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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굴복 강요 3년 끈 실랑이, 스탈린 사망으로 물꼬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윌리엄 해리슨 2세(왼쪽) 유엔측 대표와 남일(오른쪽) 공산측 대표. [중앙포토]


무릇 싸움이나 전쟁은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끝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한쪽이 이긴 경우에 강화·종전·평화 등의 조약 이름으로 상황을 정돈하게 되고, 승부를 당장 가리기 어려운 경우에는 정화·정전·휴전 등의 이름으로 싸움 중단을 모색하게 된다. 승리한 전쟁조차 큰 피해를 주는 마당에 하물며 이길 수 없는 전쟁은 하루라도 일찍 끝내고 싶은 동기가 있게 마련이다. 휴전이 이뤄지려면 무엇보다도 쌍방 모두가 휴전을 원해야 한다. 물론 이 조건만으로 휴전이 성사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더 절박하다고 서로 판단하여 더 큰 양보를 요구하다 보면 휴전 합의에 이르지 못하기도 한다.

1 1951년 7월 10일 첫 휴전회담이 열린 개성 내봉장의 모습 .


6·25 전쟁 휴전의 정치학1950년 발발한 6·25전쟁만 해도 여러 휴전 방안이 전쟁 내내 제시되었지만 휴전은 3년 동안 성사되지 못했고 1953년 7월 27일에서야 이뤄졌다. 지금으로부터 66~64년 전의 시점에서 휴전이 왜 성사되지 못했고 63년 전의 시점에서는 왜 이뤄졌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개전 첫 1년이다. 50년 7월 10일,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영국이 소련의 의중을 감안하여 제시한 휴전 안을 거부했다. 북한군이 38선 이북으로 돌아가는 대가로 미국은 대만 방어를 포기하고 유엔에서의 중공 대표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는 영국 외상 베빈의 의견에 대한 답신에서이다. 미국에게는 장제스 체제의 전략적 가치가 이승만 체제보다 못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미국 스스로가 군사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미군을 주축으로 구성된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한 후 북진을 거듭하여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하는 상황이라 휴전을 도모할 동기가 50년 가을까지는 없었다. 중국군이 참전하여 남진하던 그해 겨울에는 상황이 바뀌어 공산군측이 그런 입장이었을 것이다. 즉 6·25전쟁 개전 첫 1년은 휴전을 쌍방 모두가 동시에 간절히 원했던 시점이 없었고 따라서 휴전은 이뤄지지 못했다.


 

2 유엔군 대표단. 왼쪽부터부터 로렌스 크레이지 미 공군 소장, 백선엽 한국군 1군단장, 터너 조이 해군 중장(극동해군지휘관, UN측 회담대표), 헨리 호즈 미8군 참모총장 보좌관, 알라이 버크 미 해군 소장.


다음, 개전 2~3년차의 시기이다. 51년 7월 10일, 개성 송악산 기슭의 내봉장에서 6·25전쟁의 휴전 본 회담이 드디어 개최되었다. 당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유엔군측과 공산군측 모두에서 휴전 필요성이 제기되던 차였다. 이승만 정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당사국은 휴전 의사를 내비쳤다. 휴전이 쌍방 모두에게 호혜적 대안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쌍방은 여러 어려움 속에 전쟁을 수행하고 있어 휴전을 바라고 있었지만 동시에 상대가 휴전을 더 절실하게 원할 것이라는 기대 또한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합의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휴전 협상은 쌍방 모두에게 적절한 휴전 내용을 찾기보다 상대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일관했다. 비록 유엔군측 제안으로 합의된 것이었지만 회담 장소인 공산군측 구역에 들어갈 때 유엔군측 차량에 백기를 게양하게 했다든지, 전통적으로 승전국을 상징하는 방향의 좌석 배치를 고집했다든지, 유엔군측 대표단의 좌석에 낮은 의자를 배치했다든지, 회담장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깃발을 서로 더 큰 것으로 바꿨다든지, 중무장한 공산군측 경비병이 유엔군 대표단을 위협했다든지 하는 저속한 행동을 보였다. 이후 전개된 휴전 회담 내내 그런 기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휴전 회담에서 억지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친 것은 자신이 휴전에 안달하지 않음을 상대에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였다. 공산군측은 서방 참전국 내에서 휴전 요구가 일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영국 등을 비롯한 여러 서방 참전국 내의 반전운동은 공산군측으로 하여금 휴전 협상에서 더 큰 요구를 하게 만들었다. 특히 미국 정부의 여러 온건 정책은 휴전 협상에 지장을 초래했다. 강경파 맥아더가 해임되자 공산군측은 미국이 핵무기 사용의 옵션을 배제했다고 해석했다.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유엔군의 군사작전을 제한한 미국 정부 조치 또한 휴전 협상에서 불리한 여건을 조성했다. 휴전을 앞두곤 불필요한 인명 손실을 줄이기 위해 군사작전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유엔군측 협상 대표였던 터너 조이는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압박하여 일찍 휴전에 합의했더라면 발생했을 인명 손실이 실제 휴전 회담 2년 동안 발생한 인명 손실보다 훨씬 작았을 것이라고 그의 회고록에서 주장한다. 하여튼 공산군측은 휴전 협상에서 유엔군이 양보할 여지가 크다고 판단했다.


 


후방이 강경할 때 협상에 유리협상에서는 종종 온건한 속내의 공개가 어려움을 가져다 준다. 예컨대 포로 문제와 비행장 건설 문제에 쌍방이 합의하지 못하고 있을 때 유엔군측은 비행장 건설을 금지하지 말라는 공산군측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포로 문제에서 공산군측의 양보를 얻어낸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언론에서 미국 정부가 비행장 건설 금지 주장을 철회하기로 했다고 보도해버리자 포로 문제에서의 양보를 얻기 위한 협상카드로 비행장 건설 문제를 사용하기가 어려워졌다.


대체로 협상은 후방이 협상 일선보다 강경할 때 더 유리하다. 영화 ‘투캅스’에서 보듯이 온건파(good guy)는 강경파(bad guy)의 존재를 적절히 활용하여 상대에게서 양보를 얻어낼 수도 있다. 협상자가 강경한 주인의 대리인에 불과한 상황은 극단적 예다. 주인이 입력한 가격대로만 판매하는 자동판매기와 흥정해서 가격을 깎은 소비자는 없다. 오히려 돈을 넣었음에도 물건이 나오지 않아 자동판매기를 흔들다 깔려 죽거나 다친 사례만 있을 뿐이다. 주인 대신 대리인이 협상장에 나가는 이유다.


휴전 회담은 여러 의제들이 합의됐음에도 52년 10월 8일 회담을 끝으로 결국 휴회됐고, 53년 4월 26일에 재개될 때까지 무려 반년을 기다려야 했다. 스탈린이 소련 국익을 위해 고의적으로 휴전을 지연시켰든 아니면 미국이 포로 문제를 이념공세로 활용했든, 이미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제한전 개념으로 한국 전쟁에 임했기 때문에 쌍방 모두 휴전 동기가 절박하지 않았다. 트루먼이 52년 3월 재선 포기를 선언할 정도로 낮은 미국 행정부의 지지도 또한 휴전 최종 타결에 장애로 작용했다. 그래서 휴전 회담이 시작된 지 2년이나 지났음에도 실제 휴전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끝으로, 전쟁 마지막 1개월 시기이다. 53년 7월 10일 재개된 휴전 회담에서 쌍방은 특정 휴전 조건을 내세우기보다는 기존 합의를 전제로 상대에게 휴전을 압박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미 53년에 접어들면서 휴전을 둘러싼 상황은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 해 1월 미국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등장하고, 3월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휴전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4월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은 부상 포로를 교환하기로 합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6월 8일에는 포로 교환에 관해서도 합의했다.


 

3 공산군 대표단. 왼쪽부터 중공군 시팡 소장, 등화 중장, 북한군 남일 중장(공산측 회담대표), 이상조 소장, 장평산 소장. [중앙포토]


6월 18일 이승만 정부의 반공포로 석방 조치는 공산군측의 반발을 가져와서 휴전 협상을 일단 결렬시켰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조치가 쌍방으로 하여금 최종 합의를 서둘게 만들었다. 물을 어디에 부어야 할지 밀고 당기는 지루한 협상 국면에서 물을 한 곳에 엎어버려 되돌릴 수 없게 만듦으로써 그 사안이 더 이상 협상에서 난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공산군측은 석방된 포로를 전원 다시 수용할 것을 유엔군측에 요구했지만 실현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에 대신 휴전으로의 확실한 이행을 요구했다.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하기 전에 휴전을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아울러 느꼈다. 그리하여 7월 10일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이 재개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공산군은 6~7월에 걸쳐 이른바 ‘금성 돌출부’지역에 대규모 공세를 전개했다. 이 지역의 화천발전소를 노리기 보다는 국군이 주로 맡은 방어지역을 집중 공격해서 이승만 정부에게 휴전의 필요성을 체감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농후했다. 공세는 휴전 회담이 재개된 7월 10일에 최고조에 달했다. 7월 11일 이승만 정부는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동시에 한미 정부는 이승만 정부가 휴전에 반대하지 않을 조건으로 제시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추진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7월 한 달 동안 유엔군과 공산군의 사상자 수는 각각 약 3만 명과 약 7만 명에 이르렀다. 정전협정 서명 직전에 이처럼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군사작전을 감행한 것은 군사분계선을 유리하게 획정하겠다는 의도뿐 아니라 휴전이 그만큼 절실하다는 본심의 다른 표현이었다.


 


합의 가능한 범위 정하는 게 우선정전협정 체결 후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미국 당국자들은 휴전이 이뤄지지 않으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중립국 인도를 통해 공산군측에 전달됐기 때문에 휴전이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인도는 그런 메시지를 중국에게 전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산군측이 합의됐을 때의 유·불리뿐 아니라 합의되지 않았을 때의 유·불리를 따져보았음은 분명하다.


합의 부재의 상황 그리고 합의 가능의 범위를 파악하는 것이 합의를 위한 첫 과제다. 예컨대 판매자와 구매자가 특정 물건의 가치를 각각 80원과 70원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자. 물건을 1개 갖고 있는 판매자는 합의 부재의 상황에서 80원 가치를 갖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합의 가능 범위는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거래는 성사되지 않는다. 만일 판매자와 구매자가 물건 가치를 각각 50원과 100원으로 생각한다면 50~100원이 합의 가능 범위다. 그런데 합의 가능 범위가 존재한다고 해서 거래가 반드시 성사되는 것은 아니다. 판매자는 구매자의 의향을 간파해서 가격을 99원으로 고집할 수도 있고, 구매자 역시 51원에 팔아도 손해보지 않는 판매자의 입장을 알아채서 51원을 계속 요구할 수도 있다. 쌍방이 이런 태도만 견지한다면 거래는 이뤄지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합의 가능한 범위가 좁을 때 오히려 합의 가능성이 더 클 수도 있다.


호혜적 대안의 존재는 협력의 필수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호혜적 대안이 존재함에도 전혀 실천되지 못하고 기 싸움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남북관계에서, 합의 가능한 범위를 우선 찾아보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박한 상황을 합의 타결로 승화시키는 전략이 더욱 필요해지고 있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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