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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세 단상


1861년 7월 4일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특별의회를 열었다. 목적은 4월부터 시작된 ‘남북 전쟁’의 자금 마련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남북 전쟁은 노예 제도를 지지하는 남부의 7개 주가 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합중국의 요새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신생 국가 미국은 국가로 탄생한지 100년도 되지 않아 나라가 쪼개지려는 건국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었다.


분리 독립을 선언한 남부연합이나 북부를 중심으로 한 합중국 정부나 전쟁 첫 해에는 자원한 병력이 충분했다. 문제는 이들을 훈련시키고 무장시킬 돈이었다. 링컨 대통령이 특별의회를 연 것은 군비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합중국의 정부 재정은 전쟁 이전부터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 원인은 13년 전에 시작된 ‘골드 러시(gold rush)’에서부터 비롯됐다. 골드 러시는 1848년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미국 내외에서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현상이다. 요즘 가치로 수백 억 달러어치의 금이 세상에 나왔고, 미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 건설이 본격화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그 결과 철도 회사의 주가가 뛰기 시작하고 서부의 개발에 투자와 대출이 몰렸다. 거품이라 불릴 만큼 경기가 좋았다. 그러나 1850년대 중반 금 생산이 줄어들면서 과열된 개발 경기에 불안감이 돌았다. 결국 1857년 여름, 주가가 폭락하고 서부 개발과 연계된 금융회사들이 도산하면서 금융 위기가 닥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앙 아메리카에서 1만 4000kg의 금을 싣고 미국으로 향하던 배가 허리케인으로 난파하면서 금을 기다리던 은행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당시에는 은행이 금을 바탕으로 지폐를 발행하던 때라 은행에 금이 부족하다는 것은 은행의 공신력이 추락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경제 상황 때문에 정부 재정은 적자가 쌓이고 있었다. 남북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860년 합중국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돈을 빌리기 위해 발행한 국채의 이자율은 8∼12%에 달했다. 최근 발행된 10년 만기 미국 국채 이자율이 2% 미만인 것과 비교하면 당시 이자율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높은 이자율을 주고라도 돈을 빌려야 할 만큼 합중국 정부의 재정 사정은 심각했던 것이다. 재정이 어려운데 전쟁까지 치르게 되었으니 특별의회에 모인 링컨 대통령과 의원들의 심정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 특별의회의 결정으로 미국에서 처음으로 소득세가 도입되었다. 연간 800달러가 넘는 소득을 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3%의 세금을 걷는 방식이었다. 1861년 800달러면 현재 물가로 2만 달러가 약간 넘는, 약 2400만원의 돈이다. 당시 약 3%의 인구만이 그 이상의 소득을 벌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세수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소득세가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갖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영국의 경우 1798년 나폴레옹과의 전쟁 준비로 소득세를 처음 걷었다. 프랑스는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소득세를 걷기 시작했다. 즉, 초창기 소득세는 전쟁과 같은 긴박한 조건에서야 도입될 수 있는 예외적인 세금이었던 것이다.


소득세 도입이 쉽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철학적인 것이었다. 정부가 개인의 소득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정부 간섭이고 잠재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할 요인이라는 관념이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기술적으로 개인의 소득 파악이 쉽지 않은 면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이전의 세금은 재산세, 관세, 특정한 물품에 대한 거래세 등 비교적 세원 파악이 용이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 외에 이 무렵 소득세를 걷을 수 있게 된 데에는 중요한 경제적 배경이 있었다. 바로 땅과 같은 재산에 근거하지 않고 소득을 버는 사람들이 늘어난 사실이었다. 농업의 비중이 압도적인 때에는 농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세금을 낼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공업이 발달하면서 재산이 없어도 돈을 버는 계층이 생긴 것이다.


어렵게 도입된 소득세였지만 첫 해 세수는 정부의 예상에 훨씬 못 미쳤다. 징수 행정이나 미납 시 조치 등에 대한 규정이 미비했기 때문이다. 결국 바로 다음 해인 1862년 7월 1일 전년도 결정된 소득세가 다 걷히기도 전에 새로운 세법이 등장한다. 이 세법으로 국세청(Internal Revenue Service, IRS)의 전신인 국세위원회가 생겼다. 그리고 충분한 세수 확보를 위해 누진적 소득세가 도입되었다. 누진적 소득세란 소득이 늘어날수록 적용되는 세율이 커지는 세제를 말한다. 새로 도입된 소득세제에서는 600달러에서 1만 달러 소득자는 3%, 1만 달러 초과 소득자는 5%의 세금을 내도록 되었다. 이후 재차 개정되면서 소득세는 1873년에 폐지되도록 결정된다. 미국에서 소득세가 영구적으로 자리잡은 것은 20세기 들어서이다.


우리나라의 헌법이 공포된 것이 1948년 7월 17일이고 소득세법이 제정된 것이 불과 1년 후인 1949년 7월 15일이다. 제정된 소득세법은 이미 누진적 소득세를 규정하고 있었다. 이것을 보면 소득세가 별다른 논의 없이 우리나라에 이식된 제도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소득세가 국세청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 가까이 된다. 단일 세목으로는 부가가치세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이렇게 중요한 세금이고 앞으로 복지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증가하면서 그 중요성이 더 커지겠지만, 소득세에 대한 우리의 고민이나 공감은 반세기가 넘도록 크게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본격적으로 무더워지는 7월, 전쟁 중에 군비 조달을 고민해야 했던 미국 의회나 대한민국을 세우는 설렘과 흥분이 가득했을 제헌 국회를 상상하면서 납세의 의무와 소득세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다.


 


민세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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