4개월 이내에 각각 철수를 완료해 양국 간 분쟁이 야기될 우려를 없앤다.


① ?(가)는 치외 법권을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② ?(가)는 흥선 대원군이 재집권하는 계기가 되었다.


③ ?(나)는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체결되었다.


④ ?(나)는 청과 일본이 조선 파병시 상대국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⑤ ?(가) 체결로 수신사가, (나) 체결로 영선사가 파견되었다.

* 2015학년도 9월 모의평가 15번


 

해설 : 정답 ④

④ (가)는 임오군란으로 맺어진 제물포 조약이다. (나)는 갑신정변으로 맺어진 톈진조약이다. 톈진 조약을 통해 청과 일본은 조선 파병시 상대국에게 알리고 동시 파병권까지 약속한다. 이에 동학농민운동 당시 정부가 청에 지원 요청하자 일본군까지 상륙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5. 밑줄 친 '이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 사건은 오후에 열린 연회에서 비롯되었는데 홍영식 등이 미리 사관생도를 궁궐 문 앞에 매목시키고, 자객을 우정국 앞에 잠복하게 하여 방화로써 암호를 삼았다. ... (중략) ... 일본군이 발포하여 청군과 교전이 시작됐으나, 일본군이 저항하지 못하고 김옥균 등과 함께 임금을 모신 채 급히 후원 연경당으로 피했다. ... (중략) ... 이때 우리 인민들은 일본인을 원수로 보았고 맹세코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여 만나면 치고 받아 죽이기까지 했다.


① ?온건 개화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②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는 계기가 되었다.


③ ?근대적인 국민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④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는 배경이 되었다.


⑤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2014년 10월 학력평가 6번


 

해설 : 정답 ③

③ 급진 개화파는 근대 국민 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정변을 일으켰다.

?


 


6. 밑줄 친 '정변'에서 제기된 개혁 방안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그의 생각은 무엇보다 청의 세력을 꺾어 버리는 동시에 청을 추종하는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후 우리나라의 완전한 자주 독립 정치를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믿고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보기]

ㄱ. 은본위제 시행

ㄴ. 혜상공국 혁파

ㄷ. 인민 평등권 제정

ㄹ. 농민에게 토지 재분재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 2014학년도 수능 7번


 

해설 : 정답 ③

③ ㄴ.ㄷ. 갑신정변 관련 문제이다. 갑신 정변 이후 개혁 정강 14개조를 발표했다. 개혁 정강에는 문벌 타파, 인민 평등권 확립을 위한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였으며, 보부상 지언단체인 혜상공국 혁파 단행을 주장했다.


 


 


7. 다음은 개화 사상의 흐름을 정리한 표이다. 각 단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A : 서재필, 윤치호 등이 '조선책략' 을 통해 세계의 사정을 살폈다.


② ?B : 메이지 유신을 참고하여 서양 문명을 수용하려 하였다.


③ ?C : 양무 운동을 모델로 조선이 후진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④ ?D : 군국기무처가 설치된 후 조사 시찰단과 영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⑤ ?E :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일본과 연계하여 개혁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다.

* 2005학년도 9월 모의평가 2번


 

해설 : 정답 ⑤

⑤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 통해 개혁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갑신정변은 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대부분의 급진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8. (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보기]

ㄱ. 행해도와 함경도 등지에서 선포되었다.

ㄴ. 시행 일자를 일본 측에 통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ㄷ. 조.일 수호 조규 부록에 규정된 바에 따라 시행되었다.

ㄹ. 미곡을 수출할 때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겼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 2013학년도 6월 모의평가 10번


 

해설 : 정답 ①

① ㄱ. 방곡령은 황해도와 함경도 지역을 중심으로 선포되었다. ㄴ. 조.일 통상 장정의 규정에 의하면 방곡령 실시 1개월 전에 일본측에 통고하도록 되어 있다.


 


 


9. (가) 민족 운동에서 제기된 요구 사항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단발령 철회


② ?노비 문서 소각


③ ?이름 없는 잡세 폐지


④ ?청상과부의 재혼 허용


⑤ ?일본과 내통한 자 엄징

* 2014년 7월 학력평가 2번


 

해설 : 정답 ①

① 단발령은 3차 갑오개혁 때 실시된 내용으로 동학농민운동과 직접적 관련은 없다.


 


 


10. 교사의 질문에 대한 학생의 답변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조병갑의 횡포가 심했기 때문입니다.


② ?일본이 내정을 간섭하였기 때문입니다.


③ ?일본이 명성 황후를 시해하였기 때문입니다.


④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기 때문입니다.


⑤ ?정부가 단발령 실시를 강행했기 때문입니다.

* 2012학년도 6월 모의평가 3번


 

해설 : 정답 ②

② 정부는 농민군과 화약 맺은 뒤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에 계속해서 주둔할 명분을 찾고, 청.일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조선에 개혁요구하면서 경복궁을 점령했다. 제1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한 뒤 내정 간섭을 강화했다. 이에 농민군들은 반일의 기치 아래 재봉기 하여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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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