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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감 무장한 그들, ‘소황제’ 중국 선수 일깨운다

지난 3월 11일 수퍼리그 장쑤 쑤닝과의 원정경기에서 골을 넣은 옌볜 선수들이 박태하 감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옌볜은 1-2로 졌지만 탄탄한 조직력을 보여줬다. [사진 옌볜 푸더]


중국 대륙에 ‘축구 광풍’이 분다. 시진핑 주석이 ‘축구 굴기’를 선언한 이후 수많은 기업들이 돈다발을 안고 축구에 뛰어들었다. 가장 격한 변화는 중국 프로축구 수퍼리그(CSL)에서 나타났다. 수퍼리그 구단들은 대부분 중국 굴지의 기업들이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블랙홀처럼 세계적인 스타와 지도자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지난달 브라질 공격수 헐크가 이적료 5580만 유로(약 715억원)에 상하이 상강으로 이적했다. 그러자 상하이 선화는 이탈리아 공격수 그라치아노 펠레를 영입하겠다고 나섰다. 주급 15만 파운드(약 2억2466만원)를 제안했다. 중국 수퍼리그는 올 1월 겨울 이적시장에서 2억5890만 유로를 풀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2억4730만 유로)를 누르고 가장 많은 이적료를 쓴 리그가 됐다.


지난달 21일 K리그 명문 FC 서울을 맡고 있던 최용수 감독이 장쑤 쑤닝행을 전격 발표했다. 최 감독은 불과 한 달 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지도자는 돈에 흔들리면 안 된다. 시즌 중간에 팀을 옮기는 건 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고 말했었다. 최 감독은 연봉 300만 달러를 포함해 매년 500만 달러(약 58억원)를 보장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수퍼리그 16개 팀 중 5개 팀이 한국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중국 축구는 왜 한국 감독에게 구애를 하는 것일까. ‘차이나 머니’에 실려간 한국 지도자들은 어떤 생각과 고민을 갖고 있을까. 돈으로 쌓아올린 중국 축구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꼬리를 무는 질문을 안고 옌볜조선족자치주 옌지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박태하가 친구 홍명보에게 져 줬다” 헛소문지난 일요일(3일) 오후 3시 30분. 옌지 인민경기장에서 수퍼리그 15라운드 옌볜 푸더와 항저우 뤼청의 경기가 열렸다. 옌볜의 박태하 감독과 홍명보 항저우 감독은 K리그 포항 스틸러스에서 한솥밥을 먹은 친구 사이다. 옌볜은 지난해 갑급리그(2부리그) 우승을 차지해 수퍼리그로 승격했다. 조선족 선수와 K리그 신인왕 출신 3인방(하태균·윤빛가람·김승대)이 주축이다. 항저우는 구단에서 키운 젊은 선수에 호주 대표 팀 케이힐, 한국 수비수 오범석 등이 중심을 잡고 있다.


최근 분위기는 옌볜이 좋았다. 14라운드에서 스자좡 융창을 상대로 원정경기 첫 승리(3-1)를 거뒀다. 13라운드에서는 홈에서 ‘거함’ 광저우 헝다와 1-1로 비겼다. 5분만 더 버티면 이길 수 있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구단은 이 경기에 승리수당 500만 위안(약 8억6285만원)을 걸었다고 한다.


3만 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은 붉은색 유니폼과 각종 깃발로 무장한 옌볜 팬들로 뒤덮였다. 일반 관중이 아닌 서포터스 조직이 네 군데로 나눠 경쟁하듯 응원을 펼치는 장면이 이색적이었다. 경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케이힐의 헤딩골을 시작으로 20분 만에 항저우가 3골이나 넣어버렸다. 옌볜은 윤빛가람의 골로 추격했지만 1m96㎝의 거한 탄양에게 쐐기골을 허용했다. 결국 경기는 4-2, 항저우의 승리로 끝났다. 흥분한 관중들은 심판을 향해 물병을 집어던졌고, 관중석 곳곳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1980~90년대 한국 축구장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날 저녁, 옌볜 구단 수뇌부와 코칭 스태프가 참석하는 만찬이 열렸다. 모두들 ‘멘붕’ 상태였다. 국가대표 수비수 출신 이임생 수석코치는 “지금까지의 홈 경기 중 최악이었다. 선수들이 자신도 모르게 자만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날 2군 경기에서는 옌볜이 항저우를 1-0으로 이겼다. 19년 동안 한국 대표팀 의무 담당으로 일했던 황인우 트레이너를 거기서 만났다. 홍 감독과 함께 항저우로 간 그는 “중국 선수들은 상대와 부딪쳐 넘어지면 일어날 줄을 몰랐다. 홍 감독님이 오셔서 1,2군 구분 없이 기용하면서 선수들 간에 경쟁의식이 생겼고 한 경기를 치를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골키퍼 지문일 ‘이적료 100억원’ 러브콜점심 식사 후 박태하 감독과 마주 앉았다. 지금은 ‘옌볜 축구의 영웅’으로 불리지만 언제 어떤 일이 생겨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벌써 ‘박태하가 강등 위기에 처한 친구 홍명보를 위해 져 줬다’는 헛소문이 돌고 있었다.


가장 힘든 게 뭔지 물었다. “선수들의 자세와 생활 습관을 바꾸는 거였다. 조선족 선수들은 부모가 돈 벌러 한국이나 동남아로 나가서 거의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래서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싶을 때 잤다. 과학적인 훈련과 생활 습관을 가르쳐 주니까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옌볜 팀에는 조선 민족 특유의 끈질기고 지기 싫어하는 기질이 흐른다. 개인 능력은 좀 떨어지지만 끈끈한 조직력으로 버티고 있다.”


중국 축구의 특징을 물었더니 박 감독은 “소황제로 자란 선수들이라 쉽게 포기하고, 협동심이 부족하다. 타인과 함께 뭔가를 하는 것 자체에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 같다. 그렇지만 워낙 자질 좋은 선수가 많아 유소년 육성 시스템이 갖춰지면 무섭게 성장할 것”이라고 답했다. 왜 중국 팀이 한국 감독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했다. “유럽의 명장들은 ‘계약’을 기반으로 일한다. 선수가 부족하면 더 뽑아 달라고 하고, 성적이 나쁘면 미련없이 떠난다. 그러나 한국 지도자들은 ‘사명감’으로 일한다. 선수들의 사생활을 통제하면서까지 팀의 기강을 세우고, 프로 의식을 갖추도록 요구한다. 이런 점을 좋게 보는 것 같다.”


박 감독은 “물론 한국 감독들은 끊임없이 견제를 받고 텃세에 시달리기도 한다. 여기에선 계약 기간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소신껏 뜻을 펼치다 가는 게 좋다”고 말했다.


박 감독과 헤어진 뒤 바로 옆 호텔에 묵고 있는 홍 감독을 만났다. 그는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실패한 뒤 팬들의 질타에 시달렸다. “정식 인터뷰가 아니라 차 한잔 하자”고 했다.


2연승을 거둔 홍 감독은 여유를 찾은 듯 했다. 항저우는 6월 하순까지 11경기 연속 무승(3무8패)에 최하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홍 감독은 “오래 승리가 없어 미안했지만 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구단주도 당장의 성적보다는 팀이 차근차근 성장하기를 원한다. 결과에 상관 없이 내 계약 기간을 지켜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항저우는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제대로 갖춘 팀으로 평가받는다. 옌볜전 쐐기골을 터뜨린 탄양(27)도 홍 감독이 2군에서부터 차근차근 키워 올린 선수다. 홍 감독은 “탄양은 하체 힘이 없어 툭하면 넘어졌는데 조금씩 올라오더라. 다른 선수들도 처음 봤을 때 뱃살이 장난 아니었다. 3주 동안 아침 먹기 전에 가볍게 조깅을 시켰더니 조금씩 나아졌다. 우리 팀은 선수를 키워낸다는 철학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수퍼리그는 중국 선수들의 이적을 ‘팀당 1년에 5명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그 바람에 선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지난해 옌볜의 승격을 이끈 골키퍼 지문일은 ‘이적료 100억원’ 제안을 받기도 했다. ‘돈=승리’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어떤 구단주는 하프타임에 라커룸에 들어가 “베팅(승리수당)을 두 배로 올릴테니 꼭 이기라”고 했다고 한다.


‘돈으로 쌓은 탑’ 수퍼리그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중국에서 만난 전문가들의 말은 대체로 일치했다. ▶시진핑 임기(2022년)까지는 갈 것이다. ▶중계권료·스폰서십 등 리그의 체계가 잡히고 있다. ▶문제는 중국 축구(선수·심판·팬)의 수준이다. 양(量)의 팽창을 질(質)이 얼마나 받쳐주느냐의 문제다.


한국축구 옆 동네에 중국이라는 큰 장이 섰다. 위기이자 기회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를 이렇게 바꿔 보자. ‘블랙홀에 빨려들어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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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