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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픽사의 스토리텔링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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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를 찾아서’(7월 6일 개봉, 앤드류 스탠턴 감독)를 보다가, 도리(엘렌 드제너러스)가 태어난 곳이 미국 캘리포니아의 바다 생물 연구소임이 밝혀지는 대목에서 소름 돋았다. 형형색색의 물고기가 헤엄치는 드넓은 바다가 아니라, 엄격하게 통제되는 수족관이라니. 그곳의 답답한 분위기를 반영하려는 듯, 바다 생물 연구소가 나오는 장면엔 뿌옇고 이질적인 공기가 떠돈다. 그렇다면 그곳은 바다 생물에게 지옥 같은 곳일까? 이쯤 되면 생태계를 해치려는 탐욕스러운 자본가가 나올 법도 한데, 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런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바다 생물 연구소는 오히려 ‘구조하고 치료하여 바다로 돌려보내기’를 실천하는 기관으로, 선악의 개념과는 관계없이 그냥 기능적인 공간이다. 이 영화에서는 모험의 스펙터클을 더하는 장치 정도다.

돌이켜 보면, 픽사 애니메이션이 거의 그랬다. 픽사가 그리는 세상은 견디지 못할 정도로 가혹하진 않다. 전체 관람가 영화가 사회 부조리를 낱낱이 고발하는 것도 한계는 있겠지만, 그런 이유보다 픽사는 아예 ‘악’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안티 히어로도 없고, 뭔가 음모가 있다 해도 엄청나게 큰 시련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굳이 찾아내자면, 자연이나 세월의 흐름처럼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들이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적대자)로 작용해 왔다. ‘굿 다이노’(1월 7일 개봉, 피터 손 감독)가 묘사한 자연의 잔혹함이 대표적인데, 이마저도 주인공인 공룡 알로(레이먼드 오초아)는 당연한 섭리로 받아들인다.

‘월·E’(2008, 앤드류 스탠턴 감독)에서는 폐기물만 남은 텅 빈 지구를 보여 주는데, 낡은 로봇 월·E(벤 버트)에게 이곳은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은 지옥이 아니다. 이따금 외롭긴 하지만, 이곳에서 묵묵히 일과를 수행하며 엄연한 취미 생활도 즐긴다. ‘라따뚜이’(2007, 브래드 버드 감독)의 생쥐 레미(패튼 오스왈트)는 ‘쥐가 요리사가 될 수 없는 세상’을 한탄하기보다 열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 ‘벅스 라이프’(1998, 존 라세터 감독)에서 중요한 건, 못된 메뚜기 떼를 결국 쫓아냈다는 사실이 아니라 개미들이 자신의 힘으로 개미 왕국을 지켰다는 성취감이다. ‘도리를 찾아서’의 도리도 마찬가지다. 수족관이든 태평양 어디쯤이든 현실적인 좌표가 뭐 그리 중요할까. 픽사의 캐릭터들은 외적 갈등에 크게 함몰되지 않는다. 이 사랑스러운 친구들은 자연과 인생의 흐름을 겸허히 받아들이되, 부단히 자신을 찾아 나선다.

캐릭터의 결함은 장애 아닌 개성
‘인사이드 아웃’(2015, 피트 닥터·로날도 델 카르멘 감독)을 각색했고 ‘굿 다이노’의 시나리오를 쓴 멕 르포브는,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한 힌트로 “캐릭터를 그들의 취약한 부분과 연결시켜라”라고 말했다. 즉, 결함은 장애가 아니라 개성인 것이다. 픽사 영화에서 캐릭터들은 각자가 지닌 상처 때문에 더욱 특별해진다. ‘니모를 찾아서’(2003, 앤드류 스탠턴 감독)의 어린 물고기 니모(알렉산더 굴드)는 힘없는 지느러미 때문에 아빠의 과보호를 받고, ‘도리를 찾아서’의 도리는 단기 기억상실증 때문에 부모까지 잃어버렸다. ‘라따뚜이’의 레미는 ‘생쥐’라는 존재 자체가 요리사의 꿈을 이루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필리스 스미스)은 실수를 연발하고, ‘카2’(2011, 존 라세터·브래드 루이스 감독)의 녹슨 견인차 메이터(래리 더 케이블 가이)처럼 순박하다 못해 분위기 파악 못하는 캐릭터도 있다.

작품마다 결함 있는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온 픽사는, ‘도리를 찾아서’에서 조금씩 모자란 친구들을 대거 결집한다. 건망증을 앓는 ‘블루탱’ 도리를 비롯해 다리가 일곱 개인 문어, 고도근시 고래상어, 음파 탐지 능력을 쓸 수 없는 흰고래, 말 못하는 바다사자와 물새 등 장애를 가진 캐릭터들이 친구가 되어 모험을 이어 간다. 이들이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는 풍경이 제법 흐뭇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건, 캐릭터의 결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선 그 자체에 있다.

영화평론가 A O 스콧은 ‘뉴욕 타임스’에서 “‘도리를 찾아서’는 인지적·신체적 차이점을 인정하는 의식”이라면서 “이 영화가 놀라운 것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아주 자유롭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이 비전을 어른들보다 훨씬 더 쉽게, 더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 평했다. 그의 지적대로, 픽사 애니메이션에서 누군가의 결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플래시백(Flashback·과거 회상 장면)을 되도록 자제하는 것 역시, 과거의 사연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니모가 어쩌다 약한 지느러미를 갖게 되었는지, 문어 행크(에드 오닐)의 다리가 왜 여덟 개가 아닌지 알지 못한다. 아니, 알 필요도 없다. 촉수를 잃었다는 행크에게 도리는 말한다. “그럼 다리가 일곱 개네? 나, 산수 잘해.” 이건 장애를 희화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숙한 세상은 이렇게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할 때 완성된다.

성공보다 중요한 건 도전의 가치
픽사의 전 스토리보드 아티스트 엠마 코츠는, 픽사에서 일하며 들었던 조언을 바탕으로 ‘픽사 스토리텔링의 22가지 법칙’을 트위터에 공개한 적이 있다. 그중 첫 번째 법칙이 “성공보다 도전하는 과정에 포커스를 맞추라”는 것이다. 이는 픽사의 캐릭터들이 특별히 뛰어나거나 강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스케일에 차이가 있을 뿐, 픽사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로드무비의 형식을 보인다. ‘업’(2009, 피트 닥터·밥 피터슨 감독)이나 ‘도리를 찾아서’처럼 아예 모험을 떠나는 경우도 있고, ‘인사이드 아웃’처럼 사춘기 소녀의 두뇌 속을 탐험하는 독특한 스타일도 있다. 기적적인 결말은 아닐지라도,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여행이 끝날 때쯤 조금씩 성숙해 있다.

픽사의 세계에는 절대적 선도, 지독한 악도 없다. 픽사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큰 악당은 곧 자기 자신인 셈이다. 따라서 못된 녀석 하나를 혼내 주거나 외적 갈등을 봉합한다고 해서 모든 여행이 끝나진 않는다. 모험에 마침표를 찍으려면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다행히 픽사의 캐릭터들은 생각이 열려 있어서, 주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도 안다. ‘토이 스토리’(1995, 존 라세터 감독)의 버즈(팀 앨런)는 낙심을 딛고 자신이 장난감으로서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토이 스토리3’(2010, 리 언크리치 감독)의 장난감들은 아름답게 이별한 뒤에야 새로운 만남을 가진다. ‘카’ 시리즈(2006~)의 스포츠카 라이트닝 맥퀸(오웬 윌슨)은 또 어떤가. 성공만을 좇던 그는, 우연히 들른 시골 마을에서 느린 삶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도리를 찾아서’의 도리는 변화하기보다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며 주변을 변화시킨 캐릭터다. 전편 ‘니모를 찾아서’에서 도리는 매사에 조심스러운 말린(앨버트 브룩스)에게 “아무 일도 없이 어떻게 살아요? 재미없잖아요!”라고 말했다. 이는 곧 현재에 충실한 도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도리는 비록 3초 전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과 지금 보는 풍경을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고, 결국 부모를 찾았다. 부모를 찾기 위해 떠난 여행 끝에, 도리는 부모뿐 아니라 자아도 되찾았다. 비록 기억력이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도리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한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위로
너와 내가 다르고, 내 삶은 결국 내가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기에 모든 존재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 픽사 영화에서 내면의 로드무비를 떠나는 캐릭터들 역시 외롭다. 그럼에도 픽사의 작품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그리는 걸 잊지 않는다. ‘도리를 찾아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도리의 부모가 딸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조개로 거대한 길을 만들어 놓았을 때다. 나를 기다리는 이가 있다는 것, 절대적인 내 편이 있다는 것만큼 든든한 게 또 있을까.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라일리(케이틀린 디아스)가 가출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부모는 자초지종을 묻는 대신 큰 상실감에 힘겨웠을 딸을 꼭 안아준다.

‘가족’이란 단지 혈연으로 맺은 부모·자식 관계에 한정되지 않는다. 현실에서라면 포식 관계에 놓였을 바다 생물들이 친구가 되고, ‘굿 다이노’에서처럼 공룡과 사람이 든든한 동반자가 되기도 한다. ‘업’에서 아내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괴팍한 노인은, 과거에서 자유로워지는 대신 새로운 친구를 얻는다. 심지어 ‘월·E’의 작은 로봇은 단순한 몇 마디 말로 아둔한 인간들에게 소통의 기적을 가져다 준다. 그런 점에서 픽사가 그리는 사려 깊고 따뜻한 세계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상향일지도 모르겠다. 다름을 인정하되 그것이 계급으로 이어지지 않고, 홀로 서되 함께 나눌 수 있는 세상. 어쩌면 그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보다 훨씬 현실적인 것은 아닐까.

신민경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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