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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밀매 과잉단속 중 시민 사망, 대만 2·28 사태 도화선

1 대만성 행정장관 천이는 국민당 군 1급상장이었지만 문민통치의 신봉자였다. 1941년 1월, 푸젠(福建) 성장 시절의 천이.


항일전쟁 기간, 중공도 대만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전쟁 승리 후 간부들을 대만으로 파견했다. 중공 대만성(臺灣省) 공작위원회를 설립하고 지식 청년들에게 파고들었다.


1946년 6월, 국·공담판이 파열됐다. 중국은 내전에 휩싸였다. 그 해 겨울 베이징에서 선충(沈崇·심숭) 사건이 터지자 대만의 학원가도 술렁거렸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대만의 중공 활동이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대만성 행정장관 천이(陳儀·진의)에게 편지를 보냈다. “대만은 깨끗한 곳(淨土)이다. 잘 보존토록 해라.” 천이도 동감했다. 깨끗한 섬에 걸맞는 문민 통치를 펴겠다며 대륙에서 파견한 군인들을 철수시켰다.


천이는 여자는 가까이 했지만 술과 담배라면 질색이었다. 부하들에게 술 마시고 담배연기 내뿜을 시간 있으면 여자와 놀러 다니라고 권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술과 담배를 생활 필수품으로 치지 않았다. 대만에 부임하자마자 “즐기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물건”이라며 전매를 실시했다. 밀수와 밀매업이 성할 수밖에 없었다. 전매국은 단속을 엄격히 했다. 대신 밀매음(密賣淫)은 내버려뒀다.

2 대만에서 철수하는 국민당 군. 1946년 2월, 치룽(基隆). 1년 후, 2·28 사태가 발생했다. [사진 제공 김명호]


2·28사건의 도화선은 담배였다. 47년 2월 27일, 전매국 단속반과 경찰이 담배 밀매 현장을 덮쳤다. 동작 빠른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외제 담배 가판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린장마이(林江邁·임강매)라는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혔다. 나이는 40세, 1남 1녀를 거느린 과부였다. 단속반은 담배 50보루와 현금 6000원을 몰수했다.


공권력은 묘한 속성이 있다. 남발하거나 과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린장마이는 제발 돌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남에게 빌린 돈으로 구입한 물건이다. 이게 없으면 우리 가족은 당장 굶어 죽는다.” 단속원이 밀쳐버리자 바지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단속원은 린장마이의 어깻죽지를 곤봉으로 후려 갈겼다. 여인은 이를 악물고 바짓가랑이를 놓지 않았다. 군중들이 술렁거렸다. 단속반에게 욕을 퍼부어댔다. 여기저기서 돌멩이가 날라왔다. 린장마이의 머리가 피범벅이 됐다.


군중들은 단속원의 폭행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단속반을 에워싸고 두들겨 팼다.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도망가던 경찰과 단속반을 군중들이 에워샀다. 기세가 등등하고 분위기가 살벌했다. 공포를 느낀 경찰 한 명이 실탄을 발사했다. 부인 심부름 나왔던 천원시(陳文溪·진문계)라는 초혼의 청년이 즉사했다.


군중들은 격분했다. 타이베이 경찰국으로 몰려갔다. 경찰국은 전매국에 책임을 떠 넘겼다. “너희들 때문이다. 직접 와서 해결해라.” 전매국 상무위원과 순시조 조장이 경찰국으로 달려왔다. 군중들에게 싹싹 빌었다. 효과가 없자 순시원들을 헌병대에 넘기겠다며 얼버무렸다. 그날 밤, 군중들은 씩씩거리며 거리를 헤맸다. 경찰차 한 대가 잿더미로 변했다.


2월 28일, 새날이 밝았다. 일부 청년들이 꽹과리를 두드리며 중심가를 누볐다. 상인들에게 파시(罷市)를 호소했다. 상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상점 문을 닫았다. 비명에 죽은 천원시는 타이베이의 밤을 지배하던 천무룽(陳木榮·진목영)의 친동생이었다. 오전 9시, 천무룽의 부하와 친구들이 천원시의 시신을 메고 사건 발생 지역의 파출소에 나타났다. “총 쏜 놈 나오라”며 춤추고, 통곡하며, 온갖 타악기를 두들겨 댔다. 진정을 권하는 파출소장을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들겨 패고 파출소를 때려 부셨다.


시간이 갈수록 시위 참여자가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전매 분국이 눈에 뜨이자 밀고 들어갔다. 이곳에도 순시원들이 있었다. 두 명이 맞아 죽고 네 명은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창고에는 압수해온 술·담배·성냥이 가득했다. 시위대는 마당에 끌어내 불을 질렀다. 차량들도 온전치 못했다. 구경꾼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만세를 부르며 합세했다.


시위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불지르며 전매 총국으로 향했다. 시위군중 대표 다섯 명이 총국장에게 요구서를 제출했다. “총기를 사용한 경찰관을 민중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해라. 사망자 유족에게 후히 보상해라. 담배 밀수를 근절하고 순시원 제도를 폐지해라. 총국장은 민중들에게 사과해라.” 총국장은 부재중이었다. 부국장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대표들은 울화가 치밀었다. “뭐 이런 놈이 있느냐”며 머리통을 쥐어박고 나왔다. 확답을 못 받은 시위대는 전매국 직원 숙소로 몰려갔다. 전임 국장을 찾았다. 부인과 함께 달아났다는 말을 듣자 직원 숙소를 불질렀다.


한 채도 안 남기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시위 행렬은 행정장관 집무실(行政長官公署)을 조준했다. 도중에 닛뽄도(日本刀)와 각목, 일본군이 버리고 간 총기를 휴대한 폭력배들이 합세했다. 평소 천이는 장관 공서에 무장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문전이 한산했다. 놀란 경비원이 공포탄을 발사했다. 몇 명이 쓰러졌다.


대만에 잠복해있던 70여 명의 중공 지하당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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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