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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늙어본다


초보 初步


국어사전 처음으로 내딛는 걸음. 첫걸음. 어떤 일의 시작.


그 여자의 사전 좌충우돌 시행착오의 동의어. 얼른 벗어나 능숙함으로 뛰어오르고 싶은 단계. 평생 잊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을 남기는 때. 그러나 두 번째라면 절대 느낄 수 없는 두근거림과 설렘, 자부심이 있었던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외 출장을 갔던 20여 년 전, 그 여자는 귀국을 앞둔 호텔방에서 앞 부분이 뜯겨나간 수첩 같은 종이철을 발견하고선 미련 없이 휴지통에 버렸다. 왜 항공사들은 깔끔하게 티켓을 주지 않고 이렇게 낙서를 가득 적어 종이를 낭비하느냐며. 그러나 그것은 귀국행 티켓이었다. 공항에서 일행들이 뿜어내는 원망의 눈초리를 그 여자는 평생 겸허해지고 싶을 때마다 떠올린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마디 하기는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외국엔 처음 나와봐서요.”


처음으로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갔을 때, “힘을 주세요, 힘을 줘야 아기가 나오죠!”라고 소리치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온몸에 힘을 꽉 주었다가 의사에게 다리를 한 대 찰싹 맞았다. “쓸데없는 데 힘주지 말고 힘을 줘야 할 데 주라고욧!” ‘아니 선생님 제가 아이를 낳아 봤어야 알죠.’ 이후 그 여자는 첫 출산을 앞둔 후배마다 찾아가서 어디에 어떻게 힘을 줘야 하는지 청하지도 않은 분만 강의를 늘어놓는다.


처음은 서툴다. 처음은 어색하다. 그리고 처음은 아프다. 처음이 만들어낸 기억들은 늘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리고 되돌아가고 싶게 만든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일은 누구에게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 여자는 정말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처음엔 막 울었고 문상객들이 멀리서 찾아오면 반갑고 고마운 표정도 지었다가 가족들끼리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 정작 아버지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이별을 할 땐 눈물이 말라버려 그냥 멍하니 서있었다.


가장 아쉬운 건 처음으로 엄마 노릇을 할 때였다. 초보 엄마는 진짜로 아무 것도 몰랐다. 아무리 피곤해도 아이와 눈을 맞춰주고 부비대며 놀아줘야 한다는 걸. 때가 되면 영양가 있는 이유식을 해먹이고 책을 읽어주고 밖으로 놀러도 다니고 학부모들 만나서 교육 정보도 듣고 학원도 열심히 보내야 하는 것을. 늘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잘할 수 있겠지’라고 새롭게 다짐을 해봤지만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고 커 나갔고 그때마다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는 초보엄마일 뿐이었다. ‘엄마가 엄마 경험이 없어서 미안해’라고 말도 해보고 생각도 해봤지만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일조차 노련하지 못한 초보엄마의 실책이란 것도 아이가 다 크고 나서야 알았다.


딱 한 번만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기뻐할 때 기뻐해 주고 슬퍼할 때 슬퍼해 주고 젊은 날엔 젊음을 아끼지 않고 사랑할 땐 사랑을 퍼부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 여자를 괴롭히는 생각들은 또 있다. 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무얼 해도 다 처음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다 노련하고 능수능란하게 척척 잘 해내는 걸까. 여행도, 자식 노릇도, 엄마 역할도. 그리고 사는 것도.


그래도 이만큼 살아온 시간 동안 그나마 익숙해진 게 있다면 스스로 위안을 찾는 일이다. 괜찮아. 누구나 다 처음으로 살아보는 거잖아. 어차피 누구나 다 ‘초보 인생’인걸.


나의 서투름에 마음을 여니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절대 느끼지 못할 또 다른 처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뒤뚱거리던 두발 자전거가 처음으로 앞으로 쭉 나갈 때 그 벅차오름, 처음으로 합격 소식을 전화로 들었을 때 그 가슴터짐. 처음으로 그 사람의 손길이 내 손에 스쳐 지나갈 때 그 설렘과 온기, 첫 직장에 첫 출근할 때 그 자부심, 아이에게 처음으로 젖을 물렸을 때 그 뿌듯함, 그리고 그 아이가 첫걸음을 내디뎠을 때 지었던 그 큰 미소….


처음으로 늙어가는 지금, 또 어떤 처음을 맞이하게 될까. 아직도 남아 있을 그 수많은 첫 경험들을 상상하면 이 나이에도 가슴이 두근댄다. ●


 


 


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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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