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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쓰나미 앞에서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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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1987년 여름은 무더웠다. 독재정권에 항거한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그들은 분노의 적란운을 몰고 남목고개를 넘었다. 북구의 현대차, 남구의 석유화학단지가 제창한 ‘철의 노동자’가 전국을 강타했다. 그 덕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철문을 쉽게 열었다. 30년이 흘렀다. 그 ‘철의 노동자’는 고임금집단으로 올라섰다. 그런데 오늘은 한숨소리만 들린다. 호황 잔치 끝에 수주절벽 쓰나미를 맞았다. 몇 차례 발령된 쓰나미 경고는 노사 모두 남의 일이었다. 정부와 국민에 구걸의 손을 내밀었다. 살려 달라고 말이다.

이 굴욕적인 소문은 동구와 북구를 잇는 남목고개를 아직 넘지 못한다. 조직 이익 외에는 귀를 닫은 정의로운 현대차 노조가 진을 치고 있다. 남목 로터리 담장 너머로 수만 대의 차가 장맛비를 맞는 광경이 목격된다. 전주공장에는 트럭 1만 대가 야적돼 있고, 아산공장에는 승용차 1만6000대가 수주를 애걸하고 있다. 수주 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쓰나미가 자동차산업을 초토화할 기세다.

중국 알리바바 마윈 회장은 며칠 전 스마트카 시승행사를 열었다. 야심작 RX5는 앱으로 작동하는 자율주행 인터넷 단말기로 8월 출시 예정이다. 1885년 독일 카를 벤츠가 발명한 엔진 구동 ‘모터 마차’ 개념이 130년 만에 자율 주행하는 컴퓨터로 변했다. 거기에 전기자동차가 가세해 혁명이 진행 중이다. 스마트카와 커넥티드카가 몰고 올 쓰나미는 전통 엔진과 변속기를 박물관에 처박는다. 세계 전문가들은 자율주행차가 2020년 본격화되고 2030년에는 약 4000만 대가 팔린다고 예측한다. 현대차의 미래는 5년 내에 결판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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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가 이런 위기감을 공유하면 오죽 좋으련만 유독 한국에서만 따로 논다. 울산을 엄습할 쓰나미는 우선 엔진·변속기공장 수천 명을 위협하겠지만 철갑을 두른 노조원은 어쨌든 살아남는다. 60세까지 평생고용협약 덕분이다. 옆집 현대중공업 사태를 근심하는 노동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기업 운명은 경영진의 몫, 노동자는 최소 노동과 최고 임금에 관심을 쏟는다. 올봄 현대차 노보(勞報)를 달군 핫기사는 미래 대비가 아니라 ‘마지막 20분’이었다. 노동자의 숙원인 밤샘 노동을 없애고 오전, 오후 ‘주간 8시간 교대’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빚어졌다. 오후 조 작업종료는 0시10분인데 생산량 유지를 위해 20분 더해야 한다는 원칙에 노사가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10분에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밀려 나왔다. 경비원이 막아서자 실랑이가 벌어졌다. 노조는 노동탄압, 경영은 합의위반으로 맞섰다. 밤샘 노동을 없앤 진취적 의미는 희석됐다.

작업현장에는 ‘야리쿠리(やりくり)’라는 관행이 있다. 변통이라는 일본말로 8시간 노동 분량을 예컨대 6시간에 해치워버리는 것을 뜻한다. 해치우고 논다. 두 공정을 뛰는 동안 친구는 놀고 다시 역할을 바꾸는 지혜로운 ‘2인 계(契)’도 인기다. 울산공장의 컨베이어는 세계에서 가장 느릿하게 돈다. 지난해 자체 통계에 의하면 대당 생산시간(HPV)은 현대차 미국 공장과 체코·슬로바키아 공장이 울산공장보다 약 2배 빠르고, 베이징현대도 1.6배 빠르다. 개선되고는 있으나 노조가 장악한 작업현장은 여전히 도덕적 해이를 즐기는 활력이 넘친다. 그래도 렉서스를 능가하는 프리미엄 차가 나오는 게 기적이다.

울산공장의 평균임금은 포드, 도요타, 폴크스바겐에 뒤지지 않는다. 현대차 인도공장과 중국 공장에 비해선 월등 높고 심지어 앨라배마 미국 공장보다도 약간 높다. ‘철의 노동자’의 완벽한 승리다. 현대차 노조는 올 임금협상에서 기본급 8% 인상과 성과급 인상안을 또 내걸었다. 미래 대비 기술투자나 기능 향상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고, 대신 연구원 승진거부권 요구가 나왔다. 철밥통 노조원으로 남겠다는 얘기다. 임금협상은 결렬됐다. 파업 찬반투표 이후 광화문 상경투쟁을 감행한다는 소문도 들린다. ‘민주노동’의 이름으로.

지난 7일 건설노조가 휩쓸고 간 광화문은 황폐했다. ‘건설현장의 질서를 지키자’는 의로운 구호는 쓰레기가 됐다. 광화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구의역이 있다. 19세 청년이 계약직으로 일하다 숨진 곳. 그는 월 140만원을 받는 임시직, 미래를 짊어진 청년 학도였다. 현대차 노조원의 최대 숙원은 자녀들이 번듯한 전문직을 갖는 것. 여기에 임금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현대차만 한 기름밥 직장을 갖기도 어렵게 됐다. 61세 고용연장을 내세워 임금피크제도 거부했으니 그 부작용이 자식 세대에 집중된다는 것쯤은 87년 남목고개를 넘은 정의로운 전사들은 알았을 터이다. 광화문은 사익 추구에 매몰된 이기적 군상을 환영하지 않는다. 국내 경제 사정은 고사하고 저임생활자, 실직 노동자의 쓰린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다. 노동운동의 향도 격인 현대차 노조, 언제 국민의 신뢰와 기대를 회복할까.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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