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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55)

김옥균 묘지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있다. 일본인들은 망명한 김옥균을 냉대하다가 그가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자 머리카락과 의복 일부를 가지고 묘소를 만들었다.


? 김옥균(金玉均)은 고종의 명으로 일본 시찰 중에 임오군란(1882) 소식을 듣고 서광범(徐光範) 등과 함께 급거 귀국했다. 김옥균은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번 출신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일으켜 일본을 근대국가의 길로 이끈 것이 불과 14년 전(1868)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고종은 임오군란 직후 철종의 부마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를 수신사(修信使)로 삼아 일본에 파견했는데, 김옥균도 동행했고, 민비의 조카로 정권 실세였던 참판 민영익(閔泳翊)도 함께했다. ? 박영효는 기행문 사화기략(使和記略)에서 효고현(兵庫縣)에 도착해 “새로 만든 국기를 묵고 있는 누각에 달았다”고 밝히고 있는데, 태극기를 달았다는 사실은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 조선 개화파의 비조(鼻祖)는 중인 출신 역관 오경석(吳慶錫)이었다. 오경석은 병인양요(1866) 때 청나라 예부상서 만청려(萬靑藜) 등을 통해 습득한 프랑스군과 청나라의 동태를 대원군에게 밀보(密報)해 큰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신미양요(1871) 때 대원군에게 ‘도저히 외교를 열지 않을 수 없는 소이’를 설명했다가 버림을 받고 말았다. 이후 오경석은 “먼저 북촌(北村: 서울의 양반 사대부 거주지)의 양반 자제 중에서 인재를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를 설득했다. 훗날 박영효가 이광수에게 “그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홍영식·서광범 그리고 내 백형(박영교)하고 재동 박규수 집 사랑에 모였지요(이광수, 박영효 씨를 만난 이야기)”라고 말한 것처럼 박규수의 사랑방은 양반 출신 청년 개화파를 양성하는 정치학교가 되었다. 박규수 사망 후 개화파는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로 나뉘는데 온건 개화파는 김홍집(金弘集)·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등이고,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박영효· 홍영식(洪英植)·박영교(朴泳敎)·서광범 등이었다. 온건 개화파는 동양의 정신세계에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목시키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창했다.


? 김옥균은 조선 체제를 바꾸는 전면적인 개혁을 바랐다. 가장 큰 걸림돌은 청나라와 그를 추종하는 친청 수구파였다. 청나라는 임오군란 직후인 고종 19년(1882) 8월 조선과 ‘상민수륙(商民水陸)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조선을 ‘속방(屬邦: 속국)’이라고 명기했다.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정권을 되찾은 민씨 척족정권은 청의 이런 횡포에 항의 한마디 하지 못했다. 고종 21년(1884) 5월 당초 개화파였던 민영익이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고 돌아온 뒤 친청 수구파로 전향하면서 개화당은 더욱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서광범 사진 서광범은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갑오개혁 때 학부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지병으로 사망했다.


? 민비를 정점으로 민태호·민영목·민영익·민영소·민응식 등 이른바 오민(五閔)이 정권을 독차지했다. 정치권력과 군사권력이 모두 수구파에게 돌아가자 김옥균은 비상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옥균은 박영효의 집에서 정변을 각오했다. 1884년 봄 안남(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분쟁이 생기자 청은 조선 주둔 3000 병력 중 1500명을 안남으로 이동시켰다. 그해 8월 청불(淸佛)전쟁에서 청나라가 연전연패하자 김옥균은 호기라고 생각했다.? ? 개화당은 정변을 위한 무력을 양성했다. 무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밀지가 필요했다.? 개화당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수구파를 몰아내고 대개혁정치를 실시하려 한 것이다. 개화당은 독자적인 정변을 구상했으나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가 연대하기로 결정했는데, 다케조에는 일본공사관 호위병 150명이면 청국군 1000여 명과 맞설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 드디어 고종 21년(1884) 10월 17일 개화당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총국(郵政總局) 낙성식의 날이 밝았다. 낙성식 축하연 도중 별궁(別宮)에 불을 지르는 것이 신호였는데, 별궁 방화에 실패해 우정총국 북쪽의 민가를 대신 불질렀다. 신호가 떨어지자 미리 지목한 친청 수구파에 대한 제거작전이 전개되었다. 도주하던 우영사 민영익은 중상을 입었고, 한규직·이조연·조녕하 등 군권을 장악했던 수구파 영사(營使)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민태호·민영목·조녕하 등 민씨·조씨 척족들도 제거했는데, 고종실록은 “임금이 연달아 ‘죽이지 말라’고 말했으나 듣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 고종 부부를 경우궁으로 모신 개화당은 이튿날인 10월 18일 신정부를 수립했다. 고종의 종형 이재원(李載元)을 영의정으로 추대하고 병조판서도 그 아우 이재완(李載完)을 추대하는 대신 전후 영사(營使)는 박영효, 좌우 영사는 서광범이 차지해 개화당이 군사지휘권을 장악했다. 신정권은 수십개 조의 개혁정강을 발표했는데 김옥균은갑신일록에서 그중 14개 조에 대해서 적고 있다. ‘①대원군을 귀국시키고 청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한다 ②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재능에 의해 인재를 등용한다 ⑪사영(四營)을 일영(一營)으로 통합하고 왕세자를 육군 대장으로 정한다 ⑫일체의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한다’ 등의 항목이 눈에 띈다.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창하고 재능에 의한 인재 발탁을 주창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 청군의 원세개(袁世凱)는 개화파로 위장한 경기관찰사 심상훈(沈相薰)을 통해 민비의 밥사발 밑에 서찰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임오군란 때 청군을 끌어들였던 판서 김윤식도 청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김옥균 등은 고종과 인천을 거쳐 강화도로 가서 청과 계속 항전하려 했으나 고종은 “나는 결코 인천으로 가지 않겠다”고 반대했다. 드디어 10월 19일 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갑신정변 ‘3일 천하’는 끝나고 말았다. 고종은 청군 출동에 공이 컸던 심순택을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신정권에서 발표한 일체의 개혁정령은 모두 폐지하고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을 5적(賊)으로 규정했다. ? 고종은 부국강병한 근대국가 건설에 목숨을 걸었던 개화당을 제거하는 것이 자신의 우익을 제거하는 것이란 인식조차 없었다. 청·일 두 나라는 1885년 1월 천진조약을 맺었는데 그중에 “일국(一國)이 파병을 요할 때는 마땅히 상대방 국가에 문서로 알려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었다. 청일전쟁의 싹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 삼남지방에 동학이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었다. 백성들은 종교적 체험보다는 사회변혁을 바라고 동학에 입도(入道)했다. 최제우는 ?동경대전(東經大全)? 「논학문(論學文)」에서 “내 도는 이 땅에서 받았으며 이 땅에서 펼 것이니 어찌 서학(西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정은 고종 1년(1864) 3월 그를 “서양의 술법(西洋之術)을 답습한다”는 정반대의 명목으로 목을 벴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사대부 지배체제를 부인했다. 백성들은 더 이상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체제를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종 29년(1892)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전개한 ‘교조 신원(伸寃)운동’은 단순한 종교 자유 획득 운동이 아니었다. 고종 29년(1892) 12월의 전라도 삼례 집회와 이듬해(1893) 2월의 광화문 복합상소에서는 교조신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해 3월의 충청도보은 집회에서는 교조신원 요구가 사라지고대신 “왜양(倭洋)을 소파(掃破?깨끗이 부숨)하여 대의(大義)를 이루고자 한다”고 천명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각성했으나 조대비의 인척인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불효(不孝)?불목(不睦) 등의 명목으로 재물을 빼앗고 만석보(萬石洑) 수세(水稅)를 강징(强徵)한 것처럼 지배층에게 백성들은 여전히 착취 대상이었다.? 이 양자의 의식 차이가 충돌한 것이 동학농민혁명이었다. 전봉준(全琫準)은 고종 30년(1893) 11월 조병갑에게 두 차례 수세 경감요구를 했다가 거절당했다. 다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蒼生?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함이다”라고 선언했다. 전봉준은 사발통문에서 공언한 대로 4월 7일 전주성을 함락시켰으나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에게 정부가 폐정 개혁을 단행한다면 해산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해 5월 8일 정부와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맺어지자 농민들은 전주성에서 나와 호남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을 추진했다.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곳이다. 전북 정읍시 덕천면에 있다.


? 고종은 이미 1년 전의 보은 집회 당시 청군을 불러 진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농민들이 주장하는 폐정 개혁은 민씨 척족정권의 몰락을 의미했기에 척족의 대표 민영준(閔泳駿?뒤에 영휘로 개명)은 청군 차병(借兵)을 적극 주장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동비(東匪?동학)가 홍계훈에게 보낸 글에 ‘국태공(國太公?대원군)을 받들어 모실 것’이란 구절이 있자 양전(고종과 민비)이 크게 노해 동비를 속히 평정하지 않으면 점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청나라에 원병을 청했다’고 전하고 있다. 대원군 집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청군 파병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청군이 파병되자 일본도 즉각 파병했다.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는 6월 21일 일본군 2개 대대를 이끌고 경복궁에 난입했는데, ?고종실록?은 “시위군이 발포하며 저지하자 임금이 중지하라고 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매천야록?은 오토리 공사가‘고종을 협박하여 함부로 요동(搖動)하는 자는 머리를 벤다는 교지를 내리게 하자 병사들이 모두 통곡하면서 총과 군복을 찢은 후 도주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이 조선군의 무장을 해체시킨 셈이었다.? 이날 오토리는 고종에게 “국태공이 아니면 오늘날 인주(人主)가 되지 못했을 것이니 속히 국태공을 데려오라”고 요구했고 쇄국론자 대원군은 일본의 힘으로 세 번째 정권을 잡았다. 대원군 집권이 두려워 청군 파병을 요청한 것이 대원군이 집권하는 역설로 나타났다. 고종이 호위군사들에게 일본군과 맞서면 목을 베겠다는 교지를 내린 상황에서 민씨 척족들은 도주했지만, 일본에 맞서 봉기한 것은 동학농민군이었다. 그해 9월 양호창의영수(兩湖倡義領袖) 전봉준은 충청도관찰사 박제순(朴齊純)에게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우리 임금님을 핍박하고 우리 국민을 어지럽게 하는 것을 어찌 그대로 참을수 있겠는가?”라면서 동참을 요구했다. 그러나 훗날 을사오적(乙巳五賊)이 되는 박제순은 ‘비적(匪賊)이 날뛰고 있다’고 보고했고 고종과 의정부는 순무사(巡撫使) 신정희(申正熙)를 보내 일본군과 함께 농민들을 진압하게 했다. 그해 10월 동학농민군 주력은 충청도 공주의 우금치(牛禁峙) 전투에서 패전했고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잠입해 재기를 모색하던 전봉준은 그해 12월 말께 체포돼 이듬해(1895) 4월 손화중?김덕명 등과 함께 사형당했다.


? 위로부터의 개혁인 갑신정변이 진압된 지 10년 만에 아래로부터의 개혁인 동학농민혁명도 진압되었다. 결정적 순간에는 항상 개혁의 반대편에 섰던 고종의 행태는 이번에도 반복되었고, 개혁 희구 민중세력도 사라져갔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90호 2010년 10월 31일, 제191호 2010년 11월 8일,


http://sunday.joins.com/archives/42432http://sunday.joins.com/archives/4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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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